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與, '똘똘한 한 채'
고가 1주택자에게
종부세 안 올린다

2020.07.09 14:26
더불어민주당과 정부가 오는 10일 발표할 22번째 부동산 대책과 관련, ‘똘똘한 한 채’를 보유한 고가(高價) 1주택자에 대해서는 종합부동산세 등 세금 부담을 강화하지 않기로 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9일 본보와 만나 “이번 부동산 대책의 핵심은 다주택자를 비롯한 투기 세력의 세 부담을 강화한다는 것”이라며 “1주택자에 대해선 현행 틀을 그대로 유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당초 당 안팎에서는 ‘똘똘한 한 채’에 대한 투기 수요를 감안해 1주택자에게 적용되는 종부세 최고세율을 현행 2.7%에서 3.0% 수준까지 인상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1주택까지 세 부담을 강화하면 조세 저항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에 현행 수준을 일단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대신 민주당은 다주택자와 단기 매매(1~2년) 세력에 대해서는 고강도 부동산 대책을 예고했다. 다주택자에 대한 종부세 최고세율을 현행 3.2%에서 최소 4%대 초중반까지 급격하게 끌어올리는 한편, 세율이 적용되는 과표 구간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실효세율까지 높일 방침이다. 또 보유 기간 2년 미만의 주택 단기매매에 대한 양도소득세 부담을 대폭 강화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정부는 지난해 발표한 12·16 대책에서 2021년부터 1년 미만 보유 주택에 대한 양도세율을 40%에서 50%로, 1년 이상∼2년 미만 보유 주택은 40%로 양도세율을 인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대책에서는 양도세율을 이보다 더 상향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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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생활치료센터 주저한 대구-정부
"확진자에 세월호 같았던 시간"

2020.07.09 11:30
정부는 ‘K방역’을 홍보하며 생활치료센터를 내세운다. 지난 2월과 3월 대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때 생활치료센터를 설치해 경증환자를 수용했기에 병원이 무너지지 않았다. 생활치료센터는 3월 2일 처음 문을 열었고 4월까지 16개가 운영돼 대구ㆍ경북 환자를 수용했다. 그러나 당시 대구에서 방역전략을 짜는 핵심 역할을 맡았던 이경수 영남대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성과와 함께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오점을 이야기했다. 의료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대구시와 보건복지부가 정치적 부담을 우려해 생활치료센터 도입을 주저하느라 귀중한 시간을 흘려 보냈고, 결국 입원하지 못하고 집에서 사망한 환자가 다수 나왔다는 반성이다. 최근 마주한 이 교수는 권영진 대구시장이 여러 차례 의료계의 생활치료센터 도입 건의를 거부했다고 처음으로 털어놨다. 복지부 역시 도입을 주저해 대책 발표 전날까지도 “대구시가 중앙에 요청하는 모양새를 만들어달라”고 전화해왔다고 밝혔다. ‘환자 또는 대구를 포기했다’는 비판을 우려해 대구시와 복지부가 생활치료센터 도입을 주저한 사실은 대구 의료계는 물론이고 복지부 실무자들에게서도 확인됐다. 이 교수는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정부는 평상시 의사결정 방식을 끝까지 유지하려 했다”면서 “중대한 결정은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질병관리본부장 수준이 아닌 최소한 국무총리실 수준의 컨트롤타워에서 내려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무원들의 노고가 컸지만 지금은 실수를 복기하며 미래를 대비할 때라는 이야기다. 대구의 교훈을 이 교수의 기억을 바탕으로 돌아봤다. 대구의 상황은 2월 18일부터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날 신천지 대구교회 유행을 확인한 계기였던 전국 31번 환자가 확진판정을 받은 이후, 대구교회 신도를 검사하는 과정에서 양성률이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다. 증상을 보고한 유증상자 1,286명을 검사했는데 양성률이 80%가 넘었다. 이어서 증상이 없다고 보고한 사람들을 검사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에 양성률이 74.4%가 나왔다. “소수점을 잘못 찍은 것 같아서 환자 데이터베이스(DB) 방으로 갔는데 정말 7.44%가 아니었어요. 시장실로 달려갔죠. 권영진 시장도 방금 소식을 들었다고 했어요. 초기에 최소 500병상은 필요하다고 예상했는데 그때 앞으로 환자가 최소 6,000명은 나타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병상이 없었다. 복지부는 병상을 전국에서 확보하겠다고 밝혔고 24일에는 전국에서 1만병상을 확보하겠다고 공식화했다. 그러나 대구시가 환자를 보낸다면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27일 오전에는 정세균 국무총리가 직접 각 지자체들에게 병상 협조를 당부할 정도였다. “정부는 국군대전병원 등에 전화해놨다고 구두로 전했지만 실제로 병원들에 전화해보면 A는 투석환자는 못 받는다, B는 위중 환자는 못 돌본다, C는 요양보호사가 없다 등 안 되는 이유가 100 중 95가지였어요. 정부가 병상을 준비했다고 전달하면 대구시는 없으니까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상황이 반복됐죠.” 중앙정부는 대구에 서류상 병상이 남아있는데 다른 지역으로 환자를 보내려는 현지 의료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공공병원인 대구의료원을  비우면 병상 00개가 확보된다는 식이었다. “실상을 보면 대구의료원에는 무연고 환자나, 임종을 앞둔 호스피스 환자들이 있었다는 말이죠. 신종 코로나 환자를 못 넣는 병상인데 중앙에서는 왜 환자를 안 넣느냐고 아주 난리를 쳤어요. 1급 감염병 환자를 그런 식으로 입원시키라니 아주 답답한 상황이었죠. 24, 25일까지는 이런 상황이 반복됐어요.” 당시 대구시청 10층에 차려진 대책본부에는 대구시의사회를 비롯해 지역 예방의학과 교수들이 모여 있었다. 의료진 사이에서는 21일쯤부터 병원 아닌 곳에도 환자를 수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됐다. 환자가 수천명이 발생한 상황에서 의료체계 마비를 피하려면 이송이 불가능한 중증환자가 아닌 경증환자는 병원 외부로 빼내야 했다. “피가 말랐어요. 박능후 복지부 장관이 1만병상이 있다고 하니까 권영진 시장은 철썩 같이 그 말을 믿고 있었는데 병상이 안 나오는 거죠. 권 시장은 화나서 10병상도 없냐 우리 환자 어디로 실어 나를지 대라, 병원을 말해라. 그런 식으로 상황이 진행됐어요.” 긴급상황에서 관료제는 단점과 장점을 함께 드러냈다. 이 교수는 “복지부와 대구시가 협조하지 않았다면 과한 말이고 서로 도왔기에 결국 생활치료센터도 도입됐다”면서도 “초기에는 분위기가 냉랭했다”라고 기억했다. “중앙에서 내려온 단장은 저녁까지 시장을 만나지 않고, 또 시장도 10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회의에 안 들어오기도 해서 의사들이 양쪽을 오가며 계속 이야기했죠. 그때 국무총리가 내려오니 일처리 속도가 확실히 빨라지더라고요. 이게 관료제구나 했습니다.” 대구 의료계는 23일부터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에 환자를 병원 외부에 수용해야 한다고 건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이야기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 이 교수를 비롯한 대구 의료계의 기억이다. 먼저 권영진 시장은 여러 차례 반대 입장을 밝혔다고 이 교수는 털어놨다. “시장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을 경험해서 감염병을 잘 알고 있었고, 상황을 직감은 했는데 정치인이라 말을 못했던 거 같아요. 23일부터 27일까지 여러 번 이야기할 때마다 중앙정부가 지침을 만들어서 해줘야지 어떻게 대구가 먼저 말하느냐는 반응이었어요. 중앙에서 병상을 확보했다고 밝힌 상황에서 시장이 병상을 확보 못해 환자를 병원 밖에서 돌보자고 한다? 먼저 이야기는 못하는 거죠.” 그사이 집에서 입원을 기다리다 사망한 환자가 나타났다. 방역당국이 집계한 입원 대기 중 사망자는 모두 5명이다. 확진판정을 받고도 병실을 구하지 못해 집에서 기다리던 환자는 한때 2,000여명이 넘었다. 대구 의료계는 외부 권위자에게 매달렸다. 청도대남병원을 시찰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국립중앙의료원장을 급히 데려와 시장 설득을 맡긴 것이다.  “25일쯤에는 경북대병원장, 대구시의사회장까지 함께 접견실에서 시장을 만났는데 시장은 그때도 ‘교수님 제게 그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 그렇게 반응하셨어요.” 이 교수에 따르면 대구시장 역시 생활치료센터와 유사한 형태의 어떤 시설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했고, 중국 우한에서의 대처법을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을 병원이 아닌 곳에서 돌볼 수는 없다'는 책임감과 압박이 컸기에 생활치료센터 센터와 유사한 시설을 도입해야한다는 결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는 것이 대구시 의료계의 이야기다. 중앙정부 역시 환자를 병원 외부에 수용하자고 말하기를 꺼렸다. 복지부 국장급 관계자는 “앞서 대구봉쇄라는 논란이 일어난 상황에서 생활치료센터를 도입한다고 발표했다가 또 논란이 일어날까 우려가 컸다”라고 털어놨다. 당시 현장에서 근무한 복지부 관계자는 이 교수를 ‘숨은 영웅’이라고 불렀다. 의료계가 조정자 역할을 맡지 않았다면 생활치료센터 도입이 더욱 더뎠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교수는 생활치료센터 도입이 거의 확실시된 2월 29일 오전 복지부 국장급 관계자들로부터 연락을 여러 통 받았다고 털어놨다. “여럿이 전화와 문자를 해왔어요. 대구시장이 기자설명회를 열어서 중앙정부에 생활치료센터 도입을 요청하는 모양새를 만들어 달라는 이야기였죠. 좋게 말하면 현장 목소리에 정부가 나섰다는 식으로 하자는 건데. 질병관리본부와 중수본이 지침을 고치면 될 문제를 대구가 운을 띄워달라니 묘하잖아요.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가 대단히 컸죠.” 대구시 내부에서도 막판까지 잡음이 있었다. 간부들 사이에서 중앙이 먼저 지침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가 또 나온 것이다. 28일 밤에는 이 교수와 몇몇 관계자들이 항의 차원에서 10층에서 철수하기도 했다. “중앙이고, 지방이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이렇게 판단하느냐 소리지르고 나왔죠. 지금도 중앙과 지방이 그 3일을 주저했다고 생각해요.” 2월 27일 돌파구가 열렸다. 이날 오전 이 교수는 이진석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이 실장은 의사다. “이 실장이 있기에 운이 좋았죠. 직접 내려와야 하느냐고 묻길래 2시간이라도 보고 가시라 답했습니다. 오후 4시에 동대구역에 도착한 실장과 함께 시장을 찾아갔죠. 실장이 제3의 시설이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시면 안심할 거 같았는데 그때도 시장은 선뜻 말하지 못하더라고요. 실장이 제게 다음날 세종시에서 중수본(복지부) 회의가 열리니 같이 가서 현장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28일 중수본 회의부터 생활치료센터 도입은 속도가 붙는다. “주말이 지나면 장관님이 책임을 지고 싶어도 아무도 못 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집에서 사망한 환자가 나왔고, 전체 사망자가 10명 가까이 늘었으니 주말이 지나면 줄초상이 날 거 같다. 집에서 기다리라는 말이 환자들에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냐고 물었습니다. 거대한 세월호라고 생각했어요.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상황 판단이 돼 있었던 거 같지만 다른 사람들은 체감을 못했죠. 대구로 돌아가야 한다고 일찍 회의를 나왔어요. 기차를 타기 직전에 이 실장에게 ‘격리’나 ‘시설’이란 단어는 뺐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작명은 중앙정부가 했습니다. ‘생활치료센터’라고 이름을 듣고 ‘잘 지었네’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3월 1일 대구시와 정부는 2시간 간격으로 정부부터 생활치료센터 도입을 발표한다. 시장 요청으로 방지환 중앙감염병병원운영센터장을 비롯해 경북대병원장, 대구시의사회장 등 의료계 인사가 대구시 발표에 함께했다. 민복기 대구시의사회 부회장은 “공무원들로서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어쨌거나 책임을 누가 지느냐에 대한 부담감을 피하기 어려웠다”면서 “환자를 병원이 아닌 곳에서 돌봐야 하는 법적 근거도, 전례도 없는 상황이었고 내가 시장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지방과 중앙정부의 부담을 돌아봤다. 무엇보다 생활치료센터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 역시 부담이었다. 신종 코로나 임상자료가 쌓인 최근에는 경증환자 대다수는 별다른 의학적 치료가 필요 없으므로 집에서 돌보자는 주장까지 의료계에서 나오지만 2, 3월에는 상황이 달랐다. 대구와 같은 수준의 유행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이 교수는 전망한다. 전국적으로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이 생활화된 데다 신규 환자가 급증하는 순간부터 국민 스스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력하게 실천하는 모습이 대구에서 먼저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유행이 발생한다면 수도권에서는 대처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대구 의료계에는 많다. 대구시처럼 중앙정부와 손발을 맞추면서 때마다 전략을 신속하게 바꾸는 경험이 수도권 지자체에는 없을 것이라는 우려다. 환자가 대규모로 발생했을 때 어느 병원으로 환자를 보낼지 시나리오를 미리 짜놔야 한다는 의견이다. 대구의 유행은 신천지라는 연결고리가 있었기에 환자 추적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이상호 대구시의사회 총무이사는 “유행 초기에는 대구시 공무원, 중앙부처 공무원 따로 따로 일을 했다”고 기억했다. 이 교수는 “감염병은 사회적 재난입니다. 인간이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요. 유행이 시작됐을 때 중앙정부-의료계-지자체의 네트워크가 빠르고 강력하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대응이 어렵습니다. 공무원들은 평상시 의사결정 구조를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도 상황을 힘들게 만듭니다. 아침 10시 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이 오후 6시까지 결정이 되지 않아요. 계장-차장-과장 이런 보고라인을 거치는 데만 종일 시간이 걸리죠. 유연한 의사결정과 환자 규모별 대응 시나리오가 필요합니다”라고 돌아봤다. 민 부회장처럼 함께 노력한 상황에서 누구 하나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이 교수는 실수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중수본과 대구시가 ‘밀당’하는 상황이었죠. 그때 메모를 펼치면 ‘감염병의 정치학’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됐구나, 이게 정치구나 그렇게 적어놨죠.” 실제로 복지부 실무자들도 첫 생활치료센터 개소 준비는 불과 하루 만에 이뤄지면서 현장에선 혼란이 컸다고 털어놨다. 3월 2일 첫 센터가 문을 열었는데 환자들이 구급차를 타고 줄줄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누가 환자를 방으로 이끌지조차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복지부 공무원이 나섰고 그제야 환자들은 차에서 내렸다. 환자를 태운 구급차들이 줄지어 대기하는 장면이 언론을 통해 군사작전처럼 보도됐지만 실상은 환자들이 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복지부와 대구 의료계 관계자들은 회상했다. 결국 앞으로도 생활치료센터 도입처럼 중대한 결정은 확실한 컨트롤타워, 고위층에서 결단을 내려줘야 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의견이다. 애초에 권영진 시장이나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수준에서는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주장이다. “돌아보면 각자 조금씩 준비는 했지만 지자체장이나 본부장, 복지부 국실장 정도가 ‘하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죠. 누가 ‘독박’을 쓸 수 있겠습니까. 의료계는 민간인이니까 조언이 가능했죠. 중앙재난대책본부나 국무총리실 직속으로 전문가 집단을 두던지 해서 고위층에서 결단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결정은 쉽지 않을 겁니다.”

"빨갱이 자식" 소리
천륜도 끊어놓은
한국전쟁의 충격

2020.07.09 11:16
백발의 아들은 70년이 지나서야 아버지란 말을 어렵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다. 그에게 아버지는 평생의 금기어였다. 빨갱이 자식이란 소리를 듣는 게 총성보다 더 두렵고 아팠기 때문일 거다. 어느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족의 얘기다. 한국전쟁의 총성은 멎었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천륜을 끊어놓을 만큼 고통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한국전쟁은 국가가 사회에 가한 테러였어요. 남북한 공히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권헌익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는 한국전쟁을 기본적으로 ‘내전’으로 규정한다. 그동안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국 간의 세력 갈등에서 기원한 냉전이라는 틀에서 주로 논의돼 왔지만, 냉전은 ‘전쟁 없는 전쟁’ 아닌가. 한국전쟁은 시작부터 어긋났고, 세계사적으로도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인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관점이 필요했다. 베트남전 연구로 세계 인류학계에서 독보적 위치에 오른 그가 한국전쟁을 새롭게 파고든 건 그 때문이다.   ‘전쟁과 가족(After the Korean War: An Intimate History)’은 권 교수가 10년 공들인 연구의 결실이다. 책은 국가의 전쟁 폭력이 가족 또는 친족이라는 ‘친밀한’ 영역을 어떻게 파괴하고 통제해왔는지를 기존 서구 인문사회과학 이론을 통박하며 들여다본다. 근대정치에서 주체는 개인이고, 시민이다. 가족은 사적인 관계로 치부한다. "기존의 서구의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정치와 국가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국전쟁 전후의 가족과, 친족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더라고요." 책은 가족과 친족 관계의 공적 영역 진출을 시도하며 기존 서구 이론에 맞선다.   폭력의 책임은 남북한 모두 자유로울 수 없다. 전쟁은 북한이 일으켰다. 하지만 사회를 향해 총구를 먼저 돌린 건 남한이었다고 권 교수는 말했다. 전쟁이 국제분쟁으로 전환되기 이전, 남한 정부는 공산군에게 협조할 위험이 있는 인물들을 예방조치란 명분으로 대거 몰살했다. 전선이 바뀌고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폭력의 물결은 번갈아 덮쳤다. 그때마다 점령자는 적과 공모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인공기를 태극기로 바꿔 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가족과 친척, 친구, 동료, 이웃을 망라하는 그의 관계적 세계 전체와 관련된 질문이었다.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사는 극단적인 내전의 제로섬 논리만 남겼다. 역사학자 김성칠이 적은 대로 “이 땅의 백성질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무수한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남으로 혹은 북으로 이동했고, 이산가족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전쟁 전후로 국가는 연좌제를 통해 폭력을 제도화했다. 적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의심되는 자의 가족은 헤어진 가족과의 결합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 때문에 죄인 취급을 받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살수 밖에 없었다. 권 교수는 “연좌제는 서로 보살피고 연대하는 인간의 기초적인 가족관계를 국가는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했다”고 꼬집었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남한에서 연좌제가 사라졌다 해도 그건 명목상이다. 책은 균열과 갈등을 극복할 방법을 제주에서 찾는다. 제주 서쪽 애월의 하귀리엔 4ㆍ3 사건 당시 희생된 마을 사람들에게 바치는 위령비와 함께 폭력을 자행한 경찰과 반공청년단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도 서 있다. 가해자 입장, 피해자 입장만 강조하면 상대를 종속시킬 수 밖에 없다. 제주는 그러지 않고, 모두를 희생자로 인정했다는 게 달랐다. 산 자는 정치적 두려움과 분노를 억누르며 죽은 자를 애도했다. 이를 통해 죽은 자는 친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위험 없이 친족세계에 귀속되고 기억될 수 있었다. 추천사를 쓴 김성보 연세대 국학연구원장은 "죽은 자의 존엄이 회복될 때 산 자의 존엄도 회복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고 적었다.  극단의 불신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살리려고 애를 쓰고 실천하는 사례는 전쟁 기간에도 있었다. 경북 안동의 인접한 두 마을. 전쟁의 혼돈 속에서 서로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청년들을 향해, 한 어른은 이렇게 꾸짖었다. “느그 할머니들이 이 마을 분들이고 느그 고모들이 이 마을로 시집을 왔다 아이가. 다 그 피가 섞여 있다. 왜 느그 할애비 누이 집에 와서 무식한 짓거리들 한단 말이냐.” ‘피가 섞였다’는 건, 우리 모두가 연결돼 있다는 상징적 표현이었다. 우리는 70년 간 한국전쟁 중 가족과 친족이 겪었던 관계적 고난에 대해 잊어왔다. 후손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전쟁세대는 속으로 아픔을 삼켰고, 후손들은 망각을 자연스러워 했다. 권 교수는 “우리 내부에서 이념갈등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건 복잡하게 얽힌 관계적 자아를 끊어냈기 때문”이라며 “관계적 자아를 복원하면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가족과 친족이 경험한 전쟁의 기억을 사적 영역에 가두지 말고, 공적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냉전을 극복하기 위해선 우리 안의 냉전부터 제대로 대면해야 합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물론 핵문제 해결도 중요하지만 그 문제는 당장 우리가 어찌할 도리가 없잖아요. 그보다는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걸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기억을 전진시켜 나가는 것도 평화를 만드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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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서 1000만원 썩는 기분"
동학개미, 뭉칫돈 주식에 '올인'

"통장에서 1,000만원이 썩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직장인 김보라(34)씨는 2년 가까이 매달 50만원씩 넣던 적금을 최근 해지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지난달 말 이 돈을 모두 주식계좌로 옮겨 코스피 두 종목과 코스닥 한 종목을 샀다. 현재까지  수익률은 5% 남짓. 4개월 남았던 적금 만기를  채울 경우 김씨가 받게 될 이자(연이율 1.1% 적용 시 약 14만원)를 뛰어 넘는 수익이다. 김씨는 "돈을 그만 모으고(적금) 이제는  좀 벌고(주식) 싶다"고 말했다.  올해 김씨처럼 주식을 시작한, 넓게는 '동학개미'로도 불리는 개인투자자가 정말 많아졌다. 8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6일 기준 개인의 주식거래 활동계좌 수는 약 3,212만개에 이른다. 올해 들어서만  276만개나 늘었다. 이는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5월 기준 2,821만명)까지 훌쩍 뛰어넘는 숫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세계 증시가 곤두박질 칠 때도 동학개미들은 주식시장으로 돌진했다. 주가는 결국 오른다는 믿음을 실탄 삼아, '대박 실현'이란 단순하지만 명확한 목표 의식으로 무장한 채였다.  코로나 쇼크로 증시가 요동치는 사이 동학개미들은 그야말로 '역대급' 주식 투자 광풍을 일으켰다. 올해 3월 개인투자자의 코스피 시장 순매수(매수-매도) 금액은 11조1,869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상반기 동학개미가 사들인 주식만 32조원어치다. 이달에도 개인들은 5,000억원 이상을 순매수 중이다. 지난 4월 종잣돈 2,000만원으로 주식을 시작한 직장인 한모(28)씨는 "올해 들어 회사 동료들과 주식 얘기를 하지 않은 날이 손에 꼽힌다"고 했다.  개미들을 주식에 빠지게 한 건, 초저금리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마이너스인 초저금리(현재 기준금리 0.5%) 장기화에 은행에서 돈이 빠져나와 주식시장으로 몰렸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실제 5대 시중은행(KB국민ㆍ신한 ㆍ우리ㆍ하나ㆍNH농협)의 정기 예ㆍ적금 잔액(6월말 672조원)은 올 들어  14조원 가까이 줄었다. 반면 증시 대기자금으로 불리는 투자자예탁금은 올해 1월 초 30조원에서 지난달 말 사상 첫 50조원을 돌파했다. 한 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는 "집 살 돈은 없고 예적금은 손해보는 느낌에서, 서민이 자산을 늘릴 방법은 주식 뿐이란 심리가 작동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큰 금액의 재테크와는 거리가 있다고 여겨진 2030 청년 세대가 주식에 빠지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20~30대의 주식계좌 수는 1년 전보다 50% 이상 늘었다.    한국 사회에서 재산 증식의 제1 수단은 여전히 부동산이다. 하지만 집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데다 정부의 강력한 규제까지 더해진 상황에서 당분간 부동산 시장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란 판단에 주식시장 문을 두드리는 젊은 층이 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공모주 청약에서 무려 31조원을 끌어들여 대박을 터뜨린  SK바이오팜에도 청년 개미 유입이 두드러졌다.  청약에 참여한 계좌의 절반 이상은 30, 40대 투자자들이었다. 직장인 조윤임(33)씨는 "모아둔 돈으로는 엄두조차 못 내는 부동산에 기웃대느니 꾸준히 종잣돈을 늘려 주식으로 재미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해외 언론도 동학개미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세계적으로 시장 변동성이 커지고 소셜 미디어 발달로 개인투자자가 늘어난 가운데 한국이 그 중심지가 됐다"고 보도했다. WSJ는 "한국의 1인당 주식 계좌 수(0.61개)는 미국(0.31개)의 2배에 달한다"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자 20, 30대 개인이 직접 투자에 나섰다"고 소개했다.  동학개미의  주식 열풍에 힘입어 코스피는 이제 코로나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하지만 일부의  '무모하고 무리한 투자'에 대한 경고도 만만치 않다.     코스피가 1,400선까지 추락했던 지난 3월만 해도 개미들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소위 우량주 위주의 안전한 쇼핑을 즐겼다. 하지만 이들 종목들의 주가 상승률이 4월 들어 주춤하자 개미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루에도 수십 %씩 오르내리던 원유 상품이나 특정 지수를 추종하는 인버스가 투자자를 끌어 모았다. 실제 지난 4월 개인 투자자가 가장 많이 순매수한 종목 1, 2위에 '코덱스 WTI 원유선물', '코덱스 200선물 인버스 2X' 가 이름을 올렸다. '한 방'을 노린 '도박 개미'들의 등장에 코로나19 이후 사실상 문을 닫은 카지노와 스포츠 도박에 몰릴 돈이 주식시장의 고위험 상품으로 쏠렸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빚을 낸 투자(빚투)'에 대한 우려도 여전하다. 지난 6일 기준 개인이 증권사로부터 돈을 빌려 주식을 산 금액(신용거래융자금)은 12조6,000억원에 달한다. 올해 초(9조원대)에 비해 3조원 이상 늘었다. 주가가 추세적으로 상승할 것이란 기대가 반영된 이 투자행위에 대한 경고 목소리는 크다. 김민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신용융자를 통한 주식 매수는 주가 하락 시 더 큰 손실을 볼 수 있어 현금 거래에 비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되돌아보는 6.25 수수께끼

200km 헛걸음…
인민군, 알 수 없는 'ㄷ자 행군'

인민군이 남진을 주춤거린 곳은 서울만이 아니었다. 거리상으로 부산이 제일 가까운 동해안 축선에서도 그랬다. 강릉점령 후 직진하지 않고 대관령 길로 접어든 것이다. 미리 상륙해 대기하던 특수부대를 앞세우고 남진하는 것이 상식일 텐데,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당시 강릉은 삼팔선에서 지척이었다. 강릉에서 가자면 유명 관광지 하조대(河趙臺) 못 미쳐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 마을이 삼팔선으로 갈렸다. 강릉시 주문진읍에서 10여㎞거리다. 동해안 지역도 여느 전선과 다르지 않았다. 우선 병력면에서 1대 2.5 비율이었다. 인민군 제5사단과 제1경비여단의 맞상대는 국군 제8사단(사단장 이성가 대령)뿐이었다. 그나마 8사단은 편제상 2개 연대(제10연대, 제21연대) 밖에 없는 감편사단이었다. 21연대는 강릉 남쪽 삼척에 주둔해 있었는데, 25일 새벽 3시 강릉 정동진·옥계 해변에 인민군 특수부대 상륙으로 국도7호선이 차단되었다. 거기다 6월 초 오대산 지역에 침투한 공비토벌에 차출된 2개 대대가 복귀하기 전이어서 가용병력은 4개 대대뿐이었다.  8사단 방어정면은 26㎞나 되었다. 그 산악구간을 소수 병력으로 방어하려니, 소대 분대 단위로 경계진지를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25일 새벽 엄청난 적 포화에 압도당해 초소마다 대혼란이 벌어졌다. 적 주력은 동해안 국도7호선으로 밀고 내려왔다. 그리고 정동진 해변에 미리 상륙한 적이 밑에서 강릉으로 치받아 올라오고 있었다. 강릉비행장에 주둔했던 8사단은 오전 6시 긴급작전회의를 열었다. 10연대가 적의 남진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삼척주둔 21연대를 불러올리고, 육군본부에 1개 여단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되었다. 강릉으로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은 21연대는 국도가 막혀 영서지역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육군본부에서는 “사단장 재량으로 최선을 다해 저지하라. 서울방어가 긴급하여 증원은 불가”라는 통보가 왔다. 그리고 곧 통신이 끊겨 더 이상 소통이 불가능했다. 절망적인 통보에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오전 10시 작전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군수품을 대관령 너머 평창군 진부로 소개시키도록 지시했다. 장병들에게 6개월분 봉급과 식량을 지급하고, 주민의 피란도 돕도록 조치했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 사단포병대의 분전으로 많은 시간을 벌어 안전철수가 가능했다. 8사단 제1포병대장 장경석(張庚石·예비역 준장)소령 회고록 '100년을 살면서'에 따르면, 강릉북방 연곡천 저항선에서 포병이 만27시간을 벌어 안전철수가 가능했다.  정동진에서 북상하던 인민군 유격대도 포병대의 저항에 부딪쳐 주춤거렸다. 사단병력과 보급품, 그리고 시민들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포병대가 남북 양쪽에서 적의 강릉접근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 탱크가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포병대의 결사항전에 놀란 적은 26일을 주문진에서 숙영하고, 27일 새벽 4시부터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어렵게 확보한 121고지가 함락되자 사단장은 철수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포병대는 결사항전을 결의, 목숨을 내놓고 공산도배들 응징에 나섰다. 전원이 서북청년단 출신인 대원들은 인식표를 모아 사천국민학교 운동장에 묻고 항전했다. 그러는 사이 인민군 기습조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 백병전에서 소대장 김용운 소위의 분전은 눈부셨다. 그는 신의주학생사건 때 주동그룹으로 활약한 경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소총은 물론이고, 맞싸우기에 좋은 야전삽 곡괭이 몽둥이 돌 등을 모두 동원한 싸움이었다. 김 소위가 머리에 부상을 입어가면서 소대원들을 지휘해 분전한 덕분에, 포를 한 문도 버리지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탄약관 이석권 상사의 활약도 컸다. 탄약이 떨어지자 그는 사단본부로 달려가 대뜸 사단장에게 탄약수송차 배정을 요구했다. 그 당돌한 태도에 사단참모들이 발끈했다. 그것을 사단장이 다독여 탄약수송이 가능했기에 포병대가 제몫을 할 수 있었다.  참모들은 이 상사가 계통을 밟지 않고 사단장을 만난 것을 문제 삼았다. 즉결처분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는 사단장실을 나서자마자 헌병에게 체포됐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였다. “포탄이 바닥났습니다. 우리가 공격하는 장면만 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사단장은 그 충직성을 높이 사 참모들을 설득한 것이다. 삼척에서 백두대간을 넘은 21연대가 영서지방으로 우회해 대관령에 도달할 즈음, 8사단과 춘천 6사단이 어렵게 통신에 성공했다. “8사단은 빨리 원주로 이동하라”는 육군본부의 엉뚱한 명령이 그렇게 전달되었다. 아마도 적의 중앙축선 남진속도를 늦추는 지연작전이 급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성가 대령은 부대를 인솔하여 대관령 넘어 원주로 가다가, 적이 벌써 원주 교외 횡성에 들어온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더 남쪽인 충북 제천으로 방향을 틀었다. 텅 빈 강릉을 점령한 적은 이상한 기동을 시작했다. 진격방향을 서쪽으로 바꾸어 대관령 길로 들어섰다. 8사단 뒤를 추격하는 모양새였다. 8사단이 제천에서 열차 편으로 대구를 거쳐 중앙축선 지연전에 가담하는 사이, 대관령을 넘은 적은 평창 정선 영월 등 영서산악지방을 헤매다가, 경북 봉화를 거쳐 울진 해안선으로 다시 나왔다. 이해할 수 없는 ㄷ자 행군이었다. 6월 28일부터 7월 5일까지 일주일 넘게 무려 200㎞를 헛걸음친 것이다. 그 사이 간헐적인 전투와 미 공군기 공습으로 전력도 크게 소모되었다. 그러는 동안 동해안 7번 국도는 무주공산 상태였다. 이 사실에 대해 북한의 공간사(公刊史)에 아무 언급이 없어 까닭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우리 측의 추측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600여명으로 구성된 특수부대의 부산상륙을 전제로, 내륙전선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이다. 또 하나는 미군함정의 포격을 피해 산악으로 숨어들었을 가능성이다. 인민군5사단 제945육전대(해병대)와 제766유격대가 강릉 정동진과 삼척 임원에 상륙해 강릉 남쪽지역을 점령한 날(25일) 저녁, 적 수송선 한 척이 부산상륙을 목표로 울산 앞바다를 항진하고 있었다. 강릉 삼척 상황을 보고 받은 해군전함 백두산호가 진해기지를 떠나 동해로 항진 중 이를 발견했다. “우측 공해상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남쪽으로 가는 이상한 배가 있습니다.” 견시(見視)수병의 보고를 받은 갑판장 최영섭(崔英燮·해사1기)소위는 즉시 배를 검문하자고 함장 최용남(崔勇男)중령에게 건의했다.  “저렇게 큰 어선은 있을 수 없고, 화물선도 아닙니다. 수상하니 검문해야 합니다.” 통쾌한 6·25 첫 승전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검문에 불응하는 배에 포격을 가하자 응전의 포탄이 날아왔다. 그러나 전함과 병력수송선의 싸움은 싱거웠다. 600여명의 특수부대원을 태운 적 수송선은 대한해협 깊은 바다에 수장되었다. 부산 가는 수송선은 이렇게 격침되었지만, 강릉 삼척에서는 적선이 들어와 상륙하도록 아무도 몰랐다. 25일 새벽 강릉시 정동진리 등명마을과 옥계면 금진리 해변에 상륙한 병력은 1,800명이었다. 해안에 선단을 댄 인민군들이 주민을 동원해 보급품을 양륙 이동시키느라고 시끌벅적하도록 군경은 까맣게 몰랐다.  새벽 3시 주민 한 사람이 옥계지서에 달려와 신고한 뒤에야 난리법석이 났다. 상륙을 끝낸 인민군 부대는 새벽 5시 옥계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인원파악을 끝내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경찰의 연락을 받은 해군 묵호경비부가 취한 첫 조치는 사복차림의 정보원 13명을 파견해 적의 동정을 살핀 것뿐이었다. 삼팔선 상황이 급했던 강릉 8사단은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국도7호선을 비워둘 수 없었던 육군본부는 진주 주둔 3사단 23연대를 불러올려 영덕에 저항선을 쳤다. 적은 울진에 병력을 집결시켜 영덕-포항-부산 직진을 노렸지만 실기하고 말았다. 미 해군순양함 유노(Juneau)의 함포사격 지원에, 미 공군기 지원까지 받은 23연대의 분전으로 동해안 축선은 2주일 이상 저지되었다. 미군함정 포격을 피해 산악으로 숨었을 것이라는 설의 근거가 이것이다. 동해에 급파된 미군함대는 7월 1일부터 해안선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해안은 개활지 폭이 좁아 해상포격에 치명적인 지형이다.   문창재 칼럼니스트(전 한국일보 논설실장) 필자는 2004년 한국일보 논설실장으로 퇴직한 후 내일신문 객원논설위원을 거쳐 올해 3월까지 논설고문으로 일했다. 저서에 '정유재란 격전지에 서다' '증언(바다만 아는 6.25 전쟁비화)' '나는 전범이 아니다' 등 10여권이 있다.  <글 싣는 순서>(1) 되돌아보는 6·25 전쟁 수수께끼 (2) 해주점령 오보의 파장과 영향(3) 적이 남진을 주춤거린 동해안 축선(4) 대통령 떠난 뒤 ‘서울사수’ 방송(5) 미 사단장 딘 소장 실종사건(6) 이형근 장군이 본 10대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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