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원자로가 하나의 얼굴을 지닌 게 아니라는 증거다. 원자로는 다양한 얼굴을 가졌다. 인류에게 미소를 보내는가 하면 송곳니를 드러낼 수도 있다. 미소만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한국에도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일본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1995년 발표한 소설 ‘천공의 벌’에 나오는 대목이다. 신형 자위대 헬기를 원전에 추락시켜 폭파하겠다는 협박범(그들은 대부분 원전 피폭 피해자의 가족이다)들은 이 경고장을 통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혼재하는 원전의 이중성을 폭로한다. 실제 책 출간 후 16년이 지난 2011년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가 터졌다. 원전이 테러뿐 아니라 자연 재해 앞에서도 속수무책일 수 있다는 현실 앞에 일본 열도는 경악했다. ‘원전=클린 에너지‘라는 철석 같은 믿음도 깨졌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 수 차례 현장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필자 역시 원전 사고로 고통 받는 주민들을 대면하며 원전이 결코 인류의 미소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이런 확신은 그러나 의외로 오래 가지 못했다. 서울 하늘을 연일 뿌옇게 뒤덮고 있는 미세먼지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봄철 발생하는 일시적 행사쯤으로 여겨지던 미세먼지의 공습이 이제 여름 한철 정도를 제외하고는 일상이 돼 버렸다. 원인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석유ㆍ화석연료를 이용한 화력발전과 자동차 매연, 그리고 당사자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중국발 미세먼지 등이다.
서울과 수도권을 뒤덮는 미세먼지는 원전 사고로 발생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있다. 대한의사협회가 3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초미세 먼지 노출로 인한 우리나라 한 해 조기 사망자가 2만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지난 해 미세먼지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4조여원에 달한다는 발표(현대경제연구원)도 나왔다. 이쯤 되면 국가적 재앙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본적인 해결책 역시 누구나 알고 있다. 석유ㆍ화석연료를 대체할 친환경 에너지다. 문제는 생각만큼 대체 에너지의 개발 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점이다. 기대했던 태양광 발전은 무분별한 난개발과 또 다른 환경오염이라는 부작용이 부각되면서 진척 속도가 더디다. 지열 발전은 인위적인 유발지진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실상 백지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풍력, 조력 발전 역시 아직은 주요 대체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기에는 공급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 와서 다시 원전을 늘려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완벽한 대체 청정 에너지가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말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게 국가기후환경회의가 제안한 ‘계절관리제’다.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집중적인 저감 조치를 통해 미세먼지 배출량을 전년 대비 20% 이상 감축하자는 게 골자다. 우선 수도권과 인구 50만명 이상 도시를 대상으로 노후 경유차 운행 제한 등 조치를 취해야 한다.
서울시에서도 ‘미세먼지 시즌제’라는 이름으로 보다 세부적인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기본적인 틀은 기후환경회의의 그것과 비슷하며 공공기관 주차장 2부제, 공영주차장 할증 등의 내용이 추가됐다.
국민적인 공감대도 충분하다. 서울시가 9월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미세먼지 시즌제 도입에 대한 필요성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90% 이상이 찬성했다. 재앙 수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통 분담을 감내하겠다는 충분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법제화의 길은 열리지 않고 있다. 미세먼지 시즌제 도입을 위한 상시적 근거법을 마련해야 할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면서 법 통과가 요원한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11월 중에 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지자체의 조례 작성이 늦어져 시행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어린 아이는 벌에 쏘이고 나서야 벌의 무서움을 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천공의 벌’에서 지적한 경고가 현실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회는 당장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
한창만 지역사회부장 cm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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