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인정하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격주 금요일 <한국일보>에 글을 씁니다.
<10>안톤 슈낙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슬픔은 나쁜가. 영혼에 묻으면 얼른 닦아 없애야 할 무엇인가. 화창한 인생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슬픔은 배척해야 할 대상이다. 젊은 엄마에게서 “아이가 슬픈 일, 마음 아픈 일은 조금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난감하다.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슬픔이 한 톨도 없는 아이의 인생이 좋기만 할까.

슬픔은 사람을 단단하고 유연하게 만든다. 육체의 단련을 위해서는 운동이 필요하듯이 영혼의 단련을 위해서는 슬픔이 필요하다. 슬픔은 영혼의 운동이다. 우리는 슬픔을 통해 강해진다.

안톤 슈낙(1892~1973)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표제작)’은 1953년부터 1982년까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유명해졌다. 중ㆍ장년층에게 고전으로 남은 이 글의 시작은 이렇다.

“울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초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 한 모퉁이에서 오색영롱한 깃털의 작은 새의 시체가 눈에 띄었을 때. 대체로 가을철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를 테면 비 내리는 잿빛 밤. 소중한 사랑하는 이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져갈 때. 그러고 나면 몇 주일이고 당신은 홀로 있게 되리라.”(9쪽)

페이지마다 흘러 넘치는 작가의 감수성에 감탄한다. 서정적인 문체로 슬픔의 항목들을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지붕 위로 떨어져 내리는 빗소리, 줄타기 묘기에서 세 차례 떨어진 어릿광대,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꽃피는 나뭇가지로 떨어지는 눈발… 슬픔은 도처에 있다.

기쁨이 나를 중심으로 발산하는 감정이라면, 슬픔은 밖에서부터 내 안으로 수렴하는 감정이다. 슬픔을 아는 자는 타인의 고통이나 불행에 쉽게 감응한다. 기쁨은 우리를 행동하게 하지만, 슬픔은 우리를 사유하게 한다. 문학에 기여한 많은 작가들이 기쁨보다 슬픔에 더 반응한 이유다. 슬픔을 모르고서 우리는 시를 쓸 수 없고, 그림을 그릴 수 없고, 노래 부를 수 없다. 탁자를 두드리며 부르는 유행가 가락에도 슬픔이 배어있지 않은가.

“희망은 가끔 우리를 좌절시키지만/ 슬픔은, 절대.” 이렇게 시작하는 헬만의 시가 있다. 슬픔은 우리를 좌절시킬 수 없다. 슬픔은 좌절 너머에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은 무기력하지 않다. 무기력할 겨를이 없다. 슬픔은 강력하고 능동적인 감정이다.

물론 이 책에 슬픔만 가득한 건 아니다. 슬픔에 민감한 사람은 필히 눈이 좋은 사람이니, 사랑이나 기쁨, 다른 다양한 감정에도 밝은 게 분명하다. 작가의 유년시절 일화들, 김나지움(Gymnasium)에 다니던 때의 추억을 다룬 글들은 따뜻하고 아름답다.

‘내가 사랑하는 소음, 음향, 음성들’이란 글을 보자. “아득히 들려오는 장닭의 울음소리”, “마을 대장간의 망치 소리”, “9월의 어느 날 밤, 투명한 정적 속으로 한 알의 사과가 툭 떨어지는 소리”, “처마 끝을 똑똑 긁어대는 박새의 날쌘 발톱소리”, “썰매를 끄는 말방울 소리”, “미움과 사랑, 환희,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들을 수 없는 죽음의 발소리”… 그의 귀는 ‘촘촘한 소리그물’ 같다. 아름답고 섬세한 소리라면 모조리 긁어 모으는 갈고리처럼, 그의 귀는 소리를 수집한다. 슬픔의 뒷면은 사랑이고, 사랑의 시선은 이토록 섬세하다는 것을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ㆍ차경아 옮김
문예출판사 발행ㆍ256쪽ㆍ1만2,800원

안톤 슈낙은 두 차례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 작가다. 1933년 히틀러가 총리가 된 해에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작가 명단에 이름을 올려,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 일로 그의 특별한 감수성과 빛나는 문장들을 아주 없는 셈 치기엔 안타깝다. 그는 훌륭한 인간은 아닐지 모르나, 슬픔을 아는 인간인 것만은 분명하다. 인간의 마음은 복잡하고 어렵다. 어디서부터 잘못하여 실수를 하는지, 실수는 돌이킬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생각하노니, 그의 실수 역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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