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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전공의 잘못된 처방 일일이 확인… 재조명된 간호사 '오더 거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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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전공의 잘못된 처방 일일이 확인… 재조명된 간호사 '오더 거르기'

입력
2024.03.15 04:3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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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은 면허 가진 의사 권한이고 역할이지만
환자 특성 고려 않고 정해진 세팅 오더만 입력
위해 우려한 간호사가 처방 확인해 수정 요청

이달 8일 경기도 부천의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 한 명이 통화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이달 8일 경기도 부천의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 한 명이 통화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신규 때부터 계속했던 일이라, 간호사가 의사 처방을 바꿔달라고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박소영·가명·7년차 간호사)

"가끔 항암제 용량이나 종류 같은 오더(처방)를 수정할 때도 있는데, 그땐 부담스럽고 무섭습니다."(김지은·가명·2년차 간호사)

"환자한테 위해가 될까봐 잘못된 처방을 걸러주는 건데, 고마워하긴커녕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느냐’는 식의 의사도 많죠." (윤성주·가명·11년차 간호사)

전공의 집단행동에 따른 의료공백 사태는 국내 대형병원이 '저임금' 전공의들의 과로뿐 아니라 의사 업무 영역에 깊숙이 개입하는 간호사들의 역할에 의존해왔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원활한 진료를 위해 때로 탈법을 넘나드는 간호사의 통상 임무 가운데 최근 재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 일명 '오더 거르기'다. '오더'는 의사의 처방, '거르기'는 오류 발견을 뜻한다. 그간 의사, 특히 전공의가 잘못 낸 처방을 간호사가 수정하는 일이 대형병원의 일상이었던 것이다. 간호사들은 "처방 실수가 나오는 근본적 원인은 과중한 전공의 업무량 때문"이라며 전공의 근로조건 개선이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지적한다.

14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2차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선 오더 거르기가 간호사들의 고유 업무처럼 여겨지고 있다. 서울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박소영씨는 "우리 병원은 이브닝 때와 나이트 때, 두 번에 걸쳐 오더를 거른다"며 "일종의 더블체크로 매일 루틴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서울 대형병원 간호사 윤성주씨도 "오더 거르기는 안 할 수가 없다"며 "간호사들이 (의사에게) 처방을 고쳐달라고 하지 않으면 환자들이 엉뚱한 약, 심하면 해로운 약을 먹게 된다"고 말했다.

사실 의사의 처방을 간호사가 수정하는 건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원칙적으로 처방은 면허를 가진 의사의 권한이자 역할이고, 간호사 영역은 의사 처방에 따라 환자에게 투약하는 '액팅'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료 현장에선 '오더 거르기'라는 역할 전도가 당연하게 여겨진다. 서울 종합병원의 간호사 김지은씨는 "신규 때 어떤 식으로 오더를 수정해 정리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시간이 따로 있을 정도로 오더 거르기는 간호사의 공식 업무처럼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심지어 잘못된 처방이 그대로 나갈 경우 의사들의 원성을 듣기도 한다. 윤씨는 "애초에 처방을 잘못 낸 건 전공의인데 간호사가 캐치하지 못하면 교수가 '왜 처방을 제대로 걸러주지 않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간호사의 처방 수정이 일상화됐다는 건 그만큼 의사들의 처방 오류가 잦다는 얘기다. 간호사들은 전공의의 과도한 업무량을 원인으로 꼽는다. 김씨는 "전공의 넷이서 80명 정도의 환자를 보다 보니 환자마다 세세한 처방을 내리기보단 '세팅 오더’(증상별로 미리 정해진 처방)를 기계적으로 내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환자가 당뇨·고혈압 등 기저질환이 있는 경우 세팅 오더에 포함된 약을 섭취하면 위험할 수 있어 간호사가 의사에게 오더 수정을 요청하게 된다"고 말했다.

위중한 환자라면 간호사도 처방 점검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김씨는 "가끔 항암제 용량이나 종류 같은 오더를 수정할 때도 있는데, '내가 해도 되나' 싶고 몇 번씩 확인하게 된다"고 말했다. 박씨는 "적혈구 부족인데 수혈 처방이 없거나 수술을 앞뒀는데 항응고제를 처방한 것들을 잡아내지 못하면 환자가 위험해지거나 수술이 밀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간호사가 잘못된 처방을 가려내는 것을 넘어 직접 고치기도 한다. 윤씨는 "병동에선 의사가 처방을 수정해서 입력할 때까지 기다리지만, 급박한 중환자실이나 응급실, 수술실에선 아직도 간호사가 의사 아이디로 시스템에 로그인해 수정된 처방을 입력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간호사들은 오더 거르기의 관행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으려면 전공의 근로조건이 개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씨는 "지금 의대 증원안에 100% 찬성한다곤 못하겠지만,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정말로 의사가 부족하다고 절실히 느낀다"며 "어느 정도는 의사를 늘려 서로 일을 분담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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