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 경제전쟁 속 모호해진 ‘친일파’ 정의
‘관작 남용’ 비판에도 선조는 이순신 등용
국난에도 편가르기 뛰어넘지 못한 개각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9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장관급 인사 후보자를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 기자단

우리에게는 ‘적폐’가 나라를 구한 역사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증거다. 선조가 1591년 2월13일 ‘진도군수 이순신(李舜臣)을 초자(超資)하여 전라도 좌수사에 제수하라’고 하자, 대간들이 들고 일어섰다. ‘현감(종6품)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정3품)에 초수(招授)하시니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遞差ㆍ교체) 시키소서.’ 단번에 7등급을 뛰어넘는 승진은 ‘적폐’라는 게 신하들의 반대 논리였다. 그런데 우리가 ‘암군’(暗君)으로 여기는 선조는 의외로 이렇게 맞선다.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요즘 한반도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왕적폐’로 통하는 재벌이 한일 갈등과 미국의 안보 압박 상황에서 정부가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정부ㆍ여당이 당장은 효과 없는 장기ㆍ감정적 대책을 쏟아낼 동안 전선을 맡고 있는 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다.

정부는 ‘트럼프ㆍ김정은’ 브로맨스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한반도 평화 분위기 조성에 기여했다고 여기지만 사실과 다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처음부터 전쟁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2016년 미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에 완패 직전이던 당시 트럼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낸 스티브 배넌이 증인이다.

배넌은 지난해 ‘아메리칸 프로스펙트’와의 인터뷰에서 “대북 군사 해법은 없다. (개전 후) 30분 내에 1,000만 명이 죽지 않도록 하는 방정식을 풀지 못하는 한 그 문제를 얘기하지 말라”고 말했다. 정권 초기부터 군사적 응징 계획은 없었고,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 발언은 전형적 과장법이라는 것이다.

트럼프 정권이 대북 공격을 애초에 배제한 건 25년 전 ‘1차 북핵 위기’ 때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공습을 준비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다른 판단의 이유는 뭘까.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과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 문재인 대통령도 인정했듯 5,000만명이 모여 사는 10만㎢ 땅에 세계 경제를 좌우할 것이 25년간 너무 많아졌다. 이른바 ‘재벌ㆍ친일세력’이 곳곳에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공장을 지은 덕분이다. 그래서 한국의 ‘글로벌 부가가치’ 사슬이 끊기면 청와대 주장처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이 직격탄을 맞게 됐다.

3년 적폐청산 작업 표적이 ‘친일파’로 옮아가는 와중에 일본과의 경제전쟁이 터지면서 도리어 친일의 정의가 모호해지고 있다. 정파마다 상대를 친일파라고 비난한다. 생존이 절박했던 압제적 상황을 감안하면 ‘종북ㆍ빨갱이’ 역사를 쉽게 재단할 수 없는 것처럼 ‘친일ㆍ부역’의 역사도 두부 자르듯 가릴 수 없는 게 분명해졌다. 보수 진영이 ‘북한 대변인’으로 몰아세우는 문 대통령까지 급기야 이 논란에 휩싸였고, 친일파의 상징으로 욕먹는 박근혜 전 대통령도 김정일에게 정중한 안부편지를 보낸 친북의 과거가 있다. 개그콘서트에서 유행했던 ‘애매한 걸 정해주는 남자’, 즉 ‘애정남’이 그리울 정도다. 그 코너가 아직 있었다면 “싸우면 적폐고 뭉치면 우리 편입니다. 편가르지 말고 실력을 기릅시다”라고 했을 것 같다.

사실 인류 역사의 업적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이뤄졌다. 아이작 뉴턴은 “만유인력 법칙의 발견은 내가 수많은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나라 시황제도 “태산은 한줌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아 거대함을 이루었고, 하해는 가는 물줄기를 사양하지 않아 깊음을 이뤘다”는 참모(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을 통일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분절적 사고로 종북ㆍ친일로 나눠 싸우기에는 외교ㆍ안보ㆍ경제적으로 너무 위태한 국면이다. 꽤 많은 이들이 고사했다는 말도 들리지만, 이번 개각에서도 문 대통령이 선조의 적폐 등용을 재연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조철환ㆍ뉴스3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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