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크 자산 2%면 세계 굶주림 해결" 기사 제목에
테슬라 수장 "장부 공개하면 주식 2% 팔겠다"
실제 내용은 WFP의 '긴급 구호 자금 요청'
비즐리 사무총장 "계획, 장부 전부 가져간다"
총자산 3,350억 달러(블룸버그 억만장자지수 기준)로 현재 '세계 최대 부자'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수장이 말했다고 알려진 "머스크 자산의 2%만 쓰면 세계의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 직접 "테슬라 주식을 팔아 내겠다"면서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장부를 공개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데이비드 비즐리 WFP 사무총장이 "어디서든 만나자"고 답하면서 둘 간의 만남이 이뤄질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뭔가 극적으로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모양새와 달리 이 대화가 결코 좋은 맥락으로 이뤄진 것만은 아니다. 머스크가 비즐리 사무총장을 인터뷰한 CNN의 잘못된 기사 제목을 보고 이 같은 트윗을 던졌기 때문이다.
머스크는 지난달 31일 "만약 WFP가 이 트위터 글타래에 정확히 어떻게 60억 달러를 써서 세계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다면 즉시 테슬라 주식을 팔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조건은 공개된 회계 자료에 근거해 누구나 어디에 돈이 쓰이는지 명확히 볼 수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애초 트윗을 날린 머스크의 의도는 도발적이다. 머스크의 지지자들은 머스크를 감싸는 동시에 국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국제기구의 '비효율성'을 강하게 성토하고 있다. "이미 수많은 돈을 썼는데 기근과 빈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비효율과 부패의 증거"라는 것이다.
"60억 달러로 굶주림 해결" → "당장 굶주리는 사람 구할 60억 달러"
그런데 문제는 머스크가 이 트윗을 쓰면서 본 기사 제목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애초 그가 본 기사 제목은 "일론 머스크의 자산 2%가 세계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유엔 식량 부족 조직의 수장이 말했다"로, 미국 CNN방송이 지난 26일 공개한 데이비드 비즐리 WFP 사무총장 인터뷰 기사였다.
하지만 실제 인터뷰 내용을 보면 비즐리 사무총장은 이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그는 모든 세계 기근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한 것이 아니라 "당장 위급한 사람들을 위한 단 한 번의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비즐리 사무총장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면 말 그대로 죽어버리는 4,200만 명을 돕기 위해 60억 달러가 필요하다"면서 "이건 복잡한 게 아니다. 매일, 매주, 매년 그렇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비즐리 사무총장이 억만장자의 대표 사례로 머스크를 말하기는 했지만, 머스크'만' 겨냥한 것도 아니다. 그는 해당 인터뷰에서 미국 자산 규모 1위부터 400위까지 모든 억만장자의 총 자산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기간에 1조 8,000억 달러 불어났다고 지적하면서 "내가 부탁하는 것은 늘어난 자산의 0.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비즐리 사무총장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를 지낸 바 있는 공화당 소속 정치인이기 때문에 출신국의 부호들에게 호소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는 2017년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서 임명한 니키 헤일리 당시 유엔주재 미국대사의 추천으로 WFP 사무총장이 됐다.
비즐리 사무총장은 1일 머스크의 트윗에 멘션(답글)을 달아 "헤드라인이 정확하지 않다"면서 "60억 달러는 세계 기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정학적 불안, 대규모 이주를 막고 굶주림 상태에 놓인 4,200만 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전례 없는 위기와 코로나바이러스, 분쟁, 기후위기로 인한 '퍼펙트 스톰'(여러 문제가 동시에 겹치는 최악의 위기)"을 방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CNN은 비즐리 사무총장의 지적이 있었던 1일 뒤늦게 기사의 제목을 '해결할 수 있다(could solve)'에서 '해결을 도울 수 있다(could help solve)'로 교체했다.
절박한 비즐리 "어디든 만나자...장부, 계획 전부 보여주겠다"
WFP가 억만장자들을 상대로 '읍소'에 나선 것은 식량을 마련하고 이를 세계 곳곳에 전달하는 비용이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프 후사인 WFP 수석 경제학자는 "식품 조달 비용은 1년 전보다 21% 올라, 지난해와 같은 양의 식품을 확보하려면 3억 달러가 더 필요하다"며 "운송 비용도 연료비가 치솟아 1,000달러였던 컨테이너 사용료가 4,000달러 혹은 그 이상 든다"고 말했다.
비즐리 사무총장은 머스크의 '투명 회계 요구'에도 "우리는 공개 회계와 투명성을 위한 시스템을 이미 마련하고 있고 당신의 팀이 이를 점검함으로써 함께 확실한 신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머스크가 다시 "현재 소비되는 장소와 앞으로 소비 계획을 발표해 달라"고 하자 비즐리 사무총장은 다시 "트윗 대신 지구든 우주든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데 가능하면 WFP 직원과 절차, 기술이 작동하는 곳에서 만나자. 계획과 장부를 공개하겠다"고 답했다. 이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WFP 본부를 염두에 둔 설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머스크가 비즐리 사무총장의 초청에 응할지는 미지수다. 애초 머스크가 잘못된 기사 제목을 보고 생각했던 것(세계 기근의 해결)과 WFP에서 주장하는 내용(긴급 구호 자금 요청)은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자국 이기주의로 인해 WFP를 비롯한 국제기구를 지탱하는 각국의 지원이 줄면서, 국제기구는 문제 해결 능력이 약해진다는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WFP는 현재 상황은 'WFP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나빠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입장이다. 늘 새로운 위기가 닥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정권이 교체되면서 대규모 자국 내 난민이 발생했고, 에티오피아에선 부족 갈등에서 비롯한 내전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대규모 실업이 발생해 당초 위험이 없었던 곳에서도 기근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또 이런 문제 제기는 WFP가 이미 잘 알고 있다. 안날리사 콘테 WFP 제네바 사무국장은 2020년 10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아 문제 해결의 근본 방법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면서 "기근은 단순히 억만장자의 돈이 들어온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전 세계 정부와 비정부기구(NGO) 등 다각적이고 폭넓은 분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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