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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사망보험금으로 낸 보증금인데..." '수원 전세사기' 청년들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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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사망보험금으로 낸 보증금인데..." '수원 전세사기' 청년들의 절규

입력
2023.10.25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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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왕 추적기: ④멈추지 않는 임차인 눈물]
사회초년생, 신혼부부... 또 2030 피해 속출
부동산 안심, 신속한 은행 대출에 덜컥 계약
"대출금 어떻게 갚을지" 너도나도 망연자실

편집자주

대규모 전세사기 사건이 수원에서 또 터졌습니다. 확인된 피해규모만 671세대(세입자)입니다. '정씨'라는 임대인이 수십 채 건물을 보유하며, 수백 건 임대차 계약을 맺으며 수백억 대 전세보증금을 긁어모았습니다. 정씨는 어떻게 이런 '부동산 제국'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요? 정씨의 정체를 추적하고, 사기가 근절되지 않는 전세제도의 맹점을 짚어봤습니다.

18일 경기 수원시의 한 카페에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수원=정다빈 기자

18일 경기 수원시의 한 카페에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수원=정다빈 기자



"아버지 사망보험금으로 얻은 자취방인데...."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한 김모(19)씨는 중학교 2학년 때 같이 살던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강원도에 사는 할머니에게 맡겨져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제과제빵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은 놓지 않았다. 노력은 결실을 맺어 올해 초 경기 수원시 소재 한 대학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다.

입학을 앞둔 2월 어느 날 자취방을 구하러 수원의 한 부동산을 찾았다. 아버지가 선물처럼 남기고 간 사망보험금 7,000만 원이 종잣돈이 됐다. 하지만 악몽은 그날부터 싹텄다. 부동산 측은 한 다세대주택의 원룸을 권했다. 등기부등본을 살펴보니 근저당 금액만 10억 원이었다. 미심쩍어하는 그에게 부동산 대표는 "집주인이 돈이 많다. 근저당도 금방 해결될 거다" "정 불안하면 공제증서도 써주고 전세권도 설정해 주겠다"고 꾀었다. 거듭된 설득에 결국 계약했다.

불안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8월 계약을 중개한 부동산 간판이 사라져 수상함을 느끼던 차에, 같은 빌라에 사는 입주민이 "집주인과 연락이 안 된다. 전세사기가 의심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김씨는 22일 "아버지 사망보험금이라 더 마음이 아프다"며 "치매까지 있는 여든 살 할머니는 '어떡하느냐'는 말만 반복하신다"고 했다. 그는 지금 자퇴를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수사가 진행 중인 '수원 전세사기' 사건은 이미 숱한 피해를 낳았다. 현재까지 드러난 피해 규모만 671가구, 810억 원에 이른다. 이번에도 대학생과 사회초년생, 신혼부부 등 제 몸 하나 편히 누일 터전을 찾던 서민들이 사기꾼의 먹잇감이 됐다.

"전세사기는 부동산과 은행의 합작품"

18일 경기 수원시에서 전세사기 피해자가 사건 주범이자 임대인 정씨와 체결한 임대차계약서를 내보이고 있다. 수원=권정현 기자

18일 경기 수원시에서 전세사기 피해자가 사건 주범이자 임대인 정씨와 체결한 임대차계약서를 내보이고 있다. 수원=권정현 기자

취재진은 최근 수원 전세사기 사건 피해자 20여 명을 만나봤다. 대부분 20, 30대 청년들로 전세대출을 받아 1억 원대 보증금을 내고 입주한 경우다.

새내기 직장인들은 회사와 가까운 곳에 거처를 구하려다 낭패를 봤다.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인중개사의 부추김과 은행의 안일한 대출을 성토했다. 근저당 해결은 부동산이 자신하고, 은행도 금세 대출을 내주길래 설마 했다는 것이다.

직장인 박모(30)씨는 2019년 10월 중소기업청년대출 9,140만 원을 빌려 정씨와 임대차계약을 했다. 박씨는 "건물에 근저당이 20억 원이나 걸려 있어 포기하려 했는데, 공인중개사가 '정씨는 건물 40채가 넘는 부자고 아들도 비슷한 또래인데 자식뻘한테 사기를 치겠느냐'고 설득했다"고 말했다. 6년 전 정씨 일가가 운영하던 부동산에서 오피스텔 전세 계약을 했던 박모(39)씨도 "처음에 간 은행에서 건물이 법인 소유라며 대출을 거절하자, 부동산 대표가 아는 은행 대출 상담사를 통하니 바로 대출금이 나왔다"고 했다.

신혼 단 꿈도, 결혼 행복도 물 건너가

"100일도 안 된 아기를 데리고 법원 가서 배당금을 신청하려니 착잡한 마음뿐입니다."

'수원 전세사기' 피해 청년들의 사연. 그래픽=박구원 기자

'수원 전세사기' 피해 청년들의 사연. 그래픽=박구원 기자

신혼부부와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도 눈앞이 캄캄하긴 마찬가지다. 결혼 2년 차 A씨는 요즘 7월에 태어난 아기와 행복을 누릴 겨를이 없다. 5월 만삭의 몸으로 수원의 한 신축빌라를 찾아 전세계약을 했는데, 정씨가 운영하던 법인 명의 건물이었다. 역시 20억 원 넘는 근저당이 설정돼 있었지만, 부동산 측 답변은 한결같았다. "임대인이 건물을 많이 소유해 사기 칠 일은 절대 없다."

A씨는 "지난달 빌라가 경매에 넘어갔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100일도 되지 않은 딸을 업고 전세사기피해자센터와 법원 등을 오가느라 심신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우모(33)씨 부부는 결혼까지 미뤄야 한다. 이자가 비교적 낮은 신혼부부 버팀목 대출로 내 집 마련의 꿈을 구상하던 도중, 기존에 살던 전셋집 건물이 압류되면서 보증금 마련을 위해 빌린 중소기업청년대출 8,000만 원을 갚을 길이 막막해졌다. 우씨는 "파산하면 개인회생 변제기간 3년 동안은 아이도 못 가질 것"이라고 토로했다.

"책임질 생각도 없어"... 보증금 회수 막막

18일 오후 경기 수원시의 한 빌딩 앞에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임대인 정씨 일가와 실랑이하고 있다. 수원=권정현 기자

18일 오후 경기 수원시의 한 빌딩 앞에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임대인 정씨 일가와 실랑이하고 있다. 수원=권정현 기자

아무리 절규하고 고민해도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18일 경찰이 정씨 부부와 아들 등을 대동해 수원 사무실 압수수색에 나섰다는 소식에, 그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현장을 찾았다가 또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무수히 쏟아지는 질문에도 정씨는 굳게 다문 입을 끝내 열지 않았다. 피해자 한모씨는 "대책도, 책임질 생각도 없고 도망만 가려 하는 태도에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들다"며 "이미 몇 달째 비어 있는 사무실을 이제 와서 압수수색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분노를 드러냈다.

수원= 권정현 기자
수원= 정다빈 기자
수원= 오세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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