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약속의 시간이 찾아왔다. 4년 동안 자신의 이익 같은 건 꿈도 꾸지 않고 오직 국민의 행복만 바라보겠다고 한다. 30일 임기를 시작하는 21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은 각자의 다짐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개하고 있다. 하나같이 진지한데, 대부분 글에서 빠짐없이 보이는 단어가 ‘일하는’ 이다.
며칠 전 친구가 요즘 정치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일하는’ 이라는 뉴스를 봤다며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일을 안 했으면 이제 와서 ‘일하는 국회’ 만들겠다고 다짐까지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정치부 기자를 해 본 경험으로 여의도 사람들도 일 많이 한다고 했더니 ‘편 들어 주냐’는 핀잔을 들었다. 사실 국회는 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안 한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4년 마다 국회가 열리는 날이면 가장 바쁜 곳이 국회 본청 7층의 의안과다. 국회의원들이 각종 법안을 제출하는 곳으로 ‘OO대 국회 1호 법안 제출자’ 라는 타이틀을 따기 위해 치열한 눈치 싸움을 한다. 전날부터 보좌진이 돗자리를 펴고 줄을 서는 씁쓸한 풍경도 펼쳐진다.
문제는 이 법안들 중 상당수가 부실하다는 것이다. 국회에서 법안을 내기 위해서는 의원 10명 이상이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보통 대표 발의하는 의원실에서 ‘초안’을 만들어 법제실에 검토를 맡긴다. 법제실에서는 새 법안이 헌법에 맞는지, 다른 법과 충돌하는 부분은 없는지, 자구 조문 등이 이상한 건 없는지 등을 살펴 의원실에 알려준다.
국회 보좌진 경력 10년의 A씨는 “의무 사항은 아니다”면서도 “상임위원회 검토 과정에서 말썽이 생기면 안되기 때문에 법제실 검토는 필수”라고 했다. 법제실 검토에 걸리는 시간은 최소 2주. 첫날 제출된 법안 중 상당수는 법제실을 거치지 않았다는 건 국회에서 ‘안 비밀!’ A씨는 “법제실에 가면 시간도 걸리고 문제점을 지적 받을 수 있어 일부러 보내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털어놓았다.
4년 전인 2016년 5월 30일 20대 국회 첫날 의안과가 접수 받은 법안 52개 중에는 사실상 똑 같은 법안을 같은 당 의원 4명이 제각각 대표 발의한 사례도 있다. 정부 조직을 개편해 보건복지부에 노인 복지를 전담할 청을 새로 만들자는 것인데 ‘노인청’ ‘노인복지청’ ‘노인복지지원청’처럼 무늬만 다를 뿐 내용은 ‘복사+붙여 넣기’ 였다. 심지어 이들 중에는 같은 법안을 17대·19대 국회를 포함해 세 번째 낸 경우도 있다. 재탕도 모자라 삼탕을 한 셈이다. 법안 내용이 이런 지경인데 하나같이 ‘국회가 문을 연 첫날부터 법안을 냈다’는 자화자찬 보도자료까지 냈다.
그렇다면 20대 국회가 문을 닫는 지금 이 법안은 어떻게 됐을까. 마지막 본회의도 끝난 지금 노인복지 전담 기관 법안은 20대 국회 임기 마지막 날인 29일 다른 법안들과 함께 ‘폐기’ 예정이다. 물론 폐기됐다고 꼭 부실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상대 당이나 정부 반대에 부닥쳐 좌절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핵심은 과연 법안의 본회의 통과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 했느냐인데 이 법안은 심사의 맨 첫 단계인 법안 심사 소위에서조차 다뤄지지 않았다. 발의만 멋들어지게 해놓고 정작 처리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이렇듯 내용보다는 형식만 따지는 보여주기 식 일 처리지만 어느 누구도 따끔하게 질책하지 않는다. 대신 열심히 하면 됐지 하는 식으로 격려한다.
새 국회라고 달라질까. 벌써부터 21대 국회 업무 개시 첫날인 다음주 월요일(6월 1일)을 앞두고 어느 의원실 식구들이 이번 주말부터 의안과 앞에 돗자리를 편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한다.
임기 시작을 앞둔 21대 예비 국회의원들께 한 말씀 올린다. 국민이 바라는 국회는 일 많이 하는 국회가 아니라 일 잘 하는 국회다.
박상준 이슈365팀장 buttonpr@hankookil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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