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반일'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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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반일'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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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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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열린 이스타항공노동자 결의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이스타항공 운항 재개와 체불임금 지급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설 명절에 가족들인 모인 자리에서 가을쯤 해외여행을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어머니 칠순을 기념해서다. 괌 베트남 싱가포르 등이 후보로 거론됐다. 거기에 “가까운 일본은 어때”라는 제안을 보탰다. 그러자 초등학생 조카들이 펄쩍 뛰며 말했다. “삼촌, 이 시국에 일본이요? 거기 다녀왔다고 하면 ‘왕따’돼요.” 당시는 이른바 ‘노(NO) 재팬’ 운동이 시작된 지 반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지난 주 제주항공이 이스타항공에게 ‘노딜(인수무산)’을 선언했단 소식을 듣고 불현듯 그 때 기억이 떠올랐다. 매각이 무산된 이스타항공은 곧장 파산 위기에 몰렸다. 이미 모든 항공기 운항이 중단된 데다 완전자본잠식 상태여서 자력으로 살 길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스타항공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대주주인 이상직 더불어민주당 의원 일가의 경영실패와 무책임한 행보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는 점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저비용항공사(LCC)를 9개나 허용해 과당경쟁을 초래한 국토교통부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기업 실적만 놓고 보면, 이스타항공의 날개가 꺾인 결정적인 계기는 2019년 7월 불붙기 시작한 일본 불매운동이었다는 점이다.

2007년 설립된 이스타항공은 2013년 첫 영업이익을 낸 후 2018년까지 소폭이나마 흑자를 유지했다. 매출도 2013년 2,543억원에서 2018년 5,663억원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수익성이 계속 나빠졌고 자본잠식도 커졌지만, 어쨌거나 당장 파산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2019년 돌연 738억원 영업손실을 기록한다. 국제선 가운데 30% 이상을 차지하던 일본이 한 순간에 ‘가면 안 되는 곳’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2018년 총 753만명에 달한 일본 출국자는 2019년 하반기 157만명으로 급감했다. 다른 LCC업체들 역시 작년 3분기부터 모두 적자로 돌아섰다. 재무 사정이 더 나빴던 이스타항공은 작년 9월 비상경영체제에 들어섰고 결국 매물로 나오게 된다.

물론 불매운동이 잘못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촉매가 됐던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고, 이 조치의 출발점인 강제노역 사건 판결에 대한 일본의 항의도 비난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정당한 소비행위라 해도 그로 인해 엉뚱한 피해를 보는 기업이나 국민들이 생길 수 있다. 그런 점까지 고려해 성숙한 대응을 유도하고 피해기업에 대한 대책까지 마련해야 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현실은 오히려 반대였다. 정부와 여당은 반일감정을 부풀리는 쪽으로 대응을 했다. 청와대 고위간부는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한 '죽창가'를 페이스북에 올리며 여론 몰이에 앞장섰다. 여당 원내대표는 일본에 우호적인 얘기를 하면 ‘신친일’이라고 몰아세웠다. 그 결과 초등학생들까지 일본에 가면 '매국노'로 여기는 세상이 됐다. 제대로 된 외교적 해법을 내놓지 못했음에도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은 되레 상승했고, 총선도 압승했다.

그 사이 이스타항공 노동자들의 처지는 어땠나. 이스타항공에선 노동자 수백 명이 구조조정을 당했고 1,600명이 넉 달 째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이 던진 '짱돌'이 자국민의 뒤통수를 때렸지만, 그 고통에 함께한 여당 의원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인수가 무산된 후에도 정부와 여당은 뒷짐만 지고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반일'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유환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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