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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60% “메달보다 과정 중요”… 성적 지상주의와 결별해야

입력
2023.11.17 04:00
수정
2023.11.25 15:42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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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스포츠의 추락, J스포츠의 비상]
<5> 금메달 조바심 잠시 내려놔야
본보 여론조사 “생활 체육으로 가야” 90%
"최고 선수보다 최선 다한 선수에 박수를"
절반은 "올림픽 메달 못 따도 개의치 않아"
“쥐어짜는 운동 기계 대신 즐기는 스포츠로"

편집자주

한국 스포츠, 어떻게 기억하나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크게 도약한 우리 스포츠는 국민들에게 힘과 위로를 줬습니다. 하지만 저력의 K스포츠가 위기에 섰습니다. 프로 리그가 있는 종목조차 선수가 없어 존망을 걱정합니다. 반면 라이벌 일본은 호성적을 거두며 멀찍이 달아났습니다. 희비가 엇갈린 양국 스포츠 현실을 취재해 재도약의 해법을 찾아봤습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10월 8일 중국 항저우의 그랜드 뉴 센추리 호텔에 마련된 대한체육회 스포츠외교라운지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한국 선수단 해단식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10월 8일 중국 항저우의 그랜드 뉴 센추리 호텔에 마련된 대한체육회 스포츠외교라운지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한국 선수단 해단식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체육을 통해 국위 선양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불과 3년 전까지 체육정책의 헌법 격인 국민체육진흥법 제1조는 이렇게 끝맺었다. 국위 선양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올림픽 메달을 따는 것이었다. 1970년대 운동만 잘하면 대학 가고, 군대 면제받고, 노후도 보장받는 '메달 전사' 시스템이 완성됐다. 이후 한국은 올림픽 강국으로 도약했지만, 성적 지상주의의 폐해는 컸다. 현장은 구타와 성폭력, 비리로 얼룩졌다. 지도자와 선배의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2019년 목숨을 끊은 '최숙현 사건'은 엘리트 체육 위주의 정책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신호였다. 이듬해 국위 선양 문구를 삭제한 ‘최숙현법’이 통과됐지만 성적에 목을 매는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체육계는 개혁 요구에 직면할 때마다 국제대회 메달을 들먹이며 “올림픽 10위권 유지 못 해도 되느냐”며 엄포를 놓았다.

‘졌잘싸’ 시대… 국민 60% “메달보단 과정”

과거 한국 체육을 지탱하는 힘은 엘리트 체육을 통한 '국위선양'이었다. 하지만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이 지난달 진행한 자체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이 국가대표 운동선수에게 가장 원하는 모습은 '최선을 다하는 모습(60.4%)'으로 바뀌었다. 그래픽=김문중 기자

과거 한국 체육을 지탱하는 힘은 엘리트 체육을 통한 '국위선양'이었다. 하지만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이 지난달 진행한 자체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이 국가대표 운동선수에게 가장 원하는 모습은 '최선을 다하는 모습(60.4%)'으로 바뀌었다. 그래픽=김문중 기자

하지만 50년 가까이 엘리트 체육을 지탱해온 ‘금메달 지상주의’와 결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10년, 20년 국제대회 성적이 저조해도 지금처럼 선수를 쥐어짜서 성적을 내는 시스템은 리셋(reset)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한국일보는 여론조사업체 오피니언라이브에 의뢰해 지난달 20~26일 전국의 만 18~65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웹 서베이 방식으로 스포츠 인식 조사를 실시했다. 먼저 올림픽∙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에 출전한 우리 선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모습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60.4%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고 답했다. “경쟁하면서도 즐기는 모습”(21.3%) “메달, 월드컵 16강 등 좋은 성적 달성”(18.3%) 등이 뒤를 이었다.

대표팀 선수들이 성적을 내지 못하면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예전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라진 셈이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2018년 러시아월드컵에서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축구 대표팀이 엿과 계란 세례를 받은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2020 도쿄올림픽에선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준 황선우(수영) 우상혁(육상) 류성현(체조) 등에게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격려가 쏟아졌다. 메달 개수와 색깔보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는 성적 지상주의 시스템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다. 학업과 병행하며 운동을 즐기다 이 중 일부가 선수가 되는 생활체육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응답이 90.2%에 달했다. 학교체육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학 입시에 “스포츠클럽 활동 여부를 적극 반영하거나”(46.8%) “기본 체력 수준을 평가한 결과를 최소한 반영해야 한다”(32.4%)는 응답도 80%에 달했다. 교육제도를 바꿔서라도 성적을 목표로 소수 엘리트 선수를 육성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국민 다수가 즐기는 생활체육으로 넘어가자는 의견이 적극적으로 표출된 셈이다.

체육계는 개혁이 추진되려고 할 때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따도 되느냐”며 반발했다. 체육계 우려대로 한동안 메달을 못 딸 가능성이 높다. 반세기 전부터 엘리트 체육에서 생활체육으로 방향을 전환한 일본도 수십 년간 국제대회 성적이 부진했다. 우리 국민은 이런 과도기적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엘리트 시스템을 포기할 경우 국제대회 성적이 저조할 수 있다’는 질문에 걱정된다는 응답은 56.5%, 걱정되지 않는다는 답은 43.5%였다. 국민 절반가량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따도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다.

MZ세대 "선수 짓밟아 따는 메달이 무슨 의미냐"

본보는 이번 여론조사와 별개로 젊은 세대가 체육 시스템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종성 한양대 교수에게 자문해 스포츠 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생 3명을 인터뷰했다. 평소 배구와 야구 등 각자 좋아하는 종목 경기를 빠짐없이 챙겨볼 정도로 스포츠 마니아인 이들은 “우리나라가 국제대회에서 잘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다만 '어떻게 잘할 것이냐'를 두고는 기성세대와 생각이 달랐다. 지난달 8일 항저우 아시안게임 결산 자리에서 나온 “국가대표 전원 해병대 훈련”(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답이 아니었다. 이들은 대신 "현 시스템의 리셋만이 해결책"이라고 했다.

박근수(21)씨는 사례 하나를 들려줬다. 지난해 상반기 그는 교내 체육관 관중석에 앉아 고교 농구부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다가 학부모와 말을 섞게 됐다. 학부모는 선수들이 농구를 못한다며 대뜸 “좀 맞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다소 충격적이었다. 폭력이 당연한 환경에서 어린 친구들이 농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박씨는 “우리 체육 시스템은 사과를 먹고 씨앗만 남았는데 주스를 뽑아내려고 쥐어짜는 느낌”이라며 "지금처럼 성적을 내려고 선수를 짓밟고, 소리 지르고, 압박하는 시스템에서 나오는 메달과 성과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했다.

배구 ‘덕후’ 윤지우(21)씨도 '즐기는' 스포츠 환경을 만드는 게 급선무라고 했다. 그는 "학창 시절 친구와 배구를 하고 싶어도 주변에 실내 배구장이 하나도 없었다"며 “일본이 부러운 게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쉽게 운동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앞으로 20년 동안 국제대회 성적 안 나와도 좋으니 지금부터라도 ‘리빌딩’ 작업을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역시 배구 마니아인 김우경(23)씨도 “여자 배구 유소년 풀이 갈수록 줄어드는 게 체감이 된다”며 “어차피 이대로 가면 배구판은 망할 테니 10년, 20년이 걸려도 유소년 저변을 넓히는 방향으로 개혁이 진행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 시스템으로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박씨는 고시엔(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을 목표로 야구에 전념하는 일본 고교생을 그린 만화 ‘H2’ 얘기를 꺼냈다. 그는 “고등학생 때 'H2'를 보면서 ‘운동신경이 없는 나도 일본에 있었으면 매니저 역할로라도 고시엔 땅을 밟았을 텐데, 그게 평생 자랑스럽게 꺼낼 수 있는 추억일 텐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일본 학생들이 정말 부러웠다”고 했다.

일본처럼 학생들이 운동 한두 가지씩 경험하는 '1인 1기'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입시 지옥'인 우리나라에서 가능하겠느냐는 회의론도 적지 않다. '운동 기계' '공부 기계'를 양산하는 교육 체계의 문제점은 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던 배경이다. 하지만 윤씨나 박씨 얘기처럼 정책 수요자인 학생들은 성적보다는 운동을 더 많이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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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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