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승효상 선생을 따라 유럽의 수도원 기행을 했다. 일정을 마치고 홀로 남아 유럽의 도시들을 서성이며 지난 열흘간 내가 본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내게 이번 여행의 목적 중 하나는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보는 것이었다. 롱샹 성당은 물론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건축 중 하나로 꼽히는 ‘라 투레트’ 수도원은 책에서 본 것 이상의 감흥이 있었다. 특히 라 투레트 수도원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르 코르뷔지에의 손길을 느낀 것은 멀고 지난한 길을 찾아온 보상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1176년에 지어진 ‘르 토로네’ 수도원이다. 프랑스 남쪽 프로방스의 울창한 계곡 숲속에 자리 잡은 ‘르 토로네’ 수도원은 실바칸, 세낭크와 함께 ‘프로방스의 세 자매’로 불리는 아름다운 수도원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1950년대 이곳에 머무르며 라 투레트 수도원을 설계했다. 그는 이 수도원에 깊은 감명을 받고 라 투레트의 설계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고 한다. 라 투레트 수도원은 예상대로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르 토로네 수도원이 주는 감동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파리와 뮌헨의 창연한 거리를 부유하듯 걸으며, 나는 그 이유에 대해 계속 생각해 보고 있다. 돌과 콘크리트라는 자재의 차이 때문일까, 아니면 시간의 힘, 혹은 단지 내 취향 때문일까. 건축에 문외한인 내가 겨우 며칠을 고민한다고 결론을 얻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결국 ‘개인’이 갖는 한계 때문이라는 데로 생각이 모아지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20세기가 낳은 천재가 분명하다. 롱샹이나 라 투레트는 그의 천재성을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두 건축물 모두 르 코르뷔지에라는 개인의 천재성을 드러내고 확인받기 위한 도구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에 비해 르 토로네 수도원에는 어느 특정한 개인의 자의식과 천재성이 보이지 않았다. 헌신, 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개인의 자의식과 천재성을 넘어서는 어떤 숭고한 대상과 목적에의 헌신이 느껴졌다.
나는 ‘개인’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소 소극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20세기는 ‘개인’을 발견하고 ‘개인’의 가치를 드러내는데 집중된 세기였다. 그것은 정치,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지만, 20세기 말에 이르러 일정한 한계와 부작용을 드러냈다. 개인에 대한 지나친 집중이 불러오는 다양한 부작용들을 목격하며, 나는 인간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것은 개인의 가장 깊숙한 곳이 아니라 그곳을 통과한 후 만나는 어떤 영적인 것, 그 영적인 것에 대한 헌신,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영적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종교적인 대상이나 철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가구를 만드는 목수다. 목수로서의 자의식을 갖게 된 후 목수라는 직업, 목공이라는 과정이 나라는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하고, 나의 내면으로 더 깊이 침잠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작업에 집중할수록 어떤 공허, 허무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 잦아졌다. 김윤관이라는 ‘개인’이 갖는 미약함을 절감하게 되었고, 내가 하는 일과 소망이 문득문득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나라는 한 개인이 갖는 사소함과 허망함을 이겨낼 어떤 영적인 목적과 경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아마도 르 토로네가 라 투레트보다 더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라 투레트가 르 코르뷔지에라는 개별적인 개인이 가진 천재성에 집중된 것에 비해 르 토로네는 개인을 넘어서는 영적이고 숭고한 요소를 보다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르 토로네와 라 투레트라는 위대한 건축물을 마음에 담고 유럽의 거리를 서성이며 나는 다시 개인을 넘어서는 영적인 것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김윤관 김윤관목가구공방 대표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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