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
심사 사흘 만에 뚝딱
초유의 ‘묻지마 이륙’

동남권 신공항의 입지를 부산 가덕도로 확정하는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제정안’(가덕도특별법)이 26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날 가덕도특별법은 재석 229명 중 찬성 181명으로 가결됐다. 반대는 33명, 기권이 15명이었다. 국토교통부ㆍ기획재정부ㆍ법무부 등 3개 부처가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와 28조원에 달하는 공사비 등을 들어 일제히 반대했지만, 여야의 압도적 지지 속에 국회 문턱을 넘었다. 이로써 동남권 신공항 입지를 둘러싼 논란은 ‘가덕도 신공항’으로 마침표를 찍게 됐다.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시로 논의가 시작된 지 16년 만이다. 4ㆍ7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둔 여야가 가덕도특별법을 처리하는 과정은 ‘졸속’, ‘날림’에 가까웠다. 특별법을 심사한 기간은 단 사흘에 그쳤고, 신공항 건설에 필요한 각종 사전 절차는 모조리 생략돼 ‘위법’ 논란을 불렀다. 또 사전에 신공항의 경제성을 따져볼 예타마저 필요한 경우 면제할 수 있게 하면서, 향후 선거 때마다 정치권이 선심성 개발사업을 특별법으로 우회할 수 있게 하는 ‘선례’를 남겼다. 정치권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4대강 사업”, "여야의 입법 농단"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날 본회의를 통과한 가덕도특별법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된 건 지난 3일. 이후 9일 공청회 및 17일, 19일 두 차례에 걸친 국토위 소위원회 논의를 거쳐 이날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수십조(兆)원의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대형 국책사업에 대한 심사가 3일 만에 끝난 셈이다. 19일 열린 소위에서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은 “다들 아시겠지만 부산시장 선거용으로 급조해 가지고 이렇게 처리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실제 소위 직후 열린 전체회의에서도 여야는 먼저 상정된 법안부터 처리하는 ‘선입선출’ 원칙을 무시하고 특별법을 의결했다. ‘적법절차의 원칙’ 또한 무시됐다. 공항은 여러 부지를 검토해 입지를 확정한 후, 건설에 필요한 행정절차를 간소화하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게 일반적이다. 인천국제공항 또한 영종도, 시화지구 등 2곳에 대한 타당성조사를 거쳐 1989년 영종도를 최종 부지로 확정하고, 1991년 ‘수도권신공항 건설 촉진법’ 제정에 따라 공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여야는 별도의 행정절차 없이 특별법에 신공항 입지를 가덕도로 못 박았다. 변창흠 국토부 장관도 “(특별법으로 입지를 정한 전례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김해공항을 확장하는 ‘김해신공항안(案)’과도 충돌했다. 이 사업은 예타를 통과, 2019년 국토개발 최상위 계획인 ‘제5차 국토종합계획’에 포함됐다. 이미 수십억원의 재정도 투입됐다. 지난해 11월 국무총리실 산하 검증위원회 또한 이 사업에 대해 ‘근본적 재검토’를 권고했을 뿐, 중단을 얘기하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토부가 절차상 문제가 있는 특별법에 찬성하면 형법상 ‘직무유기’에 해당될 수 있다. 국회 관계자는 “원래는 ‘김해신공항 중단→대체부지 선정→특별법’ 수순으로 가는 게 맞다”며 “그런데 김해신공항을 중단할 근거가 없자 여야가 절차상 논란을 무릅쓰고 특별법에 입지를 가덕도로 ‘알박기’ 했다”고 지적했다. 재정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예타 제도도 사실상 무력화됐다. 이는 재정이 300억원 이상 투입되는 도로ㆍ철도 등을 건설할 때 사업성을 따지는 제도다. 하지만 이번 가덕도특별법에는 신공항 건설을 위해 필요한 경우 예타를 면제하는 특례 조항이 담겼다. 2014년 국가재정법에 ‘국가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은 예타를 면제할 수 있다’는 조항이 신설된 후, 개별법에 면제를 규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예타 면제를 강하게 비판해온 민주당이 입장을 바꾼 것이다.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은 “이제 대구를 비롯해 다른 지역도 다 특별법으로 예타 면제하고 공항 만들자고 하면 막을 길이 없다”고 했다. 야권 관계자는 “그래도 ‘예타→사업성 없음→면제’를 거친 사업은 총사업비가 얼마나 들지, 왜 경제성이 부족한지 근거 자료라도 남는다”며 “법으로 예타 면제를 못 박는 건 최소한의 정치적 책임마저 회피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국토교통위 소속인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이날 본회의에서 특별법 표결 직전 반대토론을 신청해 여야를 비판했다. 그는 전날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 가덕도 신공항 예정지를 찾아 ‘가슴이 뛴다’고 말한 것을 거론하며,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이 나라가 나라답게 가고 있나,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비판했다. “문재인 정부의 4대강 사업”, “민주당이 주도하고 제1야당이 야합해 자행된 입법농단”이라고도 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도 이날 “공항 건설은 백년대계로 진행돼야 하는데, 절차도 기준도 명분도 없이, 오직 표 구걸만 있다”며 “‘문재인 정부표’ 매표 공항 특별법을 강력 반대한다”고 했다.

“일상으로 돌아갈 날 고대”
따끔, 희망 백신을 맞다

“하루빨리 집단 면역이 형성돼 어르신들이 가족들을 맘껏 면회하게 됐으면 좋겠어요.” 26일 오전 9시 서울 도봉구보건소 접종실에서 왼팔 어깨의 옷자락을 걷어냈던 김정옥(57) 노아재활요양원 원장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 대한 걱정보다 요양원 어르신들을 먼저 떠올렸다. 백신 접종을 앞두고 전날 잠을 설칠 정도로 긴장했지만, 요양원 입소자들이 하루빨리 가족을 대면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해온 터였다. 이날 도봉구보건소 첫 접종자가 된 김 원장은 “독감 백신처럼 약간의 울렁거림이 있었지만 15분쯤 지나니까 괜찮아졌다”며 “다른 분들도 나처럼 백신을 믿고 빨리 접종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 26일 전국에서 의사와 고령의 요양보호사, 젊은 간호사가 모두 팔을 걷어붙였다. 안전성 논란 탓에 긴장감이 돌기도 했지만, 이들은 ‘코로나 이전 일상으로의 복귀’를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기대와 긴장이 공존한 첫날 백신 접종은 특별한 사고 없이 순조롭게 이뤄졌다. 전 국민의 관심이 높다 보니 의료진은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특히 방역과 백신 보관에 집중했다. 접종자가 바뀔 때마다 의료진이 사용하던 고무장갑이 교체되고, 백신 용액은 영상 2~3도가 유지되는 파란 보관함에 담겼다. 의료진은 주사기에 백신을 옮기고, 접종 후에도 발열이나 부어오름 등 이상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이상반응 관찰실에서도 의료진들은 수시로 혈압과 맥박을 재며 접종자들의 신체 반응을 확인했다. 의료진은 접종자들에게 “발열 등이 사흘 넘게 지속되면 병원에 가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의료진은 안심해도 된다고 했지만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보훈요양원에서 가장 먼저 백신을 맞은 고숙(57) 원장은 "백신을 맞기 전엔 긴장했는데 맞고 나니까 다른 예방접종할 때와 비슷했다"며 "주삿바늘이 가볍게 들어가 넣는지도 모르게 접종이 끝났다"고 말했다. 전북 1호 접종자인 김정옥(50) 참사랑요양병원장(한의사)은 접종을 준비하는 의료진에게 오히려 “긴장되시죠?”라고 말을 건네며 안심시키기도 했다. 충남에선 홍성한국병원 남종환(50) 진료원장과 김미숙(63) 간호과장이 1호 접종자가 됐다. 특히 김 간호과장은 암을 극복 중인데도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적극적인 의료 활동을 펼치기 위해 팔을 걷었다. 김 과장은 “의료인으로서 첫 접종을 받음으로써 국민들 불안감이 조금이나마 해소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신과 모두의 건강을 위해 백신 접종을 당부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전남 첫 접종자인 여수 한국요양병원 김대용(45) 원장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건강을 위해 백신 접종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세종시 1호 접종자인 요양병원 간호사 이하현(24)씨도 “다른 분들도 안전하게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해서 올해는 꼭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부산 1호 접종자인 간호사 김순이(57)씨도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으니 당연히 백신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막상 맞고 나니 불안감이 해소됐다. 국민 모두가 맞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정보다 일찍 접종이 시작된 서울 노원구에선 ‘얼떨결에’ 전국 1호 접종자가 나왔다. 주인공은 서울 상계요양원 요양보호사로 근무하는 이경순(61)씨. 정부가 공식적으로 ‘1호 접종자’를 지정하지 않았으나, 이씨는 당초 백신접종 시작 시각인 9시보다 15분 앞선 8시45분쯤 노원구보건소에서 백신을 맞아 ‘비공식’ 1호 접종자로 추정된다. 이씨는 접종을 마친 후 “1년 동안 코로나19 때문에 불안했는데 이제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이씨가 1호 접종자가 된 이유는 노원구가 일찍 와서 대기하는 접종대상자를 배려했기 때문이다. 노원구 관계자는 “일찍 집을 나서거나 밤샘 근무를 마친 요양보호사 등이 8시 30분쯤부터 보건소에 오기 시작했다”며 “추운 날씨에 굳이 9시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어 15분 먼저 접종을 시작하면서 본의 아니게 1호 접종자가 나왔다”고 말했다. 금천구에선 1호 접종자가 바뀌었다. 첫 접종자로 선정됐던 16년차 요양보호사 류경덕(64)씨의 체온이 37.5도로 나와 접종을 뒤로 미뤘기 때문이다. 류씨는 “(집에서 측정했을 때는) 36.2도였는데 옷을 껴 입고 긴장했더니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사이 4년차 요양보호사인 신정숙씨(60)씨가 먼저 주사를 맞았다. 신씨는 “어른들을 돌봐야 하니까 당연히 맞아야 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일부 보건소에선 확진자가 발생해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경기 성남시 분당보건소는 직원 2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26일 하루 동안 폐쇄됐지만, 이날은 의료진이 상주하는 병원에서 접종이 이뤄져 접종에 차질을 빚지는 않았다. 보건소 접종도 3월부터 시작돼 큰 문제는 없다는 게 성남시의 설명이다. 3월 2~5일 요양시설 20곳의 종사자와 입소자 1,687명을 대상으로 접종이 예정된 전남 목포보건소 하당지소에서도 직원이 전날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전남도 역학조사반의 현장점검 결과 큰 문제가 없어 대체 인력을 투입해 예정대로 접종을 실시할 계획이다. 경북 포항에선 50대 여성이 접종 후 관찰실에서 대기하다가 두통 증상을 보여 병원으로 이송됐다. 다행히 접종에 따른 증상이 아닌 단순 두통이란 진단을 받았고, 추가 증상이 발견되지 않아 요양원으로 돌아갔다.

"장애인은 왜 가짜 정당을 만들었을까요"

"제가 오늘 '썰(이야기를 칭하는 용어)'을 풀고자 합니다. '탈시설장애인당' 왜 태어났니, 뭐 할거니 같은 이야기요. 클럽하우스 현장에서 물어봐주세요!" 변재원(28)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정책국장이 18일 페이스북에 이 같은 글을 올리자, 80명 가까운 인원이 클럽하우스 대화방으로 몰려들어 '정책 수다'에 참여했다. 22일 서울 종로구 노들장애인야학에서 만난 변 국장은 4·7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러 장애인 단체가 모여 '페이퍼(가짜) 정당'인 탈시설장애인당을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부동산과 재개발 등의 이슈에만 치중하는 제도권 후보들에 맞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서울시'를 만들기 위해 적극 목소리를 내겠다는 취지다. 이날 클럽하우스에 모인 사람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인플루언서'로 통하는 변 국장을 중심으로 장애인 정치참여 확대와 장애인 탈시설 문제 등을 논의했다. 변 국장의 페이스북 친구는 1,880여명, 시작한 지 10일 된 클럽하우스 팔로워는 500여명이다. 카카오는 16일 선정한 11인의 사회혁신가 중 변 국장을 소수자정책 연구자로 소개하기도 했다. 지난해 2월 전장연 정책국장에 올라 1년여간 단체의 방향성을 구상 중인 변 국장은 장애인 권리 투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오프라인 집회를 넘어 SNS로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과 소통하며 장애인들의 삶과 전장연 정책을 이해시키고 있다. 스스로를 '교차로에 있는 활동가'라고 정의해온 변 국장은 "1987년 운동권의 조직력·장악력에 개인주의적인 전달력·예민함을 함께 갖추고 싶다"며 "장애인은 소수자이기 때문에 다수를 어떻게 설득하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정체성이 곧 커리어'라고 말하는 변 국장의 이력은 독특하다. 변 국장은 생후 10개월 만에 의료사고로 척수공동증이 생겨 목발에 의지하고 있다. 변 국장은 예술경영을 전공해 예술가들의 경제적 여건을 고민하다가, 행정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구글 인턴을 할 시절엔 유튜버들의 마케팅을 도왔다. 지금은 공공 영역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공존을 꿈꾼다. 변 국장은 "중증 장애인들을 위한 공동체적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변 국장은 지난해 전장연 정책국장을 맡으며 처음 시민사회 운동에 발을 들였지만, 이전에도 SNS에서 다양한 문제제기를 하며 사회변화를 이끈 경험이 있다. 2014년 한 항공사가 탑승수속 중 변 국장에게 '제3자에게 손해를 끼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면책서약서를 작성토록 했을 때가 대표적이다. 변 국장이 SNS에 자신의 사연을 올려 사람들에게 물음을 던지자, 국가인권위원회는 2016년 항공사에 장애인에 대한 항공기 탑승 차별을 없애라고 권고했다. 변 국장의 최근 목표는 장애인들의 정치참여 활동 반경을 넓히는 것이다. 변 국장은 "장애인들이 스스로 사회적·정치적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정치참여를 통해 이런 편견을 없애고, 관련 활동을 SNS에서 지속적으로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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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살롱

28년 前 신 교수 성희롱·미투까지… 배울 기회는 충분했다

지난 1월에 정의당 김종철 대표의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인권 의식과 젠더 감수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남성조차 성폭력 가해자였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기사의 댓글과 SNS 글들을 살펴보던 나는 흥미로운 의견을 발견했다. ‘우리 같은 중년 남성들은 옛날 사람이어서 배울 기회가 없었다. 예전에는 다 그랬기에 친밀감을 표현하려다가 실수할 수도 있다. 여성들은 이 점을 고려해서 공격하지 말고 부드럽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라는. 그러고 보니 미투 운동 이후로 이런 말을 꽤 많이 들었다. 별일이다. 평소에는 ‘오빠라고 불러다오’를 외치던 중년 남성들이 왜 갑자기 못 배운 늙은이인 척할까? 이해되지 않는다. ‘배울 기회가 없었다’라니? 지금의 중년 남성들이 20~30대이던 1990년대에는 ‘서울대 신정휴 교수 사건’이 있었는데 말이다. 중년분들은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다들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 당시는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이라고 불렀기에 ‘신 교수 사건’이라고 하면 모를 수도 있겠다. 지금은 여성가족부와 한국기자협회가 만든 ‘성폭력·성희롱 사건보도 실천요강’에 의해서 ‘서울대 신정휴 교수 성희롱 사건’이라 부른다. 피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을 칭하면 피해자를 주목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2차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993년, 서울대 화학과 실습실에서 일하던 우 조교는 신 교수가 단둘이 있을 것을 여러 번 제안하고 상습적으로 신체 접촉을 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 후 재임용에 탈락하자 우조교는 8월 대자보를 붙여 신 교수의 성희롱 사실과 임용 탈락의 부당함을 고발한다. 처음부터 우 조교가 신 교수를 고소한 것은 아니다. 신 교수가 먼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자 우 조교가 맞고소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직장 내 성희롱을 문제 삼아 제기된 민사소송 사건이 시작된다. 10월, 우 조교는 신 교수와 서울대 총장, 국가를 상대로 서울민사지법에 5,000만원을 배상하라는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낸다. 서울대가 국립대였기에 국가에도 책임을 물은 것이다. 여성단체와 서울대의 여성문제 동아리, 대학원 학생회 등은 이 사건을 ‘직장 내 성희롱’으로 규정하고 공동대책 위원회를 소집하여 대처했다. 이때 피해자 측 공동 변론에 나선 변호사 중 한 사람이 고(故) 박원순 시장이다. 다음해인 1994년 4월, 1심 판결이 나왔다. 서울지법 민사합의18부는 “신 교수는 우씨에게 3,0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 대하여 사제 간의 정과 인간애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논평이 많았다. 판결 소식을 접한 남성들의 항의가 잇따랐다. 동료 여성들을 만지는 척 손을 뻗다가 “아이쿠, 무서워라. 이것도 삼천만원이냐?”라며 조롱하는 남성들도 있었다. 직장 여성들은 “이렇게 하면 나도 고소할 거냐?”라는 상사의 시험에 들었다. 사건의 본질과 상관없이 3,000만원에 흥분한 반응이었다. 신 교수는 항소했다. 1995년 7월,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 박용상)는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성희롱 개념을 도입하면 남녀관계를 적대적인 경계의 관계로만 인식하여 그 사이에서 일어난 무의식적인 또는 경미한 실수를 모두 법적 제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성희롱이 성폭력의 일종이라는 것을 일반 남성들은 물론이고 법관 남성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현실은 '한국여성민우회'가 1993년 11월 500여 명의 직장 여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87%가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는 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2년 반이 지난 1998년 2월, 대법원의 상고심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민사1부는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판결문에는 신 교수의 지위를 언급하며 이는 일상생활에서 허용되는 단순한 농담이나 호의적인 언행이 아니라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해 인격권을 침해하는 행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마침내 1999년 6월, 신 교수 사건의 파기환송심이 열렸다. 서울고법 민사18부는 ‘신 교수는 우 조교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일부 승소인 것은 성폭력 사건을 막을 책임이 있는 서울대학교 총장과 국가에 대한 피해보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해 당사자의 법적 책임은 분명히 하였으나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은 지우지 않은 부족한 판결이었다. 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6년 사이에 직장 내 성희롱을 비롯한 성폭력 범죄에 대한 문제 의식은 꾸준히 확산되었다. 1994년 ‘성폭력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직장 여성들의 상담이 쇄도하여 2,000여건이 넘는 성희롱 상담 사례들이 접수되었다. 1998년 2월에는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되었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의무화하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규정을 두도록 하는 등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을 명문화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다음해인 1999년 2월, 노동부는 남녀고용평등법에 성희롱 예방에 관한 내용을 법제화했다. 이렇게 성희롱을 제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들이 마련됨에 따라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직장 내 성희롱 문제는 개인 간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직장 내 위계관계에서 발생하는 고용상의 불이익과 차별의 문제, 더 넓게 봐서는 성차별의 문제라는 점을 점차 알게 되었다.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은 장장 6년간에 걸쳐 법정 공방이 이어졌기에 1990년대를 관통한 큰 사건이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도 신문 기사에서도 오랫동안 크게 다뤘기 때문에 아주 어린 아이가 아닌 이상,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사건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성희롱해 볼까? 성희,,, 롱다리군”이라는 개그가 유행할 정도였다. 참고로, 롱다리라고 말하면 칭찬이어서 성희롱이 아닌 것이 아니다. 여성을 같은 인간으로 안 보고 부위별로 뜯어 포장육 등급처럼 평가하는 그게 바로 성희롱이다. 30여년이 지났다. 신 교수 사건을 젊은 시절에 목격한 세대가 중년이 되었는데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저지르는 직장 상사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배울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30년 전과 똑같이 가해자를 두둔하는 말을 하는 중년 남성들이 많다. 겨우 어깨 정도 두드린 것으로 유난이다, 피해자가 아니라 꽃뱀이다, 여성 상위시대여서 남자들이 살기 힘들다 등등. 이상하지 않은가. 정말 여성 상위 시대여서 여성이 지목만 하면 남성이 억울하게 감옥에 간다면, 어떻게 이토록 많은 성폭력 사건이 여전히 발생할 수 있을까? 전에는 내 윗세대 남성들이 폭력적인 이유를 6·25 전쟁과 독재 등 폭력적인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가난 탓에 교육을 받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다. 고등교육을 받고 1993년 이후 ‘문민정부’ 시대를 살고 있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도 마찬가지인 것을 충분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성폭력을 하는 이유는 ‘해도 되니까, 할 수 있는 권력이 있으니까, 사회가 용인해 주니까’다. 이러한 성차별적인 사회 문화에 젖어 반백년 뇌맑게 살다 보면 누구나 위력을 행사하여 성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자, 87항쟁과 촛불 시위라는 두 번의 혁명을 이뤄낸 현재의 중년 남성들에게 기회가 왔다. 자신을 상대로 혁명을 할 기회가. 신 교수 사건에도 못 배운 중년 남성들을 위해 역사는 미투 운동이라는 배울 기회를 또 주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라지만 근거가 없으므로 패러디해도 불경스럽지 않을 것이다. 신 교수 사건과 미투 운동, 이 모든 한국 현대사를 목격하고도 배우지 못하고 잊었다면, ‘역사를 잊은 남성에게 미래는 없다.’ 참, 남성들은 잘 모르니 여성들이 부드러운 말로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요? 스스로 배우세요. 여성에게 설명을, 구원의 여인이 되기를 요구하지 마세요. 물은 셀프, 구원도 셀프.

정소영의 AI이야기

AI가 그린 그림을 예술의 영역으로 볼 수 있을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예술은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여겨졌다. 예술가는 자신이 느낀 다양한 감정을 작품에 담아내 타인이 공감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예술은 감정을 매개로 탄생된 창조물로 간주되고는 한다. 10여년전 SF영화 속 로봇을 보면 인간과 거의 유사한 지능을 가진 AI 로봇도 감정이 없는 기계로써 예술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기계는 감정이 없고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정이 없는 기계는 예술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다. 모방이 창조를 향해 다가가는 첫걸음이라고 한다면 인공지능은 이미 훌륭한 예술가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다. 2015년 ‘예술적 스타일의 신경 알고리즘(A neural algorithm of artistic style)’이란 논문에서 컴퓨터가 예술품을 그럴듯하게 모방한 것이 소개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 논문에는 풍경사진을 명화 스타일로 재탄생 시킨 결과물이 실려있는데, 마치 화가가 직접 그린 그림처럼 풍경사진을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스타일로 만들기도 하고, 뭉크의 ‘절규’와 같은 스타일로 만들기도 했다. 이 논문에서 사용한 알고리즘은 딥러닝을 이용한 스타일 변환 기술로 사진 속 물체의 전체적인 형태와 구조를 내용(content)으로 정의하고, 색감이나 질감 등을 형식(style)으로 정의해 사진영상에서 content와 style을 각각 따로 계산해낸 후 이 둘을 조합하는 방식의 알고리즘이다. 즉, 형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content 사진과 명화와 같은 특유의 style을 가진 사진만 있다면 이 두 사진의 content와 style을 각각 계산해 적절히 조합함으로써 명화스타일의 작품을 생성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는 딥러닝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CNN을 이용하여 주어진 영상의 content, style을 각각 학습하고 조합하는 정도로 작가의 화풍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을 이용하면서부터는 컴퓨터가 좀 더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게 된다. GAN은 영상을 생성하는 생성기와 진짜 영상과 가짜 영상을 판별하는 판별기로 구성돼 있는데, 이 두 네트워크가 서로 경쟁적으로 학습을 하며 새로운 영상을 생성해 내는 딥러닝 모델이다. GAN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예로 고흐 화풍의 그림을 GAN으로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GAN의 두 네트워크 중 생성기는 고흐 화풍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판별기는 생성기가 만들어낸 그림이 진짜 고흐의 그림인지 가짜 그림인지 판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마치 생성기는 고흐 그림을 위조하는 위조범이고 판별기는 고흐의 모조품을 가려내는 경찰이 되는 것과 같다. 판별기는 고흐 그림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기 위해 고흐의 진짜 그림과 생성기가 만든 가짜 그림을 번갈아 입력 받으며 학습하여 진위 여부를 판별해낸다. 이 때 생성기는 판별기를 속이기 위해 더욱 진짜 같은 가짜 그림을 만들게 된다. 생성기가 더 진짜같은 그림을 만들수록 판별기는 진위여부를 가리기 위해 더 엄격한 기준으로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하게 될 것이다. 이 두 생성기와 판별기는 서로 경쟁적으로 학습하며 종국에는 판별기를 속일 만큼 진짜 같은 고흐 그림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GAN을 이용하여 생성한 그림은 실재하는 고흐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흐 그림과 유사한 분포를 가지는 영상을 생성했기 때문에 고흐 그림의 스타일과 구조를 유사하게 가지고 있을 뿐 실제 존재하는 고흐의 그림과는 다른 그림을 생성해 낸다. 그렇다면 이걸 예술로 볼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에 이는 모방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만약 컴퓨터가 특정 화풍이 아닌 여러 화가의 화풍을 학습한 후 새롭게 해석해 전혀 본 적이 없는 스타일의 그림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예술의 한 영역으로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예술과 기술의 구분이 모호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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