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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은 '참사(disaster)'라는데 한국 정부는 '사고(incident)' 고집

입력
2022.11.01 19:00
수정
2022.11.02 10:14
0 0

한덕수 총리 외신 브리핑에서 'incident' 표기
외신기자 'disaster'라고 표현 바꿔 SNS 게시
참사, 희생자 대신 사고, 사망자 지침 내린 정부
야권·누리꾼들 "책임 회피, 사태 축소 꼼수" 비판

한국에 10년 넘게 체류 중인 영국 출신 프리랜서 기자 라파엘 라시드가 올린 트위터 사진. 트위터 캡처

한국에 10년 넘게 체류 중인 영국 출신 프리랜서 기자 라파엘 라시드가 올린 트위터 사진. 트위터 캡처

'South Korean prime minister Han Duck-soo starts press briefing with foreign media re: Itaewon disaster.'

정부는 1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최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이태원 참사' 관련 외신기자 브리핑을 열었다. 참사 발생 사흘 만에 전 세계 외신 기자들에게 우리 정부의 입장을 밝히는 공식 자리였다. 한 총리는 외국인 사상자에 대해 내국인과 같은 수준으로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그 내용보다 외신기자들의 주목을 끈 건, 한국 정부가 준비한 행사 알림 자료였다. 한 총리 뒤로 내걸린 화면에는 '한덕수 국무총리 이태원 사고 외신 브리핑'이라는 글귀 아래 영문으로 'Foreign Media Briefing with Prime Minister Han, Duck-soo On Itaewon Incident'라고 적혀 있다.

한국에 10년 넘게 체류 중인 영국 출신 프리랜서 기자 라파엘 라시드는 이 사진을 첨부하며, 'Itaewon disaster'라고 표기해 게시글을 올렸다. 한국 정부가 'Incident'라고 표현한 것을 콕 집어 'Disaster'라고 바꿔 적은 것이다.

이를 두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한국 정부와 외신이 바라보는 이태원 압사 사고의 성격을 정확하게 대비시켜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대다수 한국 언론을 비롯한 전 세계 외신들은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 이번 최악의 압사 사고의 구조적 심각성을 알리고자 '이태원 참사', 'Itaewon disaster'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차원에서 '이태원 사고'로 표기하라는 지침을 내린 데 이어, 외신 대상 공식 브리핑에서조차 사건을 뜻하는 'Incident'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톤을 낮추려는 모습이다.

행안부는 지난달 30일 전국 17개 시·도에 보낸 합동분향소 설치 공문에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라고 표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참사' 대신 '사고', '희생자' 대신 '사망자', '피해자' 대신 '부상자'라고 표기하도록 했다.

정부 '참사' 대신 '사고' 표기... "책임 회피, 사태 축소 의도 아니냐" 비판

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차려진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핼러윈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차려진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핼러윈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정부는 왜 '참사(Disaster)'라는 말 대신 '사고(Accident)', '사건(Incident)'을 굳이 사용하는 걸까. 이를 두고 참사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책임 소재가 갈린다는 점을 의식한 조치라고 보는 분석이 적지 않다.

먼저 영어에서 'Incident'는 통상 예기치 못한 우발적으로 발생한 일로 해석되고, 'Accident'는 계획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사건으로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경우 쓰인다. 'Disaster'는 많은 사람에게 큰 고통이나 손실을 주는 재해, 재난의 발생을 뜻한다. 즉, 사태의 심각성만 따지면 Incident는 가장 약한 단계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어로 옮겨 오면 맥락은 더 분명해진다. 통상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뚜렷해, 사건을 만든 당사자인 가해자와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분명해진다. 때문에 이번 압사 피해가 '사건'이 될 경우 가해자를 특정해 과실 책임을 묻는 수준으로 사태가 축소·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압사 피해가 발생한 좁은 골목길 뒤편에서 고의로 행렬을 민 일행들을 추적하는 것도 이 같은 책임을 묻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반면 뜻밖에 벌어진 일을 뜻하는 '사고'로 규정된다면, 그 책임 범위는 정부, 경찰, 지방자치단체로 넓어질 수밖에 없다.

누리꾼들은 정부의 이 같은 표기를 두고 "정부 당국의 책임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 꼼수 아니냐"고 반발하고 있다. 한 누리꾼은 "참사를 참사라 부르지 못하고, 희생자를 희생자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가 됐다"며 정부의 표기 방침을 성토했다.

정치권도 가세했다. "단순한 사고로 정리하고 사고에 의한 사망자로 처리한다면 희생자에 대한 모독이며 정부 당국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처사"(박지원 전 국정원장)라거나, "정부가 명백한 참사를 '사고'로 표현해 사건을 축소시키거나 희생자를 '사망자'로 표현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면 정부는 "책임 부분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립적 용어 사용이 필요했다"는 입장이다.

김성호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은 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정부는) 사망자와 부상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며 "가해자와 책임 부분이 객관적으로 확인되거나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립적 용어가 필요해 이렇게 사용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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