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조국·윤미향 이어
박원순까지 허탈감
안긴 '개혁 아이콘들'

2020.07.11 01:00
시민운동 대부로 정치개혁운동을 이끌다 스스로 '개혁 정치인'으로 성공적 변신을 했던 박원순 서울시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시민사회단체는 당혹감과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 6개월 새 사법개혁 주창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자녀 의혹으로 기소되고,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이끌던 윤미향 의원이 기부금 유용 문제로 수사를 받은 데 이어, 박 시장마저 극단적 선택으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자, 진보와 개혁의 '아이콘'들이 잇달아 국민에게 안겨 준 실망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유력한 시민운동가 겸 인권변호사 출신 박 서울시장이 9일 세상을 떠나면서, 시민사회단체와 상당수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고인의 생전 업적을 기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박 시장을 상대로 성추행 의혹 고소가 접수됐다는 점을 문제 삼아, 박 시장 스스로 생전에 주창하던 인권보호와 양성평등 등 개혁 가치를 훼손했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길지 않은 한국 시민운동 역사에서 박 시장은 빼놓을 수 없는 개혁의 상징이었다. 박 시장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로 정치권에 입문하기 전까지 참여연대, 아름다운 재단, 희망제작소 등을 설립하며 시민운동 상징으로 활동했다. 부패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한 낙천ㆍ낙선운동을 주도하며 활발한 정치개혁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인권변호사로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등 성폭력 사건을 맡으면서 여성 인권 향상에도 기여했다. 그렇기에 시민사회단체는 성추행 의혹 고소에 이은 박 시장의 사망에 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10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박 시장 빈소를 방문한 시민단체 관계자 A씨는 “박 시장이 민선 최초의 3선 서울시장으로 거둔 업적은 분명히 있지만,  성추행 의혹이 공소권 없음으로 끝난다는 불투명함 때문에 박 시장에 대한 답답한 마음만 커지게 됐다”고 토로했다. 조 전 장관과 윤 의원 의혹에 이어 개혁의 상징이 잇달아 각종 의혹에 휘말리는 사건이 잇따르면서, 개혁을 부르짖던 이들이 스스로 말하던 가치를 저버렸다는 뼈아픈 비판도 나오고 있다. 기성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던 그들이 되레 가족ㆍ금전ㆍ신변 문제에서 철저하지 못해 자기 진영과 국민 전체에 실망감만 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조 전 장관은 사법개혁을 외쳤지만 자녀의 표창장 위조ㆍ사모펀드 등 자신의 말과 상반된 의혹에 연루됐다”며 “윤 의원 역시 위안부 피해자 인권을 위해 활동했지만 통제받지 않는 지위를 남용해 회계를 부정하게 처리한 의혹을 샀다”고 지적했다. 진보와 개혁의 상징들이 보수와의 차별성을 주장하기 위해 무리하게 도덕성과 공정성을 외치다가 부메랑을 맞았다는 분석도 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김주형(30)씨는 “ “한국 진보세력은 도덕성을 자신들의 가치로 정립했지만, 그 힘은 자신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상실감도 적지 않다. 취업준비생인 이우신(29)씨는 “일련의 조국ㆍ윤미향 사건을 보면서 이들이 주장한 공정의 가치가 말 뿐은 아닌지 생각하게 됐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도덕성을 진보개혁 진영의 가치로만 볼 수 없고, 일부 인사의 개인적 사안을 진영 전체의 문제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익명을 요구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조국ㆍ윤미향ㆍ박원순 사건을 보면 한국 시민운동은 여전히 과도기에 놓여 있는 것 같다”면서 “시대를 바꾸는 과정에 큰 고통이 뒤따르는데 그 동안 시민단체로 대변되는 가치가 바뀌어야 새로운 질서가 생기지 않을까 한다”고 밝혔다.  이념과 별개로 권력 차원에서의 자기 점검과 긴장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있었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일련의 사태는 진보세력이 권력에 오르면서 긴장이 이완되며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이념을 떠나 권력가들의 긴장과 자기검열 결여가 문제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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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지자체장들만 왜,
유독 성추문 끊이질 않나?

2020.07.11 01:00
정치권의 ‘미투(#Me Too)’ 흑역사는 왜 끊이질 않는 걸까. 특히 여당 출신 광역단체장이 연달아 물의를 빚고 있다. 박원순 시장이 10일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배경에 성추행 사건 연루 의혹이 제기되면서 앞서  정치무대를 떠난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사례까지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공통점으로 절대적 인사권을 가진 지자체장의 제왕적 위치와 성추행 사건이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피해자가 억울한 사연을 지자체 내에서 알리기 힘든 분위기가 있는데다, 큰 용기를 내 내부 문제제기 절차에 들어가도 '조직에 해를 끼치는 공공의 적'으로 몰리는 경우를 우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10일 박 시장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 안 전 지사와 오 전 시장 등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더불어민주당 소속 광역 단체장은 이로써 3명이 됐다.  안 전 지사는 2018년 비서의 성폭행 폭로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지난해 9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6월을 받았다. 21대 총선 직후인 4월 23일엔 오거돈 전 시장의 성추행 사건이 터졌다. 그는 “한 여성 공무원을 5분간 면담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신체접촉이 있었다”며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전격 사퇴했다. 대권 잠룡들의 필수코스로 여겨지는 지자체장의 잇딴 성추문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기 때문이란 이유도 한 몫 한다. 최근들어 지역 내 야당이 미약해 제역할을 못하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반응이다. 지역 의회 역시 1당이 독식하는 상황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 직후 사퇴한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경우, 부산시의회 47석 중 더불어민주당이 41석, 미래통합당은 5석, 무소속 1석이란 조건을 갖고 있었다. 시의회를 90%에 가깝게 시장과 같은 민주당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의회 역시 110석 중 102석을 민주당이 싹쓸이하고 있다. 통합당은 6석, 정의당 1석, 민생당 1석이다. 여당이 의회를  90% 넘게  장악하고 있는 구조다.   이들 단체장의 성추문을 바라보는 여론은  피해자가 단체장을 폐쇄된 근접 거리에서 보좌하는 여성 비서관 등 상대적 약자란 점에서 분노하고 있다. 피해 장소가 집무실이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약자의 피해사실이 알려지기 어려운 환경이다. 2018년 3월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하며 정치권 미투의 불을 지폈고, 오거돈 전 시장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여성 공무원은 “시장 집무실로 갔다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박 시장도 자신의 전직 비서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반면 지자체장의 문제라기 보다 현 여권 리더들의 특성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학자는 "현 여권 세력은 엄혹한 군사정권 때 민주화투쟁을 해온 동료의식이 강하다"며 "이 가치에 매몰돼 같은 집단의 대의를 위해 작은 희생은 외면하는 독특한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선출직 고위공직자 일수록 직무ㆍ직업윤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신율 명지대 정외과 교수는 “철저하게 직업윤리의식에 기반해 공평 무상하게 업무를 수행해야 하며, 직원과의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리지 않도록 단체장 스스로 성찰하고 채찍질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교양학부 교수는 “특권 의식을 버리고 공정하게 업무를 수행하겠다는 가치관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빨치산의 아들,
'서편제' '취화선'으로
세계에 우뚝 서다

2020.07.11 04:30
임권택 감독은 1934년 전라남도의 장성읍 단광리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작은 지주 집안의 손자로 국민학교 3학년 때 광복을 맞은 그의 인생은 해방정국의 혼란과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산산조각 나고 만다.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를 다녔던 아버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외삼촌은 좌익 운동의 영향을 받아 지리산 빨치산에 들어갔고, 집안은 경찰의 감시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마을은 삽시간에 좌와 우로 갈라졌고 ‘빨치산을 잡아다가 국민학교 바로 옆 냇가에다 놓고 공개처형을 시키면서 애들 와서 구경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는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산을 내려와 자수했지만, 형사들이 일본도를 들고 집에 들이닥쳐 남은 친척의 행방을 대라고 협박하는 일을 수시로 겪어야 했다. “형무소에서 죽은 배다른 삼촌, 전쟁으로 고모부들도 다 죽었고, 고모도 빨치산에 가담했다고 잡혀서 평생 어디론가 굴러다니다가 죽었고... 외가, 가운데 할아버지, 전부 다 참으로 작살이 났으니까.”(정성일, 임권택 인터뷰집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남은 땅을 팔아야 생활이 될 정도로 가세는 기울었고, 빨치산 피해자 가족의 분풀이로 소년은 뒷산으로 끌려가 뭇매를 맞곤 했다. 광주숭일고등학교를 중퇴한 18세의 임 감독은 맨몸으로 가출해 부산으로 떠났다. 호남에서 영남을 관통하는 긴 여정. ‘만다라’(1981)에서 ‘개벽’(1991)과 ‘서편제’(1993)를 거쳐 ‘취화선’(2002)까지 일관되는, 정처 없이 방황하는 인간과 길 위의 풍경을 관조하는 정서는 이 무렵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임시수도 부산에 도착한 임 감독은 사흘을 굶으며 가판대에서 잠을 청했고 생존을 위해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새벽에는 온 몸의 통증으로 울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노동의 힘겨움을 술로 달래는 나날이 반복되면서 수전증이 오기도 했다. 부산에서 보낸 2년이 가장 처절하고 불행한 시기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영도다리 근처에서 미군이 남기고 간 군화를 고쳐 팔던 임 감독은 곧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이 공전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영화 산업이 돈이 된다는 인식이 퍼지자, 군화 물량을 대주던 상인들이 영화판으로 몰려들어 제작사를 차린 것이다. 국제시장에서 노점을 운영했지만 장사 수완이 없었던 임 감독은 영화사의 연락을 받고는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정창화 감독의 ‘장화홍련전’(1956)에서 소품담당을 한 것이 임 감독의 첫 영화 경력이었다. 이때까지 영화에 관한 경험이라곤 무성영화를 단편적으로 접해본 것 말고는 없었고, 작품을 만든다는 의식보다는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강했다. 통행금지가 오전 네 시까지였던 시절, 말단 스태프이었던 임 감독은 오전 다섯 시부터 영화사에 나와서 묵묵히 일했다. 밤낮없이 일에 매진하는 성실함을 눈여겨본 정 감독은 심부름꾼으로 부리던 임 감독을 연출부 막내를 거쳐 ‘비련의 섬’(1958) 즈음에는 조감독으로 차근히 승진시키는 한편으론 장래를 위해 독서를 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조언에 따라 임 감독은 당시 출간된 대중 소설 상당수를 독파했는데, 그렇게 축적한 독서량은 감독 입봉 후 10년간 쉼 없이 50여편 넘는 장르물을 소화하는 밑천이 된다. 당대의 스타 배우 김삼화의 뺨을 때리는 대형사고를 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안영촬영소에서 세트 촬영 중 정 감독과 불화 중이던 김삼화는 동료배우와 스태프의 거듭된 간청과 설득에도 응하지 않고 분장실에 틀어박혔는데, 한 사람의 고집으로 현장 전체가 마비되어 버린 데 격분한 임 감독은 ‘어차피 연출부 막내이니 뺨 한번 때리고 영화 일은 그만두면 된다’는 심사로 일을 저질러버렸다. 김삼화는 그 길로 바로 서울로 돌아가 버렸고, 이 사건은 임 감독과 제작부장이 김삼화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며 뺨을 석대씩 맞는 벌을 받고서야 수습되었다고 한다. 도제 생활로 잔뼈가 굵은 임 감독은 한흥영화사에서 독립군의 활약상을 그린 액션활극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로 데뷔한다. “5백여 스키여(스키어)를 동원했고, 5만 여발의 뇌관을 소비하는 등, 폭발사고로 엑스트라들의 치료비만 해도 1백만환이 넘었다는 화제의 영화”(조선일보 1962년 1월 18일자)는 설 연휴에 개봉해 서울 관객만 9만명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후 임 감독의 경력은 ‘월하의 검’(1970), ‘삼국대협’(1972) 같은 무협영화, 권투를 다룬 스포츠 영화 ‘나는 왕이다’(1966), 사극 ‘요화 장희빈’(1968), ‘욕망의 결산’(1964)에서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1972)에 이르는 액션물, ‘전쟁과 여교사’(1966), “바람같은 사나이’(1968)를 경유해 ‘증언’(1973)으로 이어지는 반공 기조의 전쟁영화, 한국 최초의 3D 영화 ‘몽녀’(1968) 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장르의 영화로 점철된다. 한 해에 7~8편을 찍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언젠가 제가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1960년대에 만들어진 저질 영화가 방영이 되고 있더라고요. 처음 보는 것도 같고, 한번 봤던 영화 같기도 했는데 끝나고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는 것을 보니 제가 연출한 작품이었어요. 10여 년 동안 50여 작품을 삶에 대한 고민 없이 찍어왔기 때문에, 그 당시의 영화들을 제 안에서 애써 지우려고 했던 연유도 있었겠지만 너무 많이, 그것도 한꺼번에 찍어낸 것이어서 다 기억할 수가 없더군요.” (임 감독 발언, 네이버 인생스토리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이 시기의 임 감독은 검열과 시장의 필요에 순응해 통속물을 다작하던 고용감독의 신세였다. ‘밤차로 온 사나이’(1970),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1971)처럼 숙련된 장인의 면모가 발휘된 수작도 있었지만, 예술가의 자의식이 반영될 여지가 없었던 그 무렵의 영화들을 두고 뒷날 그는 ‘습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부정한다. 구태의연한 상업영화 대신,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우리만의 영화’, ‘한국 사람들이 살아낸 수난의 세월이나 삶, 그리고 우리가 가진 문화적 개성들’을 담아낸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진지한 자기 반성과 열정이 서서히 그의 가슴을 채워가고 있었다. 제작을 겸한 첫 영화 ‘잡초’(1973)는 그러한 결심의 산물이었다. 한 여인의 기구한 인생사를 그린 이 영화는 흥행에 완전히 실패했으나, 이어서 발표한 ‘왕십리’(1976)와 ‘족보’(1978), ‘깃발 없는 기수’(1979)는 임 감독을 둘러싼 세간의 평가를 바꿔놓았다. ‘신궁’(1979)으로 정일성 촬영감독, ‘짝코’(1980)를 통해 송길한 작가와 손잡게 되면서 임 감독은 1980년대 한국영화의 빛나는 성취들을 일구어나갔다. 그 중에서도 “내 영화 일생에서 가장 적극성을” 보였던 작품 ‘만다라’(1981)는 제3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되었고, 훗날 ‘한국영화와 임권택’을 쓰게 되는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마닐라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보고 ‘걸작을 만났다’고 평했다.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희생되는 여성상을 다룬 ‘씨받이’(1986)는 주연 강수연에겐 제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임감독에게는 제34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안기면서, 세계영화계의 관심 바깥에 있었던 한국영화의 위상을 새로이 정립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한국영화가 세대교체의 격변을 맞는 와중에도 임감독은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현역 노장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역사가 남긴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인간을 조명한 ‘짝코’와 ‘길소뜸’의 관심은 ‘태백산맥’(1994)과 ‘하류인생’(2004), 주변부로 밀려난 삶을 다룬 ‘티켓’(1986)의 시선은 ‘노는 계집 창’(1997)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 전통의 미의식을 영화로 담고자 한 열망은 판소리를 소재로 한 ‘서편제’와 ‘춘향뎐’(1999)을 거쳐 화가 오원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취화선’이 제55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의 찬사를 받게 된다. 한국영화 반세기의 풍파를 견뎌낸 뿌리 깊은 거목(巨木)은 한국인의 역사와 정체성,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영화로 승화한 거장(巨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세계의 분쟁지역

인도령 카슈미르
'정착촌 식민화' 시작되나

5월 18일 인도 최북단 잠무 카슈미르주(州) 정부는 관보에 '잠무 카슈미르 영주권법' 관련 개정안을 공시했다. 개정안의 요지는 이렇다. 기존에 카슈미르 영주권자인 '선주민들'에게 거의 독점적으로 부여했던 공무직과 부동산 매입을 통한 재산소유권을 타지인에게도 확대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영주권 자격 조건도 완화하기로 했다. 카슈미르는 무력 분쟁이 계속되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풍경으로 '아시아의 알프스'로 비유될 만큼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한다. 이처럼 천혜의 환경을 갖춘 땅에 법 개정으로 '토지 수탈'과 '난개발', '투기' 바람이 닥칠지도 모를 불안감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 뿐이 아니다. 카슈미르 밖 인도인들을 유혹하는 부동산 정책은 카슈미르 인구 구성에 막대한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분석가들이 이번 조치를 전형적인 '정착촌 식민화' 정책으로 보는 이유이다. 사실상 정착촌 식민지 시대를 개시한 이번 개정안은 카슈미르 주정부가 공시하는 형식을 취했으나, 인도 중앙정부가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8월 5일 힌두 극우정당인 인도국민당(BJP)의 나렌드라 모디 정부는 잠무 카슈미르주의 자치권을 명시한 헌법 370조와 35A조항을 대통령령으로 하루 아침에 폐기했다. 인도 의회가 관련 법령을 승인하면서 카슈미르는 헌법이 보장하는 제한적 자치마저 상실하게 됐다. 자치권을 잃어버리기 전 카슈미르의 영주권 자격을 판단하는 주체는 현지 주민들이 직접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된 '주 의회'였지만, 이것마저 일찌감치 무력화됐다. 2018년 6월 잠무 카슈미르주 집권 여당 인민민주당(PDP)의 연립정부 파트너였던 BJP가 갑자기 연정을 탈퇴하면서 주정부는 공중분해됐다. 이후 인도 대통령이 임명하는 주지사 통치가 1년간 이어졌고, 의회 선거는 거듭 연기됐다. 주 의회가 사라진 카슈미르에선 이제 중앙정부의 일방적 공표가 '법'이나 다름 없다.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카슈미르에서 공무원직과 재산소유권 행사가 가능한 범위는 얼마나 확장될까. 일단 잠무 카슈미르 지역에 15년 이상 거주한 사람이면 누구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 지역에서 7년 넘게 학업을 수행한 이가 10학년이나 12학년 시험을 통과해도 가능하다. 인도 중앙정부의 공무원, 군인 등 타 지역 출신 공직자라도 카슈미르에서 10년 이상 근무했으면 재산 취득 등의 자격이 주어진다. 인도 현지 매체들은 이미 북부 비하르주의 행정처장(IASㆍ인도 중앙정부가 임명하는 지방행정공무원)이 카슈미르 영주권 자격을 획득했다고 전했다. 심지어 공직자ㆍ군인 2세들은 카슈미르 거주 기간에 관계 없이 재산소유권이 주어지고, 공무원도 될 수 있다. 반면, 원래 부모가 카슈미르에 살다 고향을 떠난 ‘디아스포라(Diasporaㆍ이산)’ 2세들은 영주권 취득 자격을 원천봉쇄 당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해외에 장기 체류한 팔레스타인들의 거주권을 박탈한 조치와 빼 닮았다. 하지만 가장 불합리한 부분은 카슈미르 현 주민들에게조차 개정안의 새로운 조건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카슈미르에 사는 ‘카슈미리’도 공무직에 응시하거나 부동산 매입 시 타지인처럼 영주권 심사를 거쳐야 한다. 지금도 카슈미르 주민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이 극심한데, 새 법이 시행되면 엉뚱한 이유로 불이익을 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 밖에 1947년 인도 대륙이 인도ㆍ파키스탄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서파키스탄(현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가 귀환을 원하는 이들도 이번 개정안에 따라 카슈미르 영주권과 재산권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이민 그룹 다수는 힌두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 역시 카슈미르 원주민들에게 불리한 내용이다. 당국은 영주권 신청 절차를 이른바 '패스트 트랙(신속처리 제도)'으로 처리할 계획이다. 인도 어디서나 신청이 가능하고 온라인으로도 할 수 있다. 신청 후 15일 이내 증명서가 발급되며, 이 기간 발급이 되지 않을 경우 담당 공무원은 5만루피(약 80만원)의 벌금을 물게 된다. 인도 당국이 카슈미르의 정착촌 식민화를 얼마나 서두르고 있는지, 조급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도 일간 타임스오브인디아는 5일 직전 일주일간 잠무 지역에서 5,900명, 카슈미르 지역에서 700명 등 총 6,600명이 개정안이 적용된 영주권을 발급 받았다고 보도했다. 영주권 발급 대상의 절대 다수는 은퇴한 ‘구르카’ 군인들로 전해졌다. 구르카군은 익히 알려진대로 네팔 출신 '용병'에 기원을 둔다. 영국이 인도대륙을 식민 통치하던 시절 용병으로 존재했다. 구르카 용병이 카슈미르에 유입되기 시작한 건 19세기 중반, 당시 통치자인 도그라 군주의 부대로 복무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후 인도가 독립할 때 영국은 구르카 10개 연대 중 7개를 인도에 넘기고 떠났다. 이들 부대는 지금까지도 '구르카 라슈트리아'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네팔계 인도인은 물론, 인도 북동부 출신 병사들 그리고 여전한 네팔 용병들까지 약 3만2,000명이 복무 중이다. 그 중 일부가 카슈미르에 주둔한 60만 인도 보안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올해 1월 1일 카슈미르 남부 라주리 지역에서 발생했던 무장반군과의 교전에서 전사한 인도군은 4년간 용병으로 일한 네팔 출신 구르카 병사로 알려졌다. 이런 사실들에 견줘볼 때 인도 정부의 정착촌 식민화 정책 의도는 명확하다. 군인들과 힌두 커뮤니티, 또 국가에 충성도가 높은 공무원 사회 및 2세 등을 정착민으로 적극 장려하겠다는 것이다. 거꾸로 카슈미르 지역의 터줏대감인 카슈미르 주들과 무슬림 커뮤니티는 대대로 전해 오던 삶의 질서가 통째로 흔들리는 위기에 처해 있다. 현재 잠무 카슈미르 지역에는 퇴역 구르카군 10만명이 거주 중이다. 이들은 그간 지방선거 투표권은 행사했지만, 국가가 제공한 제한적 거주지 이외의 다른 토지나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법 개정으로 모든 게 가능해졌다. 카슈미리 눈에서 보면 '인도 점령군' 복장을 한 구르카군 은퇴 세대가 정착촌 식민화의 첫 수혜 그룹이 된 셈이다. 한편, 잠무 카슈미르 주정부는 지난달 매년 이 맘 때 카슈미르 남부 아난트나그디스트릭트에 위치한 아마르나트 동굴을 찾는 힌두순례단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아마르나트 힌두성지 순례는 수십만 명의 순례단을 불러들이는 대규모 연례 종교행사다. 비록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여파로 당초 42일이었던 순례 기간을 15일로 축소하겠다고 했으나, 감염병 확산이 심각한 요즘 카슈미르 주민들에게는 순례단의 방문 소식이 달가울 리 없다. 엄청난 인파가 모이는 만큼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도 가능할지 의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카슈미르 주지사는 4일 모스크를 포함한 카슈미르 지역의 모든 종교시설과 모임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힌두순례단은 허용하고 타종교는 배척한 인도 당국의 방침은 형평성에 맞지 않고 코로나19 확산 방지 매뉴얼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길고양이의 현실부터 이상향까지 아우르는 작가, 이은규

고양이는 야생동물과 반려동물의 중간쯤, 그 어딘가에 존재한다. 때로 길들지 않는 야성을 보이면서도 마음 준 사람에겐 더없이 살가운 동물. 이은규(36)는 그렇듯 중간자적인 모습을 길고양이에게서 발견하고 그들의 초상을 그려낸다. 고양이, 삵, 호랑이…. 이은규가 그린 고양잇과 동물의 초상을 보며 윤두서가 떠올랐다. 올올이 흩날리는 수염 한가운데 빛나는 눈. 300년 전 화가의 눈빛이 여전히 형형한 건 초상화에 외형뿐 아니라 인격과 내면까지 그리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정신이 담겨서일 것이다.  학창 시절 윤두서의 자화상을 가장 좋아했다는 작가는, 조선 시대 초상화에서 ‘진(眞)’이란 개념에 매료됐다. 이는 ‘왜곡되지 않은 대상의 내, 외적 실체’를 뜻한다. 작가가 즐겨 그리는 대상은 인물에서 동물로 확장됐지만, 언제나 변하지 않는 건 ‘진짜 모습’에 대한 열망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서 눈에 영혼이 박제된 듯한 강렬함을 잊을 수 없었죠. 한국화에서는 외형만 베낀 그림은 겉핥기일 뿐 실체를 담지 못한다고 봐서, 임금 초상마저도 미화하는 걸 지양했죠. 우리 그림은 그렇듯 꾸밈이 없잖아요.” 학창 시절 그림을 통해 ‘참된 나’를 알아가는 작업에 매료된 작가는 인물화에 매진했다. 2013년 대학원 졸업 작품인 ‘인지적 초상’ 시리즈는 작가의 친엄마 이미지와 한국인이 지닌 보편적인 엄마 상을 겹겹이 겹치고 다시 분리해내는 작업이었다. 그것은 십대 시절 엄마와 떨어져 할머니 손에서 자란 작가가 트라우마에서 해방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림은 엄마의 초상 위에 겹겹이 새 그림을 덧그리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엄마에 대한 기억을 수없이 지우고 덧입힌 모녀 삼대의 초상을 그리는 과정은 미술치료와도 같았다.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 1년이 걸릴 만큼 작업은 지난했다. 언뜻 인물화와 무관해 보이는 고양이 민화도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를테면 고된 작업 중의 휴식 같은 역할을 한 게 고양이 그림이었던 셈이다.  작가의 집에는 세 고양이가 산다. 2013년 7월, 임보 끝에 입양한 고양이 남매 노랭이(애칭 노램)와 껌댕이(애칭 껌디), 막내로 합류한 흰둥이(애칭 흰디). 일찍 자취를 시작해 혼자 살다 보니, 친구들이 고양이를 구조하면 늘 그에게 임보(임시 보호)를 부탁해왔다. 수많은 고양이가 집을 거쳐 갔지만 입양이 안 된 고양이들도 있었다. 노랭이와 껌디가 그랬다 “한번은 두 마리가 한꺼번에 들어왔는데, 볼품이 없으니 입양이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못생긴 애들을 어쩌겠나, 내가 거둬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약간 교통사고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갑자기 자식이 생긴 거 같고.” 고양이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내 고양이가 생기니 길고양이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해서 고양시캣맘협의회에도 가입했다. 직장에 다니고 개인 작업도 하다 보니 캣맘 활동을 본격적으로 할 틈이 없어 주로 임보 봉사를 했다. 이 무렵 입양한 것이 막내 흰디다. “몇 마리가 임보로 왔다 갔는데 마지막에 온 애가 꼬맹이(흰디)였어요. 문 열자마자 제 발등에 솜뭉치가 딱 올라오는데 너무 똑똑하고 예쁜 거예요. 입양 보내려고 하기만 했음 잘 갔을 텐데, 제가 보내고 싶지 않았어요. 3주차 됐을 때 그냥 입양하겠다 했죠.”  다소 무거운 주제인 <인지적 초상> 연작과 달리, 반려묘와 함께한 생활을 녹여낸 초창기 고양이 그림은 위트가 넘친다. 전통 민화나 한국화 속에 고양이를 절묘하게 그려 넣어, 언뜻 보면 처음부터 그렇게 존재했던 그림 같다. <고랭모란도>(2014)는 액을 막아주는 호랑이 민화에 세 반려묘의 무늬를 그리고 모란도와 접목한 그림이다. 옛 민화 작가들이 호랑이를 직접 보기 힘드니 고양이를 보고 그렸다는 설에서 착안한 것이다. 또 다른 작품 <국정추묘 in Box>(2015)는 변상벽이 그린 <국정추묘> 원작과 뭐가 다른가 싶지만, 자세히 보면 고양이가 박스에 의뭉스레 앉아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어떤 놈이냐!>(2015)는 전통적인 책가도에 세 반려묘와 현대적인 고양이 용품들을 섞어 놓았다. 고양이 숨숨집과 스크래처, 캣 터널, 밥그릇과 어묵꼬치 등이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다. 책장은 캣타워가 됐고, 서책 표지는 고양이 발톱에 너덜너덜 찢겼다. 어느 녀석이 발로 찼는지 컵도 깨져 바닥에 나뒹구는 ‘혼돈의 도가니’지만, 고양이들은 시치미 뚝 떼고 자는 모습이 제목과 어우러져 유쾌하다. “<인지적 초상>으로 개인전 준비를 하면서 우울의 밑바닥을 파고들 때였어요. 하루는 우울해서 대성통곡하고 있는데, 고양이 똥 냄새가 나는 거예요. 치우려면 움직여야 하니 우울할 시간을 안 주는 거죠. 그때 제 삶을 놓지 않게 도와준 게 고양이였어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작가에겐 곁에 있는 세 고양이가 가장 큰 행복이었고, 현실에 단단히 발 딛고 서게 해 줄 버팀목이었다. 이 무렵 작가는 길고양이를 넘어 도시 동물들의 척박한 삶에 주목하게 되었다. “어떤 대상에 대해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인식이 바뀌잖아요. 동물들의 비참한 모습만 자극적으로 보여주거나, 반대로 너무 예쁜 모습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글 쓰는 친구랑 모임을 만들어 2015년부터 2016년에 걸쳐 프로젝트를 기획했어요. 여러 사회 문제 중에서도 친구는 오랜 봉사활동으로 소년 소녀 취약계층에 관심이 많았고, 저는 외할머니와 살아온 경험으로 독거 노인, 노인 빈곤 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 주제가 너무 방대해지니까 범위 좁혀 ‘도시 동물’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거죠.” 비록 이 프로젝트는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모임을 해산했지만, 도시 동물에 대한 관심은 야생동물 초상화 작업으로 이어졌다. 때마침 야생동물 조사 연구에 종사하고 있던 친오빠의 도움이 컸다. 2015년 오빠의 의뢰로 삵 초상화를 그릴 때였다. 오빠가 여러 자료사진을 제공해줬지만, 그걸 짜깁기해 그림을 그리긴 싫었다. 실존하는 특정한 삵 한 마리의 삶을 오롯이 담은 그림, 그들의 진짜 모습을 그림에서 끌어내 눈빛을 교환할 수 있을 때, 보는 이들도 삵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 믿었다.  결국 삵 초상화는 철원야생동물구조센터에 구조된 어느 삵의 사진을 보고 그렸다. 백과사전이나 박제된 삵 사진도 참고했지만, 이는 삵의 실제 수염이 몇 개인지 등 실제 이치나 섭리에 어긋나게 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가 그린 삵의 금빛 눈동자를 보노라면, 윤두서의 자화상을 볼 때의 전율이 느껴진다. 멸종위기동물 초상화 작업은 이후 담비와 호랑이 초상화 작업으로도 이어졌다. 호랑이의 눈빛을 마주보고 기억하기 위해, 동물원 사육사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어렵게 찾아가 보기도 했다. 나중에는 ‘동행숲(동물이행복한숲)’ 모임에 가입해 단체전도 수차례 참여했고, 작가이자 기획자로서 전시 및 강연 기획까지 도맡기도 했다. 무게감 있는 멸종위기동물 작업에 잠시 지쳐 쉬고 싶어질 때, 는 다시 고양이 그림으로 돌아왔다. 몇 년 사이 고양이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고양이를 예쁜 모습으로만 미화하는 경향이 불편했다. 막상 키워보면 힘들고 애환도 많은 게 반려동물인데,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만 보고 고양이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을까 염려됐다. 그런 생각에 잠겨 옛날에 그렸던 그림들을 보니, 스스로도 고양이의 예쁜 모습에 푹 빠져 있었던 게 아닌가. 때마침 세상을 떠난 고양이의 초상화를 의뢰받으면서 고양이의 삶 전체를 아우른 그림을 다시 그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분이 부모님을 위로해드리고 싶다면서, 세상에 없는 고양이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하셨어요. 그 고양이를 그리면서 밥 주면서 떠나보낸 길고양이들이 생각나서 <꿈> 연작을 그리게 됐죠. 원래 계절별로 네 점을 기획했는데 완성한 건 아직 두 장뿐이네요. 동백꽃을 그린 겨울 그림이 <꿈1>이고, 국화를 그린 가을 그림이 <꿈2>인데 동백에는 영원한 안식, 국화는 재생의 의미를 담았어요. 동백꽃 위에 누운 게 우리 집 애들이에요. 셋 다 사이좋기가 쉽지 않잖아요. 죽은 뒤에도 저랬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이제는 없는 고양이들이 그림 속에 되살아나는 경험, 혹은 언젠가 세상을 떠날 고양이들이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살게 하고 싶은 욕망. 작가는 최근 그리는 고양이 그림에 그 마음을 아낌없이 풀어내고 있다. 비단에 진채로 그린 <화서몽>(2018)이 대표작이다. 그림 속 고양이들은 마치 선계의 공간 같은 어딘가에 편히 쉬고 있다. 한가운데 돌아보는 흰디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그가 한때 밥을 주거나 인연을 맺었던, 이제는 세상에 없을 길고양이의 모습이다.  상서로운 구름과 폭포, 기암괴석이 가득한 공간은 아파트에 흔히 있는 베란다다. 베란다는 집과 바깥의 중간, 그 접경을 상징한다. 도심 속 고양이 역시 야생동물과 반려동물 사이에 존재하기에 이 공간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이 중간지대의 풍경을 통해 작가는 현실을 표방하면서도 비현실에 속한 영원불멸한 공간을 이야기한다.  “만약 이상향이 있다면, 세상에 없는 고양이들이 그곳에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고양이는 어디서나 똑같다는 마음을 담고 싶어서 살아있는 흰둥이도 같이 그려 넣었죠. 고양이의 이상향이 현실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도, 반대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라 생각해요.” 앞으로도 작가는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섣불리 ‘고양이 작가’라고 스스로를 칭하기보다, 그림으로 천천히 보여주고 싶다. 고양이 민화 중 가장 대중적인 유형은 고양이가 등장하는 조선시대 영모화(새와 동물을 소재로 그린 그림)를 패러디한 민화이지만 이 작가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해왔다. 멸종위기동물 초상화에서 집고양이와 길고양이가 모두 행복한 이상향 풍경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양이 그림이 어디까지 진화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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