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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 꼰대’들에게 드리는 반박

입력
2020.07.07 16:04
수정
2020.07.07 18:05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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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남자들은 다 철부지' 일반화에
정치권이 왜 '내로남불'인지 알 것 같아
낡은 가족관 고집하는 꼰대들이 철부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일 국회 지구촌보건복지포럼 주최로 열린 ‘코로나19 사태 이후, 대한민국 재도약의 길’에서 강연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일 국회 지구촌보건복지포럼 주최로 열린 ‘코로나19 사태 이후, 대한민국 재도약의 길’에서 강연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꼰대질은 '기성세대가 자기 경험을 일반화하여 젊은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꼰대는 원래 선생님, 아버지라는 뜻이다. 선생님, 아버지가 해(害) 되는 말씀하신 적 있나? 그래선지 최근 나는 한 꼰대 덕에 큰 통찰을 얻었다. 

현직 국회의원인 이낙연 전 총리가 국회 강연에서 “인생에서 가장 크고 감동적인 변화는 소녀가 엄마로 변하는 순간”이라며, “남자들은 그런 걸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이 먹어도 철이 안 든다”고 했다. 놀랐다. 내가 나이만 먹었지 철부지인 것을 어찌 아시고! 

‘남자들은 다 철부지’라는 폭로에 많은 이들이 충격 받은 모양이다. 이 의원은 즉시 사과했는데, 사과 역시 꼰대스러워서 높은 예측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는 사과문에서 꼰대들의 비전(?傳), ‘라떼는 호스(Latte is horse)' 초식을 구사했다. ‘내가 말이야, 1982년 내 아내가 애 낳고 탈진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거기서 깨달은 거지! 내가 철부지구나!’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진심 어린 조언을 준 꼰대는 이 의원이 처음도 아니다. 3년 전 대선 후보 홍준표는 우리에게 하늘의 섭리를 깨우쳐 주었다. 그는 “남녀 일은 하늘이 정해 준 것”이라며 “설거지는 여자가 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일갈에 나는 나의 죄를 깨달았다. 하늘의 뜻을 거슬러 감히 여자 일인 설거지를 했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고치고 싶었다. 하지만 소심한 나는 그러지 못했다. 설거지를 거부하기는커녕 요리는 물론, 청소까지 손대고 말았다. 깨끗해진 방바닥과 반짝이는 싱크대를 바라보며 미소짓기까지 했다. 

내친 김에 꼰대들과의 첫 대면도 털어놓겠다. 약 20년 전 외교부에 처음 들어 갔을 때 일이다. 숙직은 모두 남자만 섰다. 이상해서 선배들에게 물어 보았다. 왜 남자만? 꼰대들의 답은 역시나 예측 가능했다. “여자가 어떻게 숙직을 해? 그러다 사고 나면 누가 책임져?” 외곽은 경찰이 경비하고 내부는 방호원들이 지키는 정부종합청사 안 숙직실에서 여성 외교관 2명이 한 조가 되어 숙직을 서면 무슨 사고가 나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겁 많은 나는 감히 되묻지 못했다. 대신 매년 외무고시 합격자의 60~70%를 차지하던 여성 후배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모두 숙직을 서고 싶다고 했다. 

‘남자들은 다 철부지’라는 폭로의 진정성에 수긍하면서도 의문을 금할 수 없다. 매일 전국에서 40명 가까이 극단적 선택에 내몰린다. 4분의 3이 남성이다. 상당수가 직장을 잃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인생의 코너에 몰렸다. 이들은 철부지인가? 매일 7명 정도 발생하는 무연고 사망자의 70%가 남성이다. 이들 역시 철부지? 매년 2,000명 정도 발생하는 산업재해 사망자의 95%도 남성이다. 이들은 철이 없어 겁도 없이 산업현장에 뛰어들었나? 나라를 지키겠다고 매년 군에 입대하는 수십만의 ‘철부지’들은 또 뭔가? 

애를 못 낳아본 사람들이 ‘철부지’라면 대한민국은 철부지 투성이다. 요즘은 결혼해도 애는 안 낳거나 아예 결혼 자체를 기피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남자들도 과거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사와 양육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오히려 육아휴직 받고 싶어도 살인적인 근로시간과 경쟁에 밀려 눈치 보느라 말도 못 꺼내는 남자들이 많다. 

누가 진짜 철부지인가? 애 못 낳아 본 사람들이 철부지가 아니라 남녀의 고정적 역할에 기반한 낡은 가족관을 고집하는 ‘꼰대’들이야말로 더 철부지 아닐까? 이제 남녀의 역할을 고정적으로 나누던 구분의 울타리도,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기반한 가족도 해체되고 있다. 

이 나라의 꼰대들이 젊은 세대를 돕고 싶어 하는 마음에 진심 어린 조언 주는 것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언은 현실에 기반해야 한다. 이미 사라져 가는 낡은 세계관을 근거로 조언을 준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꼰대’라는 침묵의 반박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입 다물고 있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교수ㆍ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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