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한국계 미국 영주권자 조승희가 총기를 난사해 32명이 숨졌을 때 이태식 당시 주미 한국대사는 “한국과 한국인을 대신해 유감과 사죄를 표한다”며 대한민국이 미국에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이 대사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자성해야 한다면서 32일 동안 금식하자고 제안했다. 정작 미국에서는 “한국과 무관한 일”이라는 데도 주미대사가 ‘우리가 잘못했으니 밥을 굶어야 한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 것은 미국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 어떤지를 잘 보여 준다.
▦ 2015년 3월 마크 리퍼트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피습을 당하자 한국인들이 잘못했다면서 석고대죄하고 위로의 춤을 춘 것도 비슷한 사례로 꼽힌다. 그런데 얼마 전 둘에 버금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특보가 북한이 핵ㆍ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과 의논해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축소할 수 있고, 사드 문제 때문에 한미동맹이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야당 등 보수세력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발언이 왜 문제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무조건 잘못됐다는 식이니 결국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 이런 분위기를 타고 잊혀진 인사들까지 나서고 있다. 황교안 전 총리는 “한미동맹을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라 했는데 그 역시 왜 부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윤창중씨는 자신이 “(문정인은) 권력이라는 술에 만취한 내재적 친북주의자”라고 쓴 글을 언론들이 뒤늦게 인용했다고 으쓱하더니 ‘미국, 한국을 버리다’는 글을 추가로 올렸다. 하지만 성추행 논란으로 나라 망신을 시킨 그가 가세하면서 보수 세력의 문정인 비판은 결국 코미디가 돼 버렸다.
▦ 따지고 보면 시작은 언론이다. 전문가 다수가 문 특보 발언에 동의하는 데도 일부 언론은 해서는 안될 말이라도 한 것처럼 몰아붙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격노했다거나 존 매케인 미국 상원 군사위원장이 한국 정부의 홀대 때문에 방한을 취소했다는 보도로 신뢰성과 오보 논란을 일으켰다. 덩달아 사대주의 논란도 이어졌다. 이를 두고 이래경 다른백년 이사장은 “이게 대한민국 언론이냐”고 분통을 터뜨렸고 문 특보와 함께 방미했던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한국 언론에 ‘싸대기’를 맞은 것 같다고 했다.
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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