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가스료 3배 오를 때 한국 3%만? "숨은 외상값 5조"

2022.09.26 04:30
유럽 각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장기화에 따른 에너지 가격 폭등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있다. 러시아가 유럽으로 가는 파이프천연가스(PNG) 밸브를 잠그자, 독일 전기 요금은 지난해보다 7배 상승했고, 영국에선 1년 새 30곳이 넘는 전기·가스 소매사업자가 파산했다. 소비자들이 내야 하는 가스 요금도 폭등했다. 오스트리아 에너지 기관 등이 운영하는 HEPI에 따르면 독일의 주택용 가스 요금은 지난해 3월 메가줄(MJ)당 24.6원(한화 환산액)에서 올해 3월 86.6원으로 3.52배 올랐고, 네덜란드는 39.6원에서 127.9원으로 3.23배 치솟았다. 한국은 어땠을까? 같은 기간 국내 소비자가 내는 가스 요금은 MJ당 14.2원에서 14.7원으로 올라 거의 변동이 없었다. 독일서 가스 요금이 3.5배 오르는 사이, 한국에선 3.5%만 올랐다. 독일이나 한국이나 가스를 수입해 쓰는 건 마찬가지인데, 한국에선 어떻게 '3%의 기적'이 가능했던 걸까? 한국이 가스 요금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액화천연가스(LNG) 물량 대부분을 10년 이상 장기계약으로 확보해 뒀기 때문이다. 한국은 전체 LNG 공급량의 80% 정도를 장기계약 물량으로 충당한다. 장기계약 가격은 현물보다 비쌀 수도 있지만, 안정적으로 공급량을 확보할 수 있고 지금처럼 국제 가격이 요동을 칠 때 낮은 가격을 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장기 물량이 80%라는 것은 거의 모든 물량을 현물로 충당해야 하는 유럽 국가와 비교해 충격이 5분의 1 수준으로 적다는 얘기다. 한국 가스 가격이 안정적인 또 다른 이유는 정부의 가격 통제가 강력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가스 시장은 소매 부문까지 민영화가 이뤄져 있어 소비자가 거의 시장 가격을 부담해야 하지만, 한국의 가스 가격은 오롯이 정부의 뜻에 달려 있다. 한국가스공사 최대주주(기획재정부 26.15%, 한국전력공사 20.47%)인 정부는 가스공사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하는 대신, 가스 요금을 정책적 필요에 따라 통제한다. 언뜻 보면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는 한국 방식이 소비자에게 훨씬 유리해 보이지만, 누군가(가스공사) 가격 인상에 따른 부담을 장기간 짊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가격 폭등의 충격'을 유보하는 데 따른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소비자 입장에선 당장 올겨울 난방비가 크게 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봐선 이번 겨울에 내지 않은 요금을 결국 내년이나 그 이후에 내야 하는 구조다. 그리고 나중에 낼 때는 지금 안 낸 돈의 이자까지 붙여서 내야 한다. 한국의 다른 에너지 기업과 달리 가스공사는 독특하게 '미수금'이라는 항목을 가지고 있다. 정부의 가격 통제로 받지 못한 돈(LNG 수입가와 소비자 가격의 차액)은 그냥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외상값처럼 자산의 형태로 남는다. 이 미수금은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나중에 가스 요금에 반영된다. 향후 국제 가스 가격이 내렸을 때 소비자 가격을 내리지 않고 요금을 유지해 미수금을 줄여나가는 식이다. 실제 정부는 국제 유가가 가파르게 상승했던 2008년 금융위기 때 국내 가스 요금을 통제했고 그 결과 2012년 가스공사엔 5조5,000억 원의 미수금이 쌓였다. 가스공사와 정부는 이 미수금을 국제 가격이 낮았던 2013~2017년 소비자 요금에 반영했고 결국 2017년 말 전량 회수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로 가스공사의 미수금은 다시 5조4,000억 원(올해 6월 기준)으로 불어났고, 이런 추세라면 연말에 7조9,000억 원에 이르러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할 전망이다. 가스공사의 미수금은 손실이나 부채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보전을 약속한 비금융자산 취급을 받는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처럼 나중에 요금으로 보전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수금 증가는 결국 가스공사와 정부의 부담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LNG 확보를 위한 국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계약을 따내려면 돈이 필요한데, 당장 소비자에게 받을 돈을 미뤘으니(미수금) 가스공사는 은행에서 차입을 하거나 채권을 발행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지속적인 기준금리 인상 탓에 시장금리가 급등했고, 그로 인해 가스공사의 이자 부담도 과거보다 점점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가스공사는 정부가 운영하는 회사라 금리 부담도 일반 회사보다는 적다"면서도 "그러나 지금 같은 금리 상승기에는 이자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가스공사는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 총 3조6,400억 원의 채권을 발행했는데, 그해 11월 발행 채권의 경우 표면금리가 7.070%(당시 기준금리 4.25%)에 달했다. 미수금에 따른 금융 비용은 소비자에게도 전가된다. 가스공사 관계자는 "미수금이 적기에 회수되지 못하면 단기차입금 등에 필요한 금융조달비가 추가로 소요된다"며 "이 금융비용은 미수금에 포함된다"고 답했다. 소비자 입장에서 낮은 가스 요금은 당장의 부담은 덜하지만 나중에 이자까지 나눠서 내야 하는 '유이자 카드 할부'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국제 가스 요금 인상에 따른 충격을 가스공사 혼자서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현재 구조에 숨은 위험 요소를 검토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LNG 현물 가격이 한때 저점 대비 35배까지 치솟는 비상 상황에서, 비현실적으로 낮은 가스 요금 인상률은 오히려 위기를 체감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창의융합대학 학장은 "정부의 요금 통제 정책이 물가 상승기 가계의 부담을 줄여주는 완충재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가가 비상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지금의 요금 인상 수준은 너무 낮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격 인상을 통해 위기 상황에서는 모두가 에너지 절약에 나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질 필요도 있다"며 "가격 인상을 감당할 수 없는 소외 계층에 대해서는 에너지 바우처를 주는 식으로 충격을 줄여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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