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청탁금지법의 품위

입력
2023.12.13 16:00
26면
0 0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지난해 최재영 목사가 김건희(오른쪽) 여사에게 선물했다고 밝힌 샤넬 화장품(왼쪽)과 디올 파우치. ‘서울의 소리’ 동영상 캡처·뉴시스

지난해 최재영 목사가 김건희(오른쪽) 여사에게 선물했다고 밝힌 샤넬 화장품(왼쪽)과 디올 파우치. ‘서울의 소리’ 동영상 캡처·뉴시스

좋은 성과를 냈던 국내 한 과학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인터뷰가 끝난 후 그는 ‘돈 봉투’를 주려고 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고, 사회 곳곳에 ‘촌지’ 문화가 남아 있던 때이긴 하다. 당황해서 거부하자, 무척 민망해했다. 두어 명 취재원에게서 그런 일을 겪었는데, 그들과는 모두 연락이 끊겼다. 기자에게도 적용되는 청탁금지법(김영란법)이 그때 있었다면 서로 모욕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 청탁금지법이 제정될 때, 검찰 간부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검사 선배가 변호사가 된 후에 “회식이라도 하라”고 봉투를 주면, 아주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자칫 로비와 연결될 수도 있다. 거부하면 “별것도 아닌데 성의를 무시한다”고 언짢아하는데, 청탁금지법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고 기뻐했다. 청탁금지법은 강제력 없는 도덕의 언저리에서 부대끼는 이들에게, 법적 명분을 쥐어줬다.

□ 뇌물죄, 배임수재, 알선수재는 직무 관련성이나 부정한 청탁, 대가성이 입증돼야 한다. 반면 청탁금지법은 금품 수수의 조건을 따지지 않아 법의 사각지대를 메웠다. ‘인사’나 ‘정’을 내세운 선물도 처벌(소속기관·친족 선물 등은 제외)하며, 불법 기준은 1회 100만 원(1년 300만 원) 초과로 정하고 있다. 물론 더 적은 금액이라도 도덕적으로 자유롭다고 할 순 없다. 친하지 않은 이가 주는 ‘대가 없는 선물’이란 게 애초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 요즘 김건희 여사의 청탁금지법 위반 의혹이 뜨겁다. ‘함정 취재’ 목적으로 접근한 최재영 목사에게서 300만 원짜리 디올 파우치를 받아서다. 공직자의 배우자도 청탁금지법 대상이다. ‘공직자 등의 직무’와 관련됐을 때로 좀 더 까다롭지만 말이다. 김 여사는 영상에서 이걸 자꾸 왜 사오세요”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받는 난처한 입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샤넬, 디올 선물을 찍어서 보냈을 때만 만남에 응했다는 대목은 이 사안의 가장 큰 반전이다. 청탁금지법이 지키고자 하는 ‘품위’를 영부인이 잊지 않았더라면, 국민들이 이렇게 민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진희 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