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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국 밉지 않아요”…벚꽃 피던 날, 아내는 셋째 낳고 떠났다

입력
2024.05.27 13:00
수정
2024.05.27 13:37
0 0

베트남 이주노동자 반민허 아내 티루엔
2018년 4월 아내 셋째 낳고 엿새 뒤 숨 거둬
비장 파열 "큰 병원으로 왜 늦게 옮겨졌는지…"
기자가 알려줄 때까지 소송 패소 사실도 몰라
"소원이요? 한국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야죠"

편집자주

11년간 아기를 낳다가 사망한 산모는 389명. 만혼·노산·시험관·식습관 변화로 고위험 임신 비중은 늘고 있지만, 분만 인프라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100일 동안 모성사망 유족 13명, 산과 의료진 55명의 이야기를 통해 산모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붕괴가 시작된 의료 현장을 살펴보고 안전한 출산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고민했습니다.

응우옌 반민허가 자녀와 함께 지난달 21일 경기 시흥의 한 공원을 산책하다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하상윤 기자

응우옌 반민허가 자녀와 함께 지난달 21일 경기 시흥의 한 공원을 산책하다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하상윤 기자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워요.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내가 선고된 걸 모를 수 있는지···.”

4월 6일 경기 시흥의 한 부동산. 응우옌 반민허(38·베트남)는 취재진이 내민 판결문을 보고도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2021년 8월 선고된 반민허의 의료 손해배상 판결문에는 그의 실명 대신 A씨로 적혀 있었다. 한국어가 서툴러 통역을 통해 소송 결과에 대해 전해 듣자, 그의 얼굴엔 낙담한 표정이 가득했다.

반민허의 아내 응우옌 티루엔은 서른 살 때인 2018년 4월 셋째를 낳고 사망했다. 그는 이듬해 8월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는 반민허의 패소. 소송 제기 후 2년 뒤인 2021년 8월 25일 1심이 선고됐지만, 반민허는 재판이 지연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는 결국 항소할 기회도 놓친 채 뒤늦게 취재진을 통해 선고 결과를 알게 됐다.

아내를 잃은 반민허는 어떻게 소송 결과를 몰랐을까. "아내가 사망한 뒤 비자 문제로 변호사(행정사 추정)에게 상담을 받았는데, 제 사정이 딱하다는 거예요. 그분이 의료소송에 대응할 다른 변호사를 소개해줬는데, 한 번도 본 적은 없어요. 비자 관련 업무를 보다가 소송 상황을 물어봤지만 '심사 중'이라고만 들었어요."

반민허는 한국이 좋았다

반민허는 스물두 살 때인 2008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빨리빨리' 문화도 잘 맞았고, 자동차를 좋아해 한국에서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하노이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하이즈엉성 출신인 반민허는 대학생 때 한국 기업에 이력서를 냈다가 합격했다. 한국으로 건너온 뒤 잡지 제조사에서 일했던 그는 2011년 말 바람대로 자동차 스마트키 제조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경기 시흥의 산업단지에 정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두 살 어린 티루엔을 '다시' 만났다.

응우옌 반민허의 아내 응우옌 티루엔이 생전 큰딸, 둘째 아들과 함께 생일 잔치를 하는 모습. 응우옌 반민허 제공

응우옌 반민허의 아내 응우옌 티루엔이 생전 큰딸, 둘째 아들과 함께 생일 잔치를 하는 모습. 응우옌 반민허 제공

사실 반민허는 2006년 베트남에서 티루엔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티루엔은 여러 기술을 배우며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둘은 인사만 하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 애틋한 감정이 싹텄다. 결혼이주여성이던 티루엔은 한국 시댁에서 받은 차별대우를 견디지 못해 이혼하고 시흥으로 왔다. 반민허는 그녀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싶었다. 두 사람은 결국 2013년 12월 24일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첫째 딸은 베트남에서, 둘째 아들은 한국에서 낳았다. 하지만 2018년 4월 벚꽃이 만개한 날, 아내는 한국에서 셋째를 낳은 뒤 6일 만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셋째의 탄생과 더불어 떠난 아내

아내의 출산 예정일은 2018년 5월이었지만, 산통은 한 달 일찍 찾아왔다. 반민허는 당시 직장에서 야간 당직 중이었다. 장인·장모가 딸 옆에 있었지만 한국어를 몰랐다. 아내는 산통 다음 날인 4월 6일 다니던 산부인과 병원이 문 열기를 기다렸다가 오전 9시에 진료를 받았다. 그리고 오전 10시 29분 셋째를 자연분만으로 출산했다. 반민허도 아내 옆에서 출산을 지켜봤기에 모든 게 순조로운 듯했다.

하지만 이날 오후 퇴원한 아내는 재차 복통을 호소했다. 산후통인 줄 알았는데 통증이 가라앉지 않자, 반민허는 다음 날 산부인과를 다시 찾았다. 하지만 동네 산부인과 사정상 주말 진료가 쉽지 않았고, 산부인과에서 발급해준 의뢰서를 소지하고 인근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다. 그럼에도 아내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상급종합병원인 대학병원으로 전원됐다. 그리고 이틀 뒤인 4월 12일 아내는 숨을 거뒀다. 사인은 산후 문맥혈전증으로 인한 비장파열. 간과 내장기관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문맥)에 핏덩어리(혈전)가 생겨 배 왼쪽 윗부분에 위치한 비장이 파열된 것이다. 상급종합병원 의사는 반민허에게 "너무 늦게 왔다. 왜 이제 왔느냐"고 물었다.

결국 소송에 나선 반민허

반민허는 아내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특히 출산 다음 날 찾은 종합병원에서 왜 그렇게 치료가 지체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민허는 분만병원에는 불만이 없었다. 종합병원이 전원을 지체해 아내의 병이 커졌다고 생각했다. 변호사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한다기에, 당연히 종합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줄 알았다. 그러나 취재진을 통해 뒤늦게 확인한 판결문을 보니, 종합병원이 아닌 분만병원을 상대로 소송이 진행됐다.

반민허 소송을 맡은 변호사 측은 의료 감정 결과를 언급했다. 변호사 측은 한국일보에 "의뢰인들은 종종 결과가 안 좋을 때 불만을 갖는 경우가 많다"며 "의료소송은 기본적으로 감정 결과가 많이 좌우한다. 해당 사건도 아마 감정 결과가 불리했던 사건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변호사 측은 "반민허에게 항소할 거냐고 분명히 안내했고 (판결문을) 전달했다"며 "이와 관련한 증거도 담당 변호사가 갖고 있다. 알아서 취재하고 기사를 내라"고 했다.

취재가 시작되자 반민허는 변호사 측으로부터 소송 자료를 돌려받았다. 출산 후 산모가 사망했을 때 불가항력 의료사고로 판명 나면, 국가는 유족에게 보상금 3,000만 원을 지급한다. 반민허는 조만간 한국의료분쟁조정원에 보상금 지급이 가능한지 신청할 계획이다.

응우옌 반민허의 큰딸이 지난달 21일 경기 시흥시 공원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망을 번역기를 돌려 표현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응우옌 반민허의 큰딸이 지난달 21일 경기 시흥시 공원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망을 번역기를 돌려 표현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반민허는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

아내가 떠난 후 반민허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특히 비자 문제가 컸다. 거주비자(F2)로 국내에서 취업 중이던 반민허는 영주권(F5)을 가진 아내가 사망하면서 거주비자 연장을 받지 못했다. F2비자를 연장하려면 영주권을 가진 사람이 신분을 보장해야 하는데, 비자 연장 심사 일주일 전에 아내가 사망하면서 자격이 상실됐다. 다만 조산으로 상급종합병원에 입원한 셋째를 돌본다는 이유로 4개월짜리 간병비자(G1)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이후 거주비자를 어렵게 다시 받은 반민허는 현재는 영주권을 얻기 위해 노력 중이다.

반민허의 첫째 딸(12)과 둘째 아들(8)은 한국에 있지만, 셋째 딸(5)은 베트남에 있다. 혼자서 아이 셋을 키우기 부담스러운 데다, 거주비자로는 한국에서 제공하는 모든 복지 혜택을 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영주권을 얻게 되면 첫째가 셋째를 돌볼 수 있을 때 셋째를 한국에 데려올 예정이다. 반민허는 온 가족이 한국에 사는 걸 꿈꾸기에, 지난해 시흥에서 방 3개짜리 아파트를 매입했다.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지만,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덕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전한다. 반민허를 오랫동안 지켜본 한 부동산중개업소 대표는 "월급은 적지만 한국에 온 지 10년도 안 돼 수천만 원짜리 전셋집을 구할 정도로 착실하게 돈을 모았다"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반민허가 아내를 잃었다고 했을 때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반민허는 벚꽃 피는 4월이 가장 슬프다. 아내가 벚꽃이 만개할 때 가족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말수가 적은 반민허에게 한국에 대한 감정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내가 죽었다고 한국이 밉진 않아요. 더 좋은 병원에 보내지 못한 걸 자책할 뿐이죠. 아내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아이들을 키우고 착실히 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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