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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서 일하게 만들고 연차 사용 강요...이건 개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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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서 일하게 만들고 연차 사용 강요...이건 개혁이 아니다"

입력
2023.03.25 04:30
수정
2023.03.29 13:47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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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력근로제로 '주 65시간' 경험한 청년의 일갈
"몰아서 일하고 쉬기? 노동자 전혀 고려 안 해"
고용장관 만난 청년유니온 "개정안 폐기해야"

지난해 외국계 기업의 한국 지사에서 퇴사한 30대 박모씨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기절 시간표'를 그리고 있다. 기절 시간표는 고용노동부의 근로시간 개편안이 나온 뒤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곽주현 기자

지난해 외국계 기업의 한국 지사에서 퇴사한 30대 박모씨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기절 시간표'를 그리고 있다. 기절 시간표는 고용노동부의 근로시간 개편안이 나온 뒤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곽주현 기자

"노동자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근로시간 개혁이라고요? 주 65시간 해봤는데, 그렇게 일하면 사람은 못 버텨요."

한 외국계 대기업의 한국 지사에서 일했던 지난 1년이 박모(32)씨에게는 '지옥' 같았다. 그가 속했던 경영관리 부서는 한 달에 1, 2주는 꼭 일이 몰렸는데, 회사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활용해 '주 52시간'의 벽을 뛰어넘었다. 정해진 근로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였으나 매달 바쁜 주가 찾아오면 박씨는 보통 오후 10시, 심할 때는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새벽 6시 30분까지 일했다. 사전에 주별 근로시간을 회사 시스템에 입력해야 했으나 그대로 이행된 적은 없었고, 근로일 간 연속 11시간 휴식도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다. 노트북을 집에 들고 가 '출근을 찍지 않은 상태로' 잔업을 한 적도 있었다. 항상 일은 넘쳤고, 사람은 부족했으며, 상사는 눈치를 줬기 때문이다.

박씨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구성한 '기절 시간표'(왼쪽 사진)와 지난해 이틀 연속 새벽에 퇴근하며 친구에게 남긴 메시지.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활용하는 사업장에서 한 달에 한두 차례 박씨의 주간 노동시간은 65시간에 달했다. 박씨 제공

박씨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구성한 '기절 시간표'(왼쪽 사진)와 지난해 이틀 연속 새벽에 퇴근하며 친구에게 남긴 메시지.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활용하는 사업장에서 한 달에 한두 차례 박씨의 주간 노동시간은 65시간에 달했다. 박씨 제공

그렇게 전투적으로 2주를 보내면 남은 2주 동안은 '주 평균 52시간'을 맞추기 위해 인사팀이 매일같이 연락했다. 박씨는 "인사팀이 '이번 주는 연장근무 4시간 이상 못 한다'고 통보하는 바람에 대낮에 퇴근 처리를 하고 남아서 일을 한 적도 있고 특정 일을 지정해 개인 연차를 강제로 쓰게 한 적도 부지기수였다"고 말했다. 전산상으로 박씨는 문제없이 주 평균 52시간을 준수했지만 실제 근로시간은 이를 훨씬 상회했다.

쉬는 날이 주어져도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다시 한 바퀴를 돌아 '지옥의 주'가 다가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옆 부서에서 오후 10시쯤 과호흡으로 쓰러진 직원을 목격했고, 들어온 지 몇 주 만에 퇴사하는 직원도 여럿이었다. 1년쯤 버티자 박씨 몸에서도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편두통에 우울감과 불안 증세가 심해졌고, 주말만 되면 쉬이 잠들지 못했다. 결국 박씨는 지난해 퇴사했다. 그는 "회사에서는 (연장근무가) 본인이 동의한 일이라고 하지만 갓 입사한 젊은 직원이 잔업이 쌓여 있는 걸 뻔히 보면서 거부할 수 있겠나"라며 "주 최대 69시간 개편안이 근로자 선택권을 넓히기 위한 제도라고 포장하는 건 직접 경험해 본 입장에서 말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연장근로 유연화는 근로자 위한 정책 아니다"

청년유니온 회원들이 24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에서 열린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과의 간담회에 앞서 장관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청년유니온 회원들이 24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에서 열린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과의 간담회에 앞서 장관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박씨의 경험은 정부가 얘기하는 '일부의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지만 청년들이 고민하는 지점은 다르다. 주 최대 69시간 근로가 현실화하는 근로시간제도 개편안이 그대로 도입될 경우 이런 사례가 흔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하지 않아도 '몰아서 일하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정부는 "몰아서 일하는 만큼 나머지 주에는 적게 근무할 수 있다"며 정책을 홍보했지만 박씨 사례처럼 원치 않는 연차 사용을 강요하거나 허위로 근무시간을 기록하고 추가 업무를 시킬 여지도 있다.

'근로자 대표제'도 과로의 근본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박씨가 다니던 회사에도 근로자 대표가 있었지만 부서마다 사정이 똑같지 않은 데다 사전 동의 과정이 형식적으로만 이뤄졌다. 박씨는 "나에게 '연장근로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설사 있었더라도 분위기상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4일 비공개로 진행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과 청년유니온 간담회에서도 이 같은 우려의 목소리는 똑같았다. 15~39세 노동자로 구성된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은 이달 18~22일 청년 노동자 22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취합된 의견을 이 장관에게 전했는데, '개편안대로 시행되면 인원을 더 뽑지 않고 한 사람에게 일을 몰아주게 된다' '작은 사업장에서는 인력 부족으로 지금도 연차를 사용하지 못한다' 등이 포함됐다.

김설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간담회를 마친 뒤 "'총노동시간을 줄여나가기 위한 노력에 역행하는 것 아닌가' '신규 채용을 늘리거나 업무 구조를 개선해야지 주 52시간 이상 노동을 허용하는 것이 합당한가' 등의 우려를 전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현 정부의 개편안은 폐기해야 한다"며 "법정 근로시간은 주 40시간으로, 주 52시간을 기준으로 유연화하겠다는 주장은 매우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곽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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