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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34세 여성총리’ 핀란드, 진짜 부러운가

입력
2019.12.20 18:37
수정
2019.12.20 19:09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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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보다 정치 제도와 토양 주목해야

뻔한 총리 인선, 선거개혁 표류 암울

여성-청년 배제된 정치로 미래 없어

세계 최연소 총리에 오른 산나 마린 핀란드 신임총리(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지난 10일 연정 파트너 정당 대표들과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헬싱키 AP=연합
세계 최연소 총리에 오른 산나 마린 핀란드 신임총리(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지난 10일 연정 파트너 정당 대표들과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헬싱키 AP=연합

지난 10일 핀란드발 빅뉴스가 세계를 흥분에 빠뜨렸다. 34세 여성 산나 마린이 세계 최연소 총리에 올랐다는 소식이다. 마린 총리의 사민당과 함께 연정을 구성한 4개 정당 대표도 모두 여성인 데다 그 중 셋이 30대 초반. 이어 발표된 장관도 19명 중 12명이 여성이었다. 기념사진에서 여성 장관들 사이사이에 남성들이 서 있는 낯선 광경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국내 SNS도 들썩였다. 많은 이들이 관련 뉴스를 앞다퉈 올리며 놀라움과 부러움을 쏟아냈다. 일부 정치인도 가세했다. 평소 젠더 이슈와 청년 문제에 호의적이지 않던 보수 성향 인사들까지 “핀란드에 가서 살고 싶다!”라고 부르짖는 기이한 광경도 목도했다. 그러나 환호성도 잠시, 핀란드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 땅의 현실을 돌아보니 환멸만 짙어진다. 70세 안팎 ‘그때 그 사람들’로 채워진 후임 총리 하마평은 현실이 됐다. 선거제도 개혁안은 개혁 취지를 알 수 없는 누더기가 된 채 표류하고 있다. 다수 국민도 일찌감치 기대를 접은 듯하다. 이쯤에서 한껏 삐딱하게 묻고 싶다. “핀란드가 진짜 부러운가? 우리에게 부러워할 자격은 있는가?”

북유럽 이웃 나라들과 국민 행복도 1위를 다투는 핀란드는 성평등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1906년 유럽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해 이듬해 세계 최초로 여성 19명이 의회에 진출했다. 여성 총리는 2003년 처음 나온 이래 이번이 세 번째다. 여성 대통령이 2000년부터 무려 12년을 재임했는데, 당시 아이들이 “남자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고 묻곤 했다고 한다. 청년 정치 참여도 활발하다. 만 18세에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지고, 만 15세면 정당에 가입해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다. 다당제에 기반해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선거제도도 갖췄다. 그 덕에 현재 의회에서 여성과 45세 미만 의원 비율은 각각 절반에 육박한다.

우리가 진짜 부러워해야 할 것은 세계 최연소 총리나 젊은 여성이 다수를 차지한 내각의 면면이 아니다. 인구 구성에 기반해 민의를 정확히 대변하는 핀란드의 선거제도, 패기 넘치는 젊은 정치인을 끊임없이 길러내는 핀란드 사회의 정치적 토양이다. 마린 총리는 그 토양 속에서 성장해 약관의 나이에 정치에 입문했고 27세에 시의원을 거쳐 30세에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하는 등 착실히 정치 경험을 쌓아왔다. 세계는 ‘최연소이자 여성 총리’의 탄생에 주목했지만 정작 그는 “나이와 젠더에 대해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더 부러운 것은 핀란드에서 성평등 문화가 정치뿐 아니라 가정과 교육 현장, 노동 시장 등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내린 점이다. 영국 저널리스트 마이클 부스는 북유럽 각국의 속살을 유머러스하게 담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에서 기업조직에서도 여성 상사가 많고 대학 졸업자의 60% 이상이 여성인 핀란드의 상황을 흥미롭게 소개한다. 가난한 레즈비언 커플 가정에서 성장한 마린의 개인사가 그 나라에선 호기심의 대상으로 소비되지 않는다는 것도 주목을 끈다.

자, 이제 우리 현실로 돌아와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여성이 상사인 조직에서 흔쾌히 일할 수 있는가(유능하기만 하다면 따위 조건 달지 말고!). 내 아이가 하루쯤 학원에 빠지고 성소수자 친구와 함께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집회에 가겠다면 흔쾌히 허락할 수 있는가(그래도 SKY에 간다면 같은 토 달지 말고!).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선거제도 개혁 논의를 망친다면 단호히 비판할 수 있는가(총선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따위 토 달지 말고!) 반대 진영의 정치인이 부당한 사생활 침해를 당한다면 기꺼이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내 편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이 난감한 질문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저없이 “예스”를 외칠 수 있을까. 단언컨대 “핀란드가 진짜 부러운가”란 질문에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이려면 이 질문들에도 “예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미래도 밝아진다.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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