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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 연 끊은 아버지 '세금 폭탄' 물려줘... '돌연 상속' 늪에 빠진 일본

입력
2024.01.10 04:00
수정
2024.01.16 16:1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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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전쟁: 가족의 배신]
<3>어느 날 삼촌 빚이 도착했다
팔리지도 않는 시골집 갑자기 상속
아버지 배우자 상속 포기로 넘어와
매달 내야 하는 세금만 100만 원
교류 없던 삼촌 빚 9억 상속 받기도
'돌연 상속'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지자체·상속업계 관련 상담 활발

편집자주

상속 분쟁, 더는 남 얘기가 아닙니다. 사망자는 늘어나고, 가족 형태도 복잡해졌습니다. 부모님 사망 후 부동산에 욕심 내는 형제도 눈에 띕니다. 저성장 추세까지 고착화되면서 상속은 '이 시대 마지막 로또'가 됐습니다. 이래도 가족과 안 다툴 자신 있습니까. 죽은 자도 산 자도 걱정이 없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한국일보가 취재했습니다.

나가누마 마스미가 지난해 11월 29일 상속 관련 서류를 끌어안고 일본 니가타시의 한 카페에 앉아 있다. 박지영 기자

나가누마 마스미가 지난해 11월 29일 상속 관련 서류를 끌어안고 일본 니가타시의 한 카페에 앉아 있다. 박지영 기자

"요즘은 부모가 이혼한 뒤 한쪽과 연락 끊기는 경우가 드물지 않죠. 하지만 남보다도 못하게 지냈더라도 혈연이란 이유로 빚이든 빈집이든 상속받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지난해 12월 29일 일본 니가타현 니가타시에서 만난 나가누마 마스미(50)가 열변을 토했다. 그는 2019년부터 3년 동안 단 하루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다. 반평생 연을 끊고 지내던 아버지가 사망한 뒤 매달 세금을 내야 하는 시골 빈집을 갑자기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다사(多死) 사회에 진입했다. 지난 10년 간 한국의 사망자는 10만 명 증가했는데, 같은 시기 일본은 30만 명이 늘었다. 게다가 한 해 250만 명 넘게 태어났던 단카이 세대(베이비붐 세대·1947~1949년생)가 7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사망자 수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일본은 상속 관련 법 체계가 한국과 비슷한 데다, 상속으로 인한 각종 사회 문제도 먼저 경험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가누마가 겪은 '돌연 상속'이다. 혈연과 대가족에 기반해 만들어진 법이 바뀌지 않으면서, 먼 친척이나 연락이 끊긴 부모에게서 채무나 빈집을 갑자기 상속받는 것을 말한다.

상속 포기 후 떠난 아버지의 불륜녀… 돌연상속

나가누마는 니가타시 외곽에 자리 잡은 시골집에서 나고 자랐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91년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쫓겨나다시피 그 집을 떠났다. 아버지의 여성 편력 때문이었다. 불륜 상대와 재혼한 아버지는 위자료 한 푼 주지 않고 세 사람을 쫓아냈다. 맨몸으로 니가타 시내에 정착해야 했던 나가누마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이후 금전적 도움을 주기는커녕 사소한 연락조차 없었다. 그는 "아버지는 '여자는 필요 없다'며 중학교 2학년 이후로는 나에게 1엔(10원)도 지원하지 않았다. 2008년 남동생의 결혼 소식을 전하러 갔지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문전박대를 당했다"며 치를 떨었다.

나가누마 마스미가 일본 니가타시의 카페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박지영 기자

나가누마 마스미가 일본 니가타시의 카페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박지영 기자

나가누마는 돈을 벌어 동생을 대학에 보냈고 자신은 가게를 차려 운영했다. 자연스럽게 고향집은 그에게 애틋한 추억보다는 잊고 싶은 기억으로 각인됐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매일 싸우고, 불륜 여성이 집에 들어와 우리에게 나가라고 소리 지르던 기억밖에 안 남아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꼴도 보기 싫던 고향집이 갑자기 나가누마 앞으로 떨어졌다. 2019년 7월 25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벌어진 일이다. 친척을 통해 사망 소식을 들은 나가누마는 장례식 참석을 망설였지만, 그래도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해 조문했다. 시골집에는 아버지의 새 부인이 계속 머물 것으로 생각해 상속에 대해선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해 11월 고향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는 "너희 아버지와 재혼한 여자가 이사를 간 것 같다"고 전했다. 뭔가 이상해 집 명의를 체크해보니 자신과 남동생이 상속받도록 돼 있었다. 아버지의 새 부인은 이미 상속 포기 신청을 마친 뒤였다.

나가누마 아버지의 새 부인이 작성한 상속포기 증명서. 박지영 기자

나가누마 아버지의 새 부인이 작성한 상속포기 증명서. 박지영 기자

'시골 집이라도 부동산인데 상속받으면 좋은 것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일본에선 시골 빈집은 팔리지도 않으면서 매달 세금만 내야 하는 골칫덩이로 인식돼 있다. 지바현 후나바시 시청에서 빈집 관리를 담당하는 요시노 다카유키는 "집과 토지 가격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주택 소유자는 고정 자산세와 토지세 등으로 매달 10만 엔 정도를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가누마도 세금 부담으로 상속을 포기하려고 여러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3개월 룰'을 어겼다는 게 이유였다. 일본 민법상 상속 포기는 자신이 상속인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된 시점부터 3개월 이내에 신청해야 한다. 새 부인은 사망일로부터 3개월을 2주 앞둔 2019년 10월 11일 상속을 포기해 간발의 차이로 세금 부담에서 벗어났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나가누마에게 골칫덩이 빈집이 생긴 이유다.

다사(多死) 사회 맞은 일본

나가누마 처럼 연락이 끊긴 부모나 먼 친척의 채무·빈집을 상속받는 사례가 속출하자, 일본에선 '돌연 상속'이란 말이 사회적 용어로 자리잡았다. 2019년 12월 일본 언론에는 삼촌의 빚 1억 엔을 상속받게 됐으니 갚으라는 연락을 받은 50대 남성의 사연이 소개됐다. 해당 남성은 "10년 넘게 연락도 없었고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삼촌의 자식들이 상속을 모두 포기하면서 넘어온 것이었다"며 황당해했다.

돌연 상속이 발생하는 이유는 일본의 상속 시스템 때문이다. 일본 민법상 상속 1순위자가 상속을 포기하면 상속권은 나머지 1순위자에게, 1순위자가 없다면 후순위자에게 넘어간다. 이 같은 '상속 폭탄'의 고리는 4촌 이내 친척까지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상속 관련법도 일본과 유사해, 돌연 상속 문제는 최근 한국에서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선순위자가 자신의 상속 포기 사실을 후순위자에게 알리면 돌연 상속을 피할 수 있지만, 연락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재혼 가정이나 한부모 가정 등 가족 형태가 다양해지고, 친척 간 교류가 소원해진 탓이다. 나가누마 아버지의 새 부인도 상속을 포기하면서 나가누마 남매에게 이런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문제는 일본이 다사(多死) 사회로 진입하면서 돌연 상속의 부작용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2022년 일본의 사망자 수는 10년 전보다 25% 늘어난 156만8,961명에 달해,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상속법 알려주는 지자체

돌연 상속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상속 관련 지식을 알려주는 지자체도 생겨났다. 지바현 후나바시시는 3년 전부터 시청 홈페이지에 '어느 날 갑자기 빈집의 상속인이 되었다면' 코너를 통해 상속 포기 기한이나 상속 순위 등을 안내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일 후나바시 시청에서 만난 미츠하시 야스유키 시민안전추진과 계장은 "빈집 문제를 처리하다 보니 결국 상속 문제로 연결되더라"며 상속 관련 안내를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 미츠하시 계장의 주요 업무는 빈집으로 인해 들어온 민원을 처리하는 것이다. 일본에는 방치된 빈집이 많아 벌레, 잡초, 붕괴·화재 위험 등 다양한 민원이 들어온다.

지난해 12월 1일 미츠하시 야스유키 일본 지바현 후나바시시 시민안전추진과 계장(왼쪽)과 같은 부서 직원 요시노 다카유키가 시청 내 빈집 상담 창구에 앉아 있다.박지영 기자

지난해 12월 1일 미츠하시 야스유키 일본 지바현 후나바시시 시민안전추진과 계장(왼쪽)과 같은 부서 직원 요시노 다카유키가 시청 내 빈집 상담 창구에 앉아 있다.박지영 기자

민원을 처리하기 위해선 빈집 주인을 찾아야 하지만, 자신이 집을 상속받아 주인이 됐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시청은 이에 빈집이 생기면 상속인을 찾아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상속인이 됐다는 사실과 함께 상속 절차, 상속 순위, 포기 절차 등 상속법과 관련된 내용을 담았다. 미츠하시 계장은 "편지를 보내면 80~90% 정도는 상속을 포기한다"며 "시골 집이라 가치가 크지 않은 측면도 있지만, 고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부채가 발견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상속 포기된 집은 법적 절차를 거쳐 국가에 귀속된다.

후나바시시는 상속과 관련된 홍보 활동도 강화하고 있다. 시는 웰다잉을 위해 '엔딩노트'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상속 관련 내용도 담았다. 미츠하시 계장은 "직접 가계도를 그려보는 페이지가 있다"며 "누가 상속인이 되는지 정확히 알아야 생전에 대비할 수 있고, 주인 없는 빈집이 생기는 것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오사카시도 2020년 돌연 상속에 대비하기 위한 안내서를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시는 "소원했던 친척의 상속 문제에 휘말리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며 "어느 날 갑자기 삼촌의 집을 상속받으면, 건물 유지나 해체를 위해 큰 지출이 생길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속도 이젠 하나의 시장"

변호사, 법무사, 세무사 등 상속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계에선 다사 사회 도래와 함께 '상속 시장'이 형성됐다고 말한다. 상속 관련 상담·강연을 하는 상속 문제 대책 연구소 혼마 후미야 대표는 "최근에 일본에선 사망 전에 상속과 관련한 대책을 세우는 게 유행하고 있다"며 "사망자가 늘어나면서 돌연 상속뿐 아니라 형제간 유산 다툼, 치매 걸린 부모의 유언장 조작 등 다양한 사회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혼마 후미야 상속문제대책연구소 대표가 지난해 11월 29일 도쿄 시나가와구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지영 기자

혼마 후미야 상속문제대책연구소 대표가 지난해 11월 29일 도쿄 시나가와구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지영 기자

상속과 관련된 유언대용신탁도 증가하고 있다. 생전에 은행, 증권사 등과 계약해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이전해 놓으면, 사후에 금융기관이 이를 관리·배분하는 상품이다. 유언장처럼 누구에게 어떤 재산을 얼마만큼 물려줄지 정할 수 있다.

특히 교육자금증여신탁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조부모가 손자의 교육자금으로 사용될 돈을 맡기는 상품으로, 1,500만 엔까지 비과세다. 일본신탁협회에 따르면 제도 시행 첫해인 2013년 계약 건수는 4만9,694건, 총 신탁 금액은 3,275억 엔이었지만, 10년이 지난 지난해(9월 기준)에는 각각 26만4,507건과 2조59억 엔으로 급증했다.

일본의 상속 전문가들은 상속 분야가 하나의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고 입을 모은다. 혼마 대표는 "상속 관련 거래와 서비스를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도 있고, 손해를 보는 사람도 생겨났다. 시장이 형성됐다고 판단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나가누마는 어떻게 됐을까

그렇다면 시골 집을 갑자기 물려받게 된 나가누마는 어떻게 됐을까. 다행히 집을 매각하는 데 성공했다. 빈집 상속인치고는 운이 좋은 편이다. 아직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남동생의 지인이 "농막으로 쓰겠다"며 사주기로 한 것. 278만 엔에 팔았지만, 나가누마 수중에 들어온 돈은 없다. 토지 지목을 변경하고, 양도세 등을 내고 나니 매각 대금은 그대로 빠져나갔다.

나가누마가 아버지 소유의 시골집이 매각된 과정을 서류를 보며 설명하고 있다. 박지영 기자

나가누마가 아버지 소유의 시골집이 매각된 과정을 서류를 보며 설명하고 있다. 박지영 기자

나가누마는 빈집을 갑자기 물려받아 처리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그는 "주위에서도 내가 겪은 일 때문에 돌연 상속 관련법을 알게 됐다고 한다"며 "부가가치세가 10%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듯, 상속 관련 '3개월 룰'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츠네오카 후미코 요코하마 국립대 국제대학원 법학과 교수는 "그동안 일본에선 돌연 상속과 관련한 황당한 사건이 제법 있었지만, 시민들에게 3개월 룰은 아직도 생소한 편"이라며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더 많은 홍보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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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후나바시·도쿄=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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