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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혼인 증여 2000만 원

입력
2023.08.02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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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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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아버지가 결혼자금으로 2,000만 원을 물려줬다. 입사 후 5년간 저축한 돈과 아내의 월세보증금을 합쳐 서울에 6,500만 원짜리 전세를 얻었다. 아파트는 언감생심, 방 한 칸에 거실 딸린 작은 빌라였다. 아버지 지원이 없었다면 결혼을 늦췄거나 월세를 구했을 것이다. 1년 뒤 아이가 태어나고 3년을 더 그 집에서 살았다.

'신혼집은 신랑이 마련해야 한다'는 당시 통념을 아내는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늘 미안해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에도 가끔 그 얘기를 꺼냈다. 아내조차 "돈보다 귀한 아들을 주셨다"고 달랬다. 아버지는 없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버지의 증여 덕분에 삶의 한고비를 수월하게 넘은 건 부인할 수 없다"고.

'혼인자금 증여 공제 확대' 논란에 즈음해 아버지가 떠올랐다. 1억5,000만 원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못한 자신을 탓했을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 준 정부를 비판했을까. 무게 추는 전자로 기울었을 게다. 자식에게 더 많이 주고 싶은 마음, 그러지 못할 때 죄스러운 심정, 아버지가 돼 보니 알겠다. 성경 속 '가난한 과부의 헌금(누가복음 21:1~4절)'처럼 "자신의 전부를 준 것"이기에 아버지의 2,000만 원은 세상의 1억5,000만 원보다 값지다.

정부 결정에 공감하는 면은 있다.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 공제 한도 현실화, 세원 양성화 논리는 타당하다. 2003년 3,000만 원이던 성인 자녀 증여 공제 한도는 2014년 5,000만 원으로 늘어난 뒤 10년째 변동이 없었다. 한 번 더 올릴 시기가 됐다는 얘기다. 그사이 증여 재산이 주로 쓰이는 주거비의 급등도 증액에 힘을 보탠다. 자녀의 독립을 권장해야겠지만 부모 지원이 없다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 우리네 현실이다.

다만 기본 공제(5,000만 원)의 두 배(1억 원)인 추가 공제 사유로 '결혼'을 앞세운 게 적절했는지는 따져볼 대목이다. 정부가 조건을 달지 않더라도 자녀에게 목돈을 증여하는 시기는 보통 결혼과 맞물려 있다. 구태여 생색을 내다가 논란을 자초한 꼴이다. "노후 준비도 안 됐는데 빚내서 결혼시키라는 압박" "부자 자녀만 혜택 보는 결혼" "결혼할 생각 없으면 자식 취급하지 않는 세상" 같은 날 선 반응이 그렇다.

'저출생 해소용'이란 부연도 빈약하다. 세금 깎아 주면 결혼이 는다는 결론은 단편적 사고다. 결혼은 했으나 아이는 낳지 않는 딩크족이 많은 게 현실인 데다, 한국 사회에서 출산과 육아가 단순히 돈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전셋값 부담을 줄여주고 싶다면 집값을 잡는 게 정공법이다. 증여 후 파혼할 경우 정부가 내놓은 대처법도 빈틈이 많고 난해하다.

증여세의 속성상 '부의 대물림' 지적을 피할 수 없겠지만 중산층에게 돌아갈 혜택마저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상황은 안타깝다. 수혜 대상을 명확히 밝히지 못한 정부 책임이다. 이럴 거면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서민을 위한 정책도 마련하기 바란다. 증여 공제 확대는 기본 공제를 '조건 없이' 공평하게 증액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다. 설명은 간결하고 건조하게 하라.

아들의 통장을 살펴보니 명절 용돈을 저축한 돈에 형편 닿을 때마다 5만~10만 원씩 입금해 둔 게 450만 원쯤 모였다. 증여 공제 한도를 늘린다니 아들에게 물려줄 돈을 열심히 모아 보겠다.

고찬유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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