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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총수 폴더 사과, 대통령의 '전언' 사과

입력
2024.04.19 17:30
수정
2024.04.19 18:1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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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죄송 말했다'는 용산
대국민 사과를 전해들어야 하나
잘못 인정 않는 법조인 한계 벗길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제17회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제17회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디올 파우치) 수수에 대한 사과일 줄 알았다. 지난 1일, 총선 사전투표 전 막판 판세라도 좀 뒤집어보려면 그 정도는 필요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의료개혁에 대한 반발은 용납할 수 없다는 선전포고였다. 국민들은 51분 동안 윤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을 반복재생으로 들었다. 바뀐 것 없는 내용을 굳이 대국민 담화까지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뒤늦게 대통령실에선 의대 증원 2,000명을 고수하지 않겠다는 게 담화의 핵심이라고 부연 설명을 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다르게 이해한 대다수 국민이 국어를 다시 배워야 할 판이다. 명품백을 받은 것은 분명 잘못이라며 국민 앞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읍소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다. 진정성이 느껴지면 ‘박절하지 못한’ 국민도 적잖다.

적어도 고개는 숙일 줄 알았다. 여당 참패 후 열린 16일 국무회의인 만큼 그래도 민심을 무겁게 여긴다는 시늉 정도는 생방송 카메라 앞에서 보여줄 줄 알았다. 하지만 과한 기대였다. 윤 대통령은 13분간 하고 싶은 말만 한 채 방송을 끝냈다. 국민들이 정작 듣고 싶었던 사과는 4시간 뒤 ‘전언’ 형식으로 나왔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비공개로 진행된 국무회의 마무리 발언과 참모진 회의에서 ‘국민들께 죄송하다, 대통령인 저부터 잘못했다’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세상에 어느 나라 대통령이 직접 해야 할 대국민 사과를 비서 시켜 대신 전달하나. 옛날 왕이라고 해도 부적절한 형식이다. ‘비공개 사과’란 신박한 아이디어는 또 누구의 발상인가. 화난 국민들 마음을 풀어주긴커녕 기름만 부었다.

사실 여당이 총선에서 참패했다고 윤 대통령이 반드시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국민의힘이 진 것이니 선거를 책임진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사과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취임 2년도 안 돼 치러진 이번 총선 결과는 윤 대통령 국정 운영에 대한 국민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 이를 엄중히 여기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국민들은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전언 사과’에서 국민들은 그런 진정성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윤 대통령은 잘못한 게 없다는 생각인 듯하다. 그렇지 않고선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그러나, 하지만’이 7번이나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뉘우치기보다 책임을 돌리는 모습에 윤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는 23%까지, 최저치로 추락했다.

윤 대통령의 억지춘향식 ‘전언 사과’는 과거 일부 재벌 총수들의 대국민 사과만도 못하다.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여론이 악화하는 ‘오너 리스크’나 대형 사고가 터졌을 때 기업 법무팀과 홍보팀 의견은 충돌한다. 법무팀에서는 절대 잘못을 인정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혐의를 시인하는 자백이 될 수 있는 만큼 수사나 재판 시 불리하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홍보팀에서는 모든 법 위에 국민정서법과 여론이 있다는 걸 지적한다. 법적 잘잘못을 떠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선 오너가 카메라 앞에서 허리 굽혀 ‘폴더 사과’를 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사태 초기엔 법무팀 의견을 따르는 총수들이 많다. 회사에선 왕인 오너들에게도 사과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여론이 더 악화하면 결국 홍보팀 조언대로 고개를 숙인다. 삼성, 현대차, SK, 대한항공, DL그룹, HDC현대산업개발, 남양유업이 모두 그랬다. 이재용 회장은 두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윤 대통령은 인생의 상당 기간을 검사로 지냈다. 법조인의 특성상 잘못을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더 이상 검사가 아니다. 상대하는 이도 피의자가 아닌 국민이다. 윤 대통령이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은 민생을 챙기기 위해서도 민심부터 다독일 줄 알아야 한다. 그게 대통령의 존재 이유다.

박일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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