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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과 연대의 투쟁, '케추아'의 정신

입력
2023.11.06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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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블랑코 갈도스(Hugo Blanco Galdos, 1934.11.15~ 2023.6.25)

페루 사회생태주의 환경운동가 우고 블랑코는 후기자본주의의 무한탐욕에 맞선 원주민들의 투쟁이야말로, 그들의 토지생존권 운동을 넘어 인류의 미래를 위한 궁극적 전위운동이라고 주장했다. 안데스 원주민 케추아족 혈통의 투사로서 그의 전선은 공장에서 농지로, 토천 탄광과 숲으로 이동했지만 그의 투쟁을 지탱한 하나의 영혼은 생명에 대한 연민과 연대였고, 그것이야말로 케추아의 정신이라고 그는 말했다. solidarity-us.org

페루 사회생태주의 환경운동가 우고 블랑코는 후기자본주의의 무한탐욕에 맞선 원주민들의 투쟁이야말로, 그들의 토지생존권 운동을 넘어 인류의 미래를 위한 궁극적 전위운동이라고 주장했다. 안데스 원주민 케추아족 혈통의 투사로서 그의 전선은 공장에서 농지로, 토천 탄광과 숲으로 이동했지만 그의 투쟁을 지탱한 하나의 영혼은 생명에 대한 연민과 연대였고, 그것이야말로 케추아의 정신이라고 그는 말했다. solidarity-us.org

15세기 대서양을 떠난 유럽의 범선들은 대양 항로의 거의 모든 섬과 (신)대륙을 식민화했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더욱 힘을 키운 유럽 열강들은 앞서 식민화한 지역의 패권을 두고 저들끼리 다투며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고, 그 끝이 20세기 전반부의 세계대전과 이후의 냉전이었다. 근현대사를 저렇게 압축해 도식화한 세계 즉 동-서반구와 남-북반구의 이분법에서, 동반구와 남반구는 그야말로 전장이었다. 특히 두 이분법의 교집합인 라틴아메리카는 수탈에 더해 20세기 가장 처절한 냉전의 무대였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즈텍 제국(1521)과 잉카제국(1533)을 무너뜨리며 시작된 라틴아메리카 억압-저항의 역사는, 그래서 19세기 대륙 여러 나라가 잇달아 독립한 뒤로도 끝나지 않았다. 땅을 차지한 백인과 메스티소(백인-원주민 혼혈)들은 절대다수의 토착민들을 대농장(Latifundia) 농노나 소작농, 광산 노동자로 부리며 군림했고, 배후에는 당연히 옛 종주국 권력자들이 있었다. 20세기 이념의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그들의 생존권 투쟁은 ‘빨갱이들의 준동’으로, 더러 변질된 예도 있지만 대부분은 왜곡-매도됐고, 옛 마야-잉카 문명의 후손들은 ‘야만인’으로 손가락질까지 받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경제적 착취 위에 이념적-윤리적으로도 착취 당했다.

서구 후기자본주의 신봉자들이 무슬림 테러리스트 못지않게 경계하며 존재 자체를 쉬쉬하지만, 생태자본주의자 등 글로벌 환경 위기의 문명사적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이 희망과 유력한 가능성으로 주목하는 멕시코 ‘사파티스타(Zapatista)’가 대표적인 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멕시코가 북미와 하나의 시장으로 묶이던 1994년 1월 1일 새벽, 남부 치아파스주 라칸돈(Lacandon) 정글 인근의 주요 5개 도시를 전격적으로 점거하며 “현대 라틴아메리카 최초 원주민 무장 봉기”를 시작한 그들 사파티스타들은 스스로를 “500년 투쟁의 산물”이라며 토지 주권과 자치를 요구했다. 멕시코 정부와의 협상이 시작된 2001년 3월 11일, 멕시코시티 대광장에는 사파티스타를 응원하며 대표단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몰려든 20만여 명이 운집했다.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부인 다니엘 미테랑과 포르투갈 출신 노벨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 등 그들 응원단은 “우리는 모두 세상의 원주민들이다”라는 플래카드를 들었다.(‘역설과 반전의 대륙’ 박정훈 지음, 개마고원)

저 500년 라틴아메리카 역사는, 한편에서는 테러리스트라 비난하고 다른 편에서는 영웅으로 추앙하는 수많은 투사를 낳았다. ‘남미의 해방자’라 불리는 볼리비아의 시몬 볼리바르와 아르헨티나의 산마르틴, 니카라과 산디노, 멕시코 혁명의 사파타와 산초 비야, 쿠바 혁명의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세계 최초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이 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와 칠레 최초 여성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추앙받던 우루과이의 게릴라 출신 대통령 호세 무히카, 사파티스타의 얼굴 마르코스, 해방신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사제 출신 콜롬비아인민해방군(ELN) 전사 카밀로 토레스 레스트레포….

페루 안데스 고원 케추아 원주민 혈통의 ‘빈자들의 환경운동가’ 우고 블랑코 갈도스(Hugo Blanco Galdos, 1934.11.15~ 2023.6.25)는 저들 ‘영웅’들에 비해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외신이 주목할 만한 정치조직이나 게릴라를 이끈 적이 없었고, 독보적인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고, '순교'하지도 않았다. 그는 청년시절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꾼 ‘제4인터내셔널’ 노동운동가 중 한 명이었고, 20대 중후반 스스로 소작농이 돼 빈농들의 토지 생존권운동에 투신한 농민운동가였고, 80년대 이래 약 10년간은 제도 개혁에 몰두한 정치인이었고, 90년대부터는 사회생태주의 환경운동가였다. 한마디로 그는 끊임없이 변신하고 진화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독재정권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7년 넘게 옥살이했고, 숱한 살해 테러 위협을 받았고, 툭하면 강제추방 당해 남미와 유럽 여러 나라를 떠돌다 틈만 보이면 다시 귀국해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전선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언제나 최전선이었고, 그 투쟁을 관통한 하나의 영혼은 이념이 아니라 연민과 연대였다. 라틴아메리카 정치 변방 페루의 '작은 거인' 우고 블랑코 갈도스가 별세했다. 향년 88세.

블랑코는 50년대 말 제4인터내셔널의 프롤레타리아 영구혁명 강령을 포기하고 스스로 소작농이 돼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페루 농업개혁의 신호탄이 된 60년대 초 소작농투쟁을 이끌다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국제사회의 구명운동으로 25년형으로 감형돼 만 7년 옥살이 후 추방됐다. 그는 거의 평생 투옥-추방-귀국 활동을 이어갔다. sinpermiso.info

블랑코는 50년대 말 제4인터내셔널의 프롤레타리아 영구혁명 강령을 포기하고 스스로 소작농이 돼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페루 농업개혁의 신호탄이 된 60년대 초 소작농투쟁을 이끌다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국제사회의 구명운동으로 25년형으로 감형돼 만 7년 옥살이 후 추방됐다. 그는 거의 평생 투옥-추방-귀국 활동을 이어갔다. sinpermiso.info

블랑코는 원주민 케추아족 출신 변호사 아버지와 소농장주 어머니의 아들로 옛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Cuzco)에서 태어났다. 라틴아메리카 최초 근대 사회혁명인 멕시코혁명(1910~20)의 정신, 즉 주요 산업 국유화와 토지 분배, 8시간 노동제, 대학 무상교육의 1917년 멕시코 헌법의 정신이 남미 전역으로 파문처럼 번져가던 때였다. 그의 집안은 중산층이었으나, 케추아족 서민들을 주로 변호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원주민 빈농들이 겪던 극빈과 비인간적 처우에 일찍부터 눈을 떴다. 10세 무렵 한 대농장주가 원주민 소작농의 엉덩이에 달군 인두로 소유권 낙인을 찍던 장면을 목격한 일(‘전해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을 그는 평생 기억했다.

40년대 중등학교 시절부터 수업 거부 등으로 반독재투쟁에 가담하던 그는 54년 아르헨티나 라플란타대(농학)로 유학하면서 본격 정치운동을 시작했다. 미국이 농업기업 이권을 위해 과테말라 좌파 정권을 몰아내고 우익군사정부를 수립한 해, 즉 미 CIA에 의한 중남미 좌파 정권 붕괴 도미노의 첫 조각이 쓰러지던 해였다. 그는 트로츠키주의 제4인터내셔널에 가입하면서 대학을 중퇴, 현지 한 육류 가공공장에 취업해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56년 귀국한 뒤에도 노동혁명당(ROR)에 가입해 노동-반독재 투쟁을 이어갔고, 58년 페루를 방문한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부통령 반대시위를 주도했다.

페루 안데스 고원 원주민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말 쿠스코 시위 도중 경찰 총에 시위대 청년이 숨졌고, 항의시위는 해를 넘겨 수도 리마로 확산됐다. 그 소식을 전한 LA타임스 기사 제목은 한 원주민의 말을 인용 "그들은 우리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였다. AFP 연합뉴스

페루 안데스 고원 원주민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말 쿠스코 시위 도중 경찰 총에 시위대 청년이 숨졌고, 항의시위는 해를 넘겨 수도 리마로 확산됐다. 그 소식을 전한 LA타임스 기사 제목은 한 원주민의 말을 인용 "그들은 우리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였다. AFP 연합뉴스

라틴아메리카를 인구학적으로 구분할 때 페루는 원주민 비율이 높아(약 45%) 멕시코와 함께 ‘원주민 라틴아메리카’로 분류되는 국가다. (브라질과 쿠바는 흑인 라틴아메리카,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백인 라틴아메리카로 분류된다.) 원주민 대부분이 안데스 고원지대의 소작농이다.

페루노동자연맹 쿠스코 지부의 하위노조(신문판매원) 대표 등으로 활동하던 그가 농민운동에 투신한 계기도 감옥에서 콘벤시온 주 안데스 고원 농부들을 만난 뒤부터였다. 프롤레타리아 영구 혁명이라는 제4인터내셔널의 핵심 강령보다 그에겐 눈앞의 질곡이 더 중요했다. 그는 곧장 스스로 소작농이 되어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고율 토지 임대료와 노예나 다를 바 없는 무임금 노동, 인격적 학대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며 61년 쿠스코농민연맹을 설립했고, 62년 페루공산당 등 다른 지역 좌파 조직들과 연대해 ‘혁명적좌파전선(FIR)’을 결성했다.

20세기 안데스 농민운동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콘벤시온주 농민 무장 봉기(62~63)가 그렇게 시작됐다. 공권력에 맞서 토지를 점거한 채 1년 넘게 버틴 그들의 저항은 지역을 넘어 페루 전역으로 확산됐고 68년 집권한 좌파 알바라도 정권은 사회주의 개혁의 일환으로 대농장 국유화와 소작제 폐지를 골자로 한 ‘농업개혁법(1969)’을 제정했다.

63년 경찰관 살해 혐의로 체포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블랑코는 제4인터내셔널 유럽 활동가들과 사르트르, 시몬 드 보봐르, 버틀란트 러셀 등의 구명운동 덕에 66년 감형(25년형)됐다. 알바라도 정권은 70년 그를 석방시켜 농업개혁의 실무를 맡기려 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정부 개혁안은 봉건적 대농장-소작농제도의 자본제적 전환일 뿐이라고, 지주와 소작농이 대규모 농업자본과 농업노동자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그는 비판했다. 정권은 그에게 수도 리마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 농민조직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사실상 연금했다가 71년 추방했다. 그는 멕시코와 아르헨티나를 거쳐 칠레에 머물다 73년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 와중에 스웨덴으로 피신했다. 사실상 정치 난민이던 그의 망명을 도운 이가 2차대전기부터 유럽서 유대인 등의 탈출을 도운 당시 스웨덴 외교관 하랄드 에델스탐(Harald Edelstam, 1913~1989)이다.

그는 75년 정권교체기에 귀국했다가 77년 총파업으로 다시 추방됐고, 제헌의회 선거가 치러진 78년 귀국해 노동자농민학생공동전선 후보로 출마해 하원의원이 됐다. 80년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가 후보 16명 중 4위로 낙선했고, 90년 상원의원이 됐다. 하지만 그해 집권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의 의회 강제해산으로 그는 이듬해 다시 멕시코로 망명했다. 그에겐 극우집단뿐 아니라 ‘빛나는 길’ 등 극좌 테러집단의 살해 위협이 집중됐다.

59년 쿠바 혁명으로 미국이 60년대 라틴아메리카 우익 쿠데타 지원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면, 80년대말 소비에트의 해체와 중국 천안문사태(89)는 중남미 좌파들의 탈이념화의 계기가 됐다. 블랑코가 환경-생태운동에 투신한 것도 그가 제도정치를 경험한 뒤부터였다. 탄광 등 무분별한 자원 개발과 권력-자본의 부정한 결탁, 오염과 파괴의 고통을 가장 먼저 가장 참담하게 겪는 원주민 등 가난한 이들의 고통…. 그는 토지투쟁의 이상을 자연과 환경, 공동 자원에 대한 가치의 개념으로 확장했다.

페루 출신 여성 다큐 감독 말레나 마르티네즈가 제작한 2019년 장편 다큐 '우고 블랑코, 깊은 강' 포스터. 영화는 그해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원월드 국제인권다큐영화제'에서 초연된 이래 20여 개국 국제영화제에 초청 상연됐다. imdb.com

페루 출신 여성 다큐 감독 말레나 마르티네즈가 제작한 2019년 장편 다큐 '우고 블랑코, 깊은 강' 포스터. 영화는 그해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원월드 국제인권다큐영화제'에서 초연된 이래 20여 개국 국제영화제에 초청 상연됐다. imdb.com

만년의 그는 사회적 불평등보다 인류의 생존이 더 절박하고 근본적인 숙제라는 걸 저 무렵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에게 글로벌 자본주의는 기후위기와 노천 채굴, 화석연료 추출, 무분별한 삼림 벌채 등 자본을 위한 무한 파괴였고 원주민의 저항은 반자본주의의 선봉이자 인류 생존의 미래였다. (###8) “신자유주의를 설파하는 기업들은 자연 훼손과 인류의 멸절에는 아랑곳 않고 오직 가능한 한 최단 시간내에 최대의 이윤을 남기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강에 독을 뿌리고 숲을 파괴해 원주민을 죽이고 있다.”(그의 책 ‘We, the Indians’ 2017)

그는 한 매체 인터뷰에서 자신의 생태사회주의의 이념을 이런 이야기로 설명했다.

#남아프리카에서 현장연구를 하던 한 인류학자가 나무에 사탕을 주렁주렁 매단 뒤 아이들에게 따먹기 경쟁을 시켰더니 모두가 손을 잡고 나란히 나무를 향해 나아가더라는 것. “사탕을 못 먹는 아이가 생기면 우리 모두가 슬프기 때문에, 네가 있어야 내가 있기 때문에”가 아이들이 밝힌 이유였다.

#블랑코가 어느날 쿠스코 시장에서 우기에만 잠깐 맛볼 수 있다는 귀한 버섯을 발견해 농부에게 제값에 전부 사겠다고 했더니 그 농부가 “안 된다. 내가 당신에게 다 팔아버리면 다른 사람에겐 뭘 파느냐”고 하더란 이야기. 상거래는 단순히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일부라는 의미였다.

그것이 ‘어머니 자연(Pachamama)’을 섬기는 원주민의 사랑이고, 이웃과의 연대이며,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라고, 그것이 “내 부족 케추아의 정신이자 원주민의 정신”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원주민을 ‘원시인’이라 한다. 맞다. 우리는 한때 모든 인류가 누렸던 원시적 조직, 수평적인 조직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를 ‘야만인’이라고도 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존재라는 점에서 그것도 맞다. 나는 수탉보다 콘도르로 살고 싶다.” 그에겐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원주민들의 운동이야말로 지구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전위 운동이었다.

그는 세상이 이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멕시코 사파티스타들이, 국가부도 사태로 정부가 손놓은 방송과 기업들을 맡아 자치-자율의 원칙으로 운영해온 그리스 테살로니키의 시민과 노동자들이, 미국 키스톤 파이프라인 건설에 맞서 원주민들과 더불어 싸운 수많은 미국 시민들이 그들이었다. 그는 미국 최대 반트럼프 운동이 여성 행진이었다는 사실, 페루 역사상 최대의 대중 행진 역시 2015년 수도 리마에서 벌어진 ‘니 우나 메노스(Ni Una Menos)‘ 여성행진이었다는 사실, 또 낙태권을 위해 싸우는 폴란드 여성들에게서, 아르헨티나 로사리아의 여성들에게서 전위로서의 여성의 힘과 미래를 보았다. 그는 노동-농민운동 시절부터 평생 ‘아래로부터의 힘’을 믿었고, 그것이야말로 조직사회의 기초라고 믿었다. “나는 카우디요(caudillos, 지도자)나 관리자들을 믿지 않는다.”

2002년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은 뒤로도 그는 2007년 그가 창간한 신문 ‘Lucha Indigena(Indigenous Struggle)’를 통해,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미국 등지의 초청 강연 등을 통해 페루 및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생태주의의 절박한 가치를 열정적으로 웅변했다.

2019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그레타 툰베리와 만나 환하게 웃는 우고 블랑코. facebook.com/gretathunbergsweden

2019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그레타 툰베리와 만나 환하게 웃는 우고 블랑코. facebook.com/gretathunbergsweden

블랑코는 첫 아내(Vilam Valer)와 맏딸을, 두 번째 아내(Ana Sandoval)와 5남매를 낳았다. 2020년 그의 삶과 투쟁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Hugo Blanco, Rio Profundo(deep river’)가 만들어졌고, 지난 4월 스웨덴 하원의원 출신 환경운동가 데렉 월(Derek Wall)이 쓴 그의 전기 ‘Hugo Blanco- a revolutionary for life’가 출간됐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편지와 문자 메시지로 응원한 많은 이들을 보며 사형수 시절 구명운동을 벌여준 친구들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편지를 보낸 젊은이들 중에는 옛 동지들의 아들딸, 손자손녀라며 자신도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고 소개한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나와 함께 땅을 위해 싸웠던 이들의 아들과 손자가 지금 나와 함께 있고, 모두가 투쟁의 집단기억을 품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내겐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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