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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한강 소설 번역했다"... 번역가들이 말하는 한강의 세계

2024.10.13 17:03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발표된 순간, 밀려드는 연락에 정신없던 이들이 있다. 한강의 작품을 여러 언어로 옮긴 번역가들이다. 한강의 문학이 세계의 독자들에게 도달하도록 해준 이들에게 축하와 감사가 쏟아진 건 당연했다. 한강의 작품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과 민간 재단인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총 28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세계에서 읽히고 있다. 한강의 소설을 번역한 최경란(61·프랑스어)과 사이토 마리코(64·일본어), 윤선미(59·스페인어)를 전화 통화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만났다. 한강과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여성 번역가로서 그의 작품에 깊게 감응한 이들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놀랍지만 마땅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비현실적인 공간에 붕 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곧 ‘드디어 그들도 깨쳤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형용할 수 없는 기쁨에 휩싸였습니다.”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2021)를 프랑스어로 옮긴 최경란 번역가는 노벨문학상 발표 순간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찌 보면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대구에서 태어나 파리 제10대학에서 유학한 최 번역가는 1990년대부터 번역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일을 주로 했으나 김영하 작가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 번역을 계기로 한국 문학 번역의 보람을 발견했다. 최 번역가는 “모든 작품의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작의 내용과 정서, 느낌과 질감 등을 최대한 고스란히 전달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최 번역가가 프랑스인 피에르 비지유와 함께 번역한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강에게 지난해 프랑스 메디치상에 이어 올해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을 안겼다. 수년 전부터 한강을 주목한 프랑스 그라세 출판사의 편집자 조아킴 슈네르프의 요청으로 번역했다는 최 번역가는 “‘작별하지 않는다’는 특별히 번역이 어려운 작품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왜일까. 그는 “좋은 작품을 번역할 때는 즐거움이 배가되기 때문”이라면서 “이 작품을 번역한 시간은 아름다운 시간이었다”고 덧붙였다. 최 번역가와 비지유 번역가는 작업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원작자인 한강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최 번역가는 “번역 과정에서 표현이 모호하거나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아 작가에게 확인해야 할 부분이 발견되기도 한다”며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질문할 거리가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한강 작품의 매력도 이와 상통한다. “깊고 풍부한 동시에 모호성은 배제되어 정확한 의미를 마음속으로 똑바로 전달하는 정제된 언어가 한강 문학의 매력입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보며 세계가 그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대량학살과 폭력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의 노력이 세계인 누구에게나 중요하다는 의미죠.”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2011)부터 일본에 나온 한강의 책 대부분을 번역한 시인이자 번역가인 사이토 마리코(64).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 문학 번역자인 그는 “일본 독자들이 한국 작가의 수상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쁘고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일본 메이지대학 재학 중 동아리에서 한국어를 접한 사이토 번역가는 1991년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우연히 번역을 맡은 박민규 작가의 소설 ‘카스테라’로 제1회 일본번역대상을 받으면서 번역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를 일본어로 옮기면서 제주 방언을 일본 오키나와 방언으로 번역했다. 번역 과정에서 제주를 방문한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본토에서 버림받아 학살이 벌어진 공간이었던 오키나와를 떠올렸다. 한국 문학과 연이 깊은 사이토 번역가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두고 “한 사람이 천재라는 뜻이 아니다”라면서 “잔혹한 현대사 속에서 살아남은 한국 문학의 토양이 만들어낸 최고의 결정체”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한강이 그리는 역사의 트라우마는 이것이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필수적인 행위라는 강한 의지에 근거한다”면서 “한강뿐 아니라 황정은, 정세랑, 김애란 등 한국의 여성 작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자세”라고 밝히기도 했다. 사이토 번역가는 “어떤 사람들은 한강의 글이 난해하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한강 작가의 글은 결코 사람을 미아로 만들지 않는다. 알기 쉽고 단순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중요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글”이라면서 “(작품을 읽으며) 작가가 만들어 놓은 길을 걸어가면 된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정중하게”라고 했다. “처음 ‘채식주의자’를 읽고 너무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어요. 이후로 영국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 소식에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노벨문학상은 (당장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얼마든지 받을 작가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교수인 윤선미(59) 번역가는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와 ‘소년이 온다’(2014) ‘흰’(2016)을 스페인어로 옮겼다. 어린 시절 아르헨티나에 산 그는 현지에서 스페인 문학을 전공하고 30대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번역을 하면서 “처음엔 한국 문학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고 털어놨다. 한국 문학의 차세대 기수를 소개하는 한 기사에 실린 한강이 어느 날 윤 번역가의 눈에 들었다. 곧바로 ‘채식주의자’를 읽은 그는 “읽자마자 스페인어로 번역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저 작품에 매료돼 시작한 번역은 ‘채식주의자’의 2018년 스페인 산클레멘테 문학상 수상이라는 성과를 냈다. 이후로 ‘소년이 온다’ ‘희랍어 시간’을 번역한 데 이어 지금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스페인어로 옮기고 있다는 윤 번역가는 한강 작품들을 “울면서 번역했다”고 말했다. 그는 “독자로 작품을 읽을 때와는 다르기 때문에 번역할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멈추기가 힘들 정도로 (소설에) 몰입하다 보니 눈물이 나더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보편성 있는 작품이라 세계 독자가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벅차오른다는 윤 번역가는 “해외에서 아시아 문학 중에 제일 적게 알려진 것이 한국 문학”이라면서 “(한국 문인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이미 이름이 알려진 작가가 아니어서 (한국 문학을 찾아 읽기보다) 아직은 낯선 상태에서 호기심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고 짚었다. 한강의 작품에는 “이런 우연을 ‘필연’으로 바꿀 힘이 있다”는 것이 윤 번역가의 말이다.
소설가 한강(54)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의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던 순간을 김길자(83)씨는 잊지 못한다. 1980년 5월의 광주, 위험하다는 만류에도 '민주주의'를 외치며 버티던 열일곱 아들 문재학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어머니였던 김씨는 이후 아들의 폭도 누명을 벗기기 위한 '투사'가 됐다. 아들을 잃은 삶은 하루하루가 늘 장례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흘러 아들은 '폭도'에서 '열사'로 바로잡혔지만 그렇다고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프게 보낸 아이가, 소설의 주인공이 됐단다. 그것이 '소년이 온다'였다. 아들의 죽음을 알리려 평생을 싸운 어머니에게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더 각별하고, 감격스러웠다. "작가님 덕에 5·18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될 텐데, 제가 백 번 투쟁한 것보다 더 큰 힘이죠." 11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씨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고마움을 표했다. "애를 25일, 26일 두 번이나 데리러 갔어요. 근데 재학이가 버티는 거야."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김씨는 아직도 1980년 5월이 생생하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재학이 시위에 간 건 5월 21일. 목이 쉰 채 돌아온 아들은 그날 이후 매일 전남도청 앞에 나갔다. 그러다 계엄군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에 남편과 함께 재학을 데리러 갔다. 그런데 앳된 얼굴의 아들은 퍽 단호했다. "'엄마, 어떻게 나만 살 수가 있어' 어린애가 그렇게 말하는데 할 말이 없데요." 그렇게 불안을 달래며 돌아섰는데, 돌아온 건 비보였다. 재학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 도중 사망했다. 계엄군 발포 소식에 김씨는 머리가 멍해졌다고 했다. '도청에 있는 사람 다 죽었겠네'라는 생각이 막연히 들다 '우리 애도 거기 있는데' 하고 무너졌다. 날이 샌 뒤 달려간 도청은 물청소라도 한 건지 아무 흔적 없이 깨끗했다. 가족, 담임 선생님까지 뛰어들어 수소문한 끝에 망월묘지공원 땅을 파헤쳐 암매장된 아들의 주검을 찾았다.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때 광주에선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관도 없었어. 수의 한 벌도 못해줬고···" 그 한(恨)으로 남은 기억을 동력으로 김씨는 투사가 됐다. 아들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폭도'로 모는 전두환 정권과 싸웠다. 집회 중 경찰에게 머리채를 잡혀 내팽겨치면서 "이X들 유족만 아니면 싹 다 묻어 버리는 건데"라는 폭언을 듣거나, 무전기에 머리를 폭행당해 여덟 바늘을 꿰맬 정도로 피투성이가 된 적도 있다. 매사 감시를 당했고, 강압적인 진압에 유족들은 겁을 먹고 움츠러들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김씨는 아들을 생각하며 꿋꿋하게 버텼다. 그리고 우직한 노력 끝에 재학은 수십 년 만에 유공자로 인정받으며 명예를 회복했다. 김씨는 2014년 발간된 '소년이 온다'를 한동안 보지 못했다. 처음엔 '우리 애를 왜'라는 의문이었고, 그다음엔 아들의 마지막을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다. 그러나 소설은 자체로 큰 위로가 됐다.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왔어야 됐는데, 하는 죄책감에 오래 시달렸거든요. 그런데 재학이가 끝까지 남아 싸워 소설 주인공도 되고. 장하다는 생각만 들어요. 뭔가를 남기고 갔구나 하고." 무엇보다 소설은 김씨가 그간 싸워온 이유와 맞닿아 있다. 바로 재학의 죽음과 5·18의 진실을 널리 알리는 것. 김씨가 청와대, 광화문 등 전국 곳곳을 돌 때만 해도 5·18은 국내에도 얼마 알려지지 않았다. "엄마가 가자고 할 때 안 오던 네가 소설까지 나왔구나. 노벨상도 탔으니 세상이 다 알게 되겠구나, 했죠." 노벨위원회는 '소년이 온다'에 대해 "1980년 한국군이 자행한 학살 사건에서 살해된 인물,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이 책은 이 사건을 잔혹한 현실화로 직면함으로써 증인문학의 장르에 접근한다"고 평가했다. 인터뷰 말미 김씨는 한강 작가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무섭거나 사람들 앞에 설 때 항상 새기는 말이 '재학이가 못다 이룬 민주주의, 엄마가 다 이룰게'거든요. 그 외로움과 두려움을 작가님 소설 때문에 좀 덜었어요. 든든하고 감사합니다." 소설은 '장례식이 된' 김씨의 삶을 자체로 어루만져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