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의 ‘규제 단두대’ 발언이 논란이 됐을 때 단두대의 역사를 들춰봤다. 그러다 오랜만에 가슴을 쿵덕쿵덕 뛰게 만드는 한 여성을 만났다. 프랑스 혁명기를 불꽃처럼 살다 간 ‘여성 혁명가’ 올랭프 드 구주(1748~1793)가 그 주인공이다.

모든 혁명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당대의 여성들은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도 그 결실을 나눠 갖지 못했다.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 의사 표현이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흐리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여성의 참정권 역사에 관심 있는 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이 말은 그가 1791년에 발표한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의 일부다. 여성이 정치적 발언을 하면 거리에서 옷을 벗겨 볼기를 치는 만행이 횡행하던 시절, “살림은 버려두고 감히 정치를 하려 했던” 그는 결국 왕정복권 선동죄를 덮어 쓰고 단두대에 올랐다. 혁명의 나라, 세계 최초로 노예제를 철폐한 이 나라 여성들은 150여년이 지난 1944년에야 연단에 오를 권리(참정권)를 얻었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의 저자 브누아트 그루는 그를 일컬어 “성차별주의가 인종차별주의의 한 변종임을 이해하고 여성 박해와 흑인 노예제도에 동시에 맞서 일어선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썼다. 여성과 노예뿐이 아니다. 그는 노인과 어린이, 사생아, 실업자 등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부당한 인식과 처우를 바꾸기 위해 싸웠다.

이국의 낯선 여성 혁명가를 새삼스레 불러낸 것은, 그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의 투쟁과 희생을 통해 정착한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너무도 쉽게 거스르는 일이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세계 인권의 날에 맞춰 선포될 예정이던 ‘서울시 인권헌장’이 성소수자 차별금지를 둘러싼 논란 끝에 무산된 사건 말이다.

인권헌장 제정은 ‘인권변호사’ 출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선거공약이었다. 몇몇 전문가들이 뚝딱 지어 내놓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주도해 더 의미가 컸다. 시민위원 공모에 1,500여명이 지원했고, 추첨을 거쳐 150명이 선발됐다. 전문위원 30명도 동참했다. 한 전문위원은 지난 4개월간 치열한 논의를 거쳐 50개항을 추려내는 과정 자체가 “인권 교육이자 감동적인 인권의 현장이었다”고 평했다. 그런데 차별금지 조항의 스무 가지 사유 가운데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보수 기독교인들이 결사 반대하며 논란이 벌어졌다.

시민위원회는 11월 28일 표결을 실시해 압도적인 찬성으로 이 조항이 포함된 원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합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효를 선언했다. 이 와중에 박 시장이 기독교단체 면담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소수자 단체들이 시청 점거농성에 나섰다. 박 시장이 10일 이들에게 사과하고 지속적인 의견 수렴을 약속하면서 농성은 풀렸지만, 그가 인권헌장을 다시 추진할 리는 없어 보인다.

“동성애를 지지 또는 반대한다”는 언명은 “여성이나 흑인의 존재를 지지 또는 반대한다”는 말처럼 성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에 속한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박 시장이 “제 삶을 송두리째 부정 당하는 상황”을 무릅쓰고, 게다가 매우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인권헌장을 무산시킨 까닭을 이해하기 어렵다. 동성애 혐오세력이 활개를 치는 현실에서 시민들의 만장일치로 인권헌장이 탄생하는 화기애애한 상황을 꿈꾸는 순진무구함이라니…. 대권 도전을 의식한 행보라는 해석이 유력한데, 그렇다면 더욱 혀를 찰 일이다. 후유증도 심각하다. 박 시장의 굴복을 받아낸 보수 기독교 세력이 다음 타깃으로 2012년 제정된 ‘광주시 인권헌장’ 흔들기에 나섰다고 한다.

박 시장이 인권헌장 제정을 손쉽고 의미 있는 이벤트 혹은 치적으로 생각했다면 자신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올랭프 드 구주의 삶을 찬찬히 되새겨 보길 바란다. 인권, 인간이기 때문에 누려야 할 권리의 저자인 벨덴 필즈의 말도 들려주고 싶다. “인권에 가담한다고 하면서 일관적이지 못하다면 인권에 전혀 가담하지 않은 것과 같다.”

이희정 논설위원 jaylee@hk.co.kr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api_db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