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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는 마음을 물려주신 어머니 ‘마미눈 공감교육’의 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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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는 마음을 물려주신 어머니 ‘마미눈 공감교육’의 원조

입력
2016.11.14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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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연숙 전(前) 대구남부교육지원청 교육장의 ‘나의 어머니’

권연숙 전(前) 대구남부교육지원청 교육장
권연숙 전(前) 대구남부교육지원청 교육장

“어머니, 들어가 주무세요!”

중고 시절, 어머니는 내가 잠들기 전까지 절대 잠자리에 눕지 않으셨다. 내 시험 기간에는 밤을 새기 일쑤였다. 어머니가 같이 밤을 샌다고 해서 나에게 큰 도움이 될 리는 없었지만, 어머니는 내가 아무리 “들어가 주무시라”고 해도 한사코 내 공부방 한켠을 지켰다. 뜨개질을 하시다가 때로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내 공부가 끝나실 기다리셨다.

그때는 어머니가 왜 저러실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것은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이자 공감이었다. 과외 선생님처럼 수학 문제 풀이를 돕거나 사회나 국어 시험에 나올 만한 내용을 집어준 것은 아니지만 힘들게 공부하는 딸과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을 공유하신 것, 그것이 어머니가 나에게 베푼 배려였다. 이를테면, 힘든 처지의 친구에게 “아이구, 얼마나 힘들까!” 하고 안타까운 한 마디를 토해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이 되는가. 어머니는 고된 시험공부의 동반자로 끝없이 힘겨워하는 막내딸에게 때때로 “에구, 자부럽제? 물 떠다 줄까?”라며 위로와 응원을 보내셨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한평생 그렇게 타인의 고통이나 고생을 넉넉히 이해하고 당신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하는 삶을 살아내셨다. 항상 다른 사람을 먼저 헤아리고 조용하고 은근한 격려와 응원을 보내어주셨다. 집안에 이런저런 풍파가 닥칠 때도, 어머니의 조용하지만 굳건하고 웅숭깊은 삶의 태도가 우리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 안동에서 알아주던 ‘골 기와집’

나의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부유한 편이였다. 중학교 때까지 260평이 넘는 넓은 집에서 살았다. 안동 율세동의 ‘골 기와집’으로 통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집안일을 도우는 아주머니들이 바쁘게 부엌과 거실을 오갔고, 그 즈음 흥행한 ‘여로’라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우리 집으로 모였다. 작은 극장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이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울고 웃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는 나를 불혹을 넘겨 낳으셨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령이었다. 당시 딸 셋에 아들 하나어어서 오매불망 아들 하나 더 가지기를 원하며 가진 아이였는데 딸이라서 아버지는 무척 섭섭해 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골 기와집’ 막내 공주로서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고등법원에서 집달리(執達吏)로 근무하셨다. 사진을 보면 집달리는 지방법원이나 지원에 배치되어 재판의 집행과 서류의 송달을 비롯해 기타 법령에 의한 사무를 행하는 단독제 독립기관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요즘은 집행관(執行官)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판검사나 변호사는 아니었지만 법률 자문을 자주 해주셨다. 어릴 때 들은 말이긴 하지만 “변호사나 판사보다 더 똑 부러지게 법해석을 해준다”는 이유에서였다. 뒤가 마려운 사람처럼 대문을 들어와서 허허, 웃으면서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을 숱하게 보았다.

직무 능력도 뛰어나셨던 듯하다. 아버지는 안동에서 일하시다가 차출이 되어서 대구고등법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 나도 따라왔는데, 그 덕에 내 이력에 삼덕초등학교 입학이라는 한 줄이 들어갔다. 아버지 덕분에 ‘대구 시내’에서 학교를 다니게 됐다고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아버지가 5.16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해고를 당했다. 대구 삼덕동을 떠나 우리는 다시 안동으로 이사를 했고 아버지는 사법서사 일을 하시며 지인이 권하는 택시운송 사업에 투자를 했다.

그 뒤로 집안에 본격적인 우환이 닥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투자하고 있던 택시운송업 사기를 당하여 주저앉았다. 결국 투자한 돈을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오빠의 사업도 부도났다. 오빠의 부도는 아버지에겐 여러 모로 큰 상실감을 준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이루지 못한 법관의 꿈을 아들을 통해 성취하려고 오빠를 성균관대 법대로 진학시켰다. 그런데 오빠는 사법고시를 마다하고 졸업하자마자 사업에 뛰어들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집을 담보로 신용보증기금에 서 빌려 준 것이었다. 이 사업이 실패했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셨을까.

사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오빠의 사업을 반대했다. “그 어렵고 위험한 일을 왜 하려느냐?”고 하셨다. 반면 어머니는 아들을 믿어주셨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니꺼. 놀러 다니러 돈 달라는 것도 아닌데 해 줍시다.”

어머니는 안동 여자답게 아들 사랑이 지극했다. 끝내 아버지를 설득시켰고 오빠는 집안에서 준 돈으로 사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급기야 아버지 사업 사기에 이어 오빠도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골 기와집’을 날릴 판이었다. 아버지는 집을 지키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셨지만 결국 넘겨주고 말았다. ‘골 기와집’을 떠나 이사를 간 것이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새로 이사 온 집은 이전 집의 1/10도 되지 않는 울퉁불퉁한 마루가 깔린 초라한 집이었다.

오빠 졸업식에서. 할머니까지 같이 가셔서 오빠의 졸업을 축하해주셨다.
오빠 졸업식에서. 할머니까지 같이 가셔서 오빠의 졸업을 축하해주셨다.

/그림 2가족 사진. 제일 앞줄에 앉은 소녀가 어린 시절의 나다.

안동 옛집에서 엄마와 포즈를 취했다.
안동 옛집에서 엄마와 포즈를 취했다.

- 장학금을 받아 생활비에 보태던 시절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어머니는 시집 온 후 한반도 해 본 적이 없는 걱정을 하셨다.

된장, 고추장 담글 때마다 콩이며 고추를 살 일을 걱정하셨다. “아이구, 장 담구어야 하는데!”, “ 아이구, 고추 사서 빻아 놓아야 하는데!” 한숨과 함께 새어나오는 어머니의 넋두리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고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이제 ‘노망이’가 나설 차례였다. ‘노망이’는 집안 어른들이 나를 부르는 별칭이었는데, 부모님이 ‘마흔이 넘은 나이에 노망 들어서 낳은 막내딸’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농촌지도소에서 운영하던 4H에 참여했다. 4H는 두뇌(head) · 마음(하트) · 손(hand) · 건강(health)의 약자로, 미국에서 처음 조직되었다. 청소년들이 농촌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고 창조적인 세대로 성장해서 지역과 나라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교육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4H에 지원한 이유는 장학금 때문이었다. 여기에 참여해 활동을 하면 참가자에게 직접 장학금을 지급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4H회원들은 농촌지도소에 모여서 공무원과 팀을 짠 뒤 인근 시골로 들어가 사람들을 모아서 다양한 교육을 했다. 글자를 모르는 분들에게는 글도 가르치고 때로 음식 만드는 법도 지도했다. 나는 된장 자장면 만드는 법을 개발해서 가르쳤다. 당시만 해도 자장면이 아주 귀한 음식이었다. 춘장을 직접 만들진 못하고 그와 유사한 된장으로 신 개념 자장면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급한 것이었다. 맛은 자장면에 못 미쳤지만, 주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말은 쉽지만, 현장은 힘들고 고단했다. 교육 장소로 가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재료와 각종 용기를 보따리에 싸서 농촌지도소에서 근무하는 아저씨와 함께 인근 시골을 방문했다. 차를 타고 간 것도 아니었다. 다방 배달 오토바이보다 조금 더 성능이 좋은 오토바이였다. 한손엔 보따리를 잡고 한 손으로 아저씨 허리춤을 부여잡고 포장도 안 된 도로를 쿨렁거리며 달려서 늦은 야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4H 장학금을 타면 나는 한푼도 빼지 않고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그 돈으로 고추사서 김장도 담그고, 콩 사서 된장, 고추장도 만들었다. 주위에서는 “그 집은 늦게 낳은 노망이 덕본다”라고 이웃 사람들이 많이 칭찬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창 예민한 때라 가세가 기울면 주눅이 들 법도 한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공부를 잘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다짐으로 공부에 전념했던 까닭이 아닐까?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줄곧 1,2등을 놓치지 않았다. 어머니 덕분이었다. 밤을 샐 때마다 옆에 계셔주신 것도 있지만, 나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동기를 심어주셨다.

중학교 시절 1등 성적표를 받아오면 부모님이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었다. 바로 위 언니가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부모님이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 아빠가 내가 공부하는 걸 이렇게 좋아하시는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모습 때문에 시작한 공부는 차차 나의 장기이자 자존심이 되었다. 내 앞에 누구라도 있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안동동부초, 안동여중, 안동여고를 거치면서 줄곧 1,2,3등을 놓치지 않았다.

여고 시절에 농촌지도소에서 운영하던 4H 운동에 참여했다.
여고 시절에 농촌지도소에서 운영하던 4H 운동에 참여했다.

- 소나무처럼 굳건하던 어머니

버티듯 일상을 꾸려가던 중에 더 큰 일이 닥쳤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옛 어른들이 “돈이 나가면 건강도 나간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몸에 마비가 온 뒤로 누워 계시는 시간이 많아졌다. 돈이 넉넉할 때면 이것저것 약도 사다드리고 치료도 했겠지만 이젠 말 그대로 남의 집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몸만 굳은 게 아니라 집안 자체가 옴짝달싹 못하고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잠을 줄여가며 아버지를 간호하셨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 걱정이셨지만, 나는 어머니가 더 걱정이었다. 사실 내가 어머니에 대한 걱정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집안이 아주 잘 나갈 때부터 말이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벌써 쉰을 넘기셨다. 당시는 쉰이라고 하면 노인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어머니에 비해 내 어머니는 할머니나 다름없었다. 혹시 엄마가 나만 남겨놓고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그럼 누가 나를 돌보지, 하는 생각이 늘 마음에 맴돌았다. 때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꿈에서 펑펑 울다가 깨곤 했다.

그러나 막상 집안이 힘들어지자 생각이 반대로 바뀌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러한 걱정은 접어두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태도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집안에 어떤 일이 있어도 큰 소리를 내거나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불평이란 여자들에겐 가장 익숙한 습관 같은 것이어서 조금만 힘들어도 입안으로 쏟아지기 마련이었지만, 나는 어머니의 입에서 불평이 흘러나오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진정, 단 한번도!

어머니는 생각하면 절벽에 뿌리를 박고 눈을 뒤집어쓰고서도 그 푸른빛을 전혀 잃지 않는 노송을 떠올린다. 철이 들고 나서 보니 그 굳건하고 강인한 태도가 얼마나 든든한지, 내가 진정으로 어머니를 존경한 것은 그 즈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어린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가 기관지 병을 앓았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가래침을 뱉었다. 할머니 방에는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시며 식사 수발에 병간호까지 모두 하셨는데, 그 시간이 3년을 넘었다. 어머니는 그 시간 동안 우리 앞에서 한번도 낯을 찡그리거나 불평의 말을 하지 않으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에게 적잖게 감동했다. 그러면서 가족에 대한 헌신을 배웠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그릇 보따리를 들고 시골로 다니며 4H 운동에 참여한 것도 어머니가 몸소 보여준 가족들에 대한 헌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교정에서 어머니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교정에서 어머니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 교재가 없어서 친구에게 책 빌려 시험공부

고등학교가 끝나갈 무렵 어머니는 막내딸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하셨다. 밤마다 교자상 차고 앉아 공부하는 나에게 “너를 대학에 보내야 하는데” 하시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걱정을 하였다. 어머니가 나의 대학 진학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편찮으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활비가 더 문제라고 여겼다. 나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그냥 농협중앙회 같은 곳에 취직하고 싶었다. 남들처럼 실력에 맞춰 진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직업을 선택하든지 전액 장학금을 받는 대학으로의 선택이었다.

어머니는 막내딸의 꿈이 신문기자나 방송국 PD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욱 안타까워하셨다. 고3 후반기 동안 어머니는 이 막내딸 눈치만 살피며 말을 아끼셨다. “내가 해 줄 게 없구나” 하는 말씀을 간혹 하셨을 뿐이다.

내가 생각해도 성적이 아까웠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우등생 소리를 들었고, 3학년 때는 학생회장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면 장학생을 선발하는 학교들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마침 부산대학교 사대에서 전면장학생을 뽑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교육감 추천서가 필요했다. 나는 안동에서 혼자 대구에 내려와 그 당시 경북교육청을 찾아갔다. 교육감 추천서를 받아내긴 했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전체 사대 학생 중 단 한 명만 해당하는 장학혜택이었던 지라 경쟁률이 너무 치열했다.

4년제 대학을 포기하고 할 수 없이 안동교대를 지망했다. 그때는 장학금도 장학금이지만 집에서 다닐 수 있으니 숙식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원서를 썼는데, 돌이켜보면 여러 모로 정말 선택을 잘했던 것 같다. 지금의 ‘권연숙’을 있게 한 가장 결정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까?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초등학생 개인지도를 해서 그걸로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했다. 이러한 모습에 주변 어른들이 “노망이는 사막에 갖다 놔도 살아남을 애다”면서 기특해 했다. 과외지도로 번 돈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나면 대학 교제 살 돈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강의만 듣고 시험을 칠 수는 없었다. 나만의 ‘공부 우물’을 파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친구와 함께 공부하기’였다. 친한 친구네 집에 가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너 혹시 교육심리 과목 공부 다 했어? 다 했으면 책 좀 빌려줘.”

친구가 공부를 마친 과목 교재를 빌려서 공부를 했었다. 어차피 한꺼번에 모든 과목을 다 공부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친구도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수십 년이 흐른 후에 그 얘길 했더니 그 친구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 난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생각건대, 내 태도가 워낙 구김살 없고 당당하다 보니 친구는 내가 책이 없어서 빌리러 왔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1학년은 그렇게 버티고 2학년 때는 책을 샀다. 바로 위에 언니가 취직을 해서 보태준 덕분이었다.

1학년 때 시험공부를 제대로 못한 까닭에 1등을 놓치고 5등으로 밀려났다.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어머니는 “막내야, 뭔 소리고? 괜찮다. 그게 어디라고! 책도 없이 1년을 보낸 학생이 그보다 우예 더 잘하겠노!” 라며 격려하셨다.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 교사 적체 현상이 심했다. 보통 3~4년을 기다려 발령이 났다. 단, 예외로 상위 5%는 바로 발령을 내려줬다. 그 덕분에 곧바로 교단에 설 수 있었다. 그것도 ‘대도시’에 있는 대구비산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 어머니 “젊을 때 즐겁게 놀거라!”

방을 얻을 형편이 못 되어서 큰언니의 친구 집에 살았다. 그 집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사내아이가 둘 있었는데, 그 아이들 개인지도를 해주기로 하고 숙식을 제공받은 것이었다. 돈을 아낄 수 있었다. 그때 봉급이 4만 2천 원, 나는 2천원은 생활비로 쓰고 4만원은 집에 부쳤다.

아버지 약도 짓고 어머니 메주걱정, 김장걱정을 덜어드렸다.

얼마 후 언니가 시집갈 나이가 됐다. 어머니 걱정이 또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혼수가 만만찮았다.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았는데, 그게 다 돈이었다. 나는 같은 학교 선생님들이 하시는 일명 친목계에 들었다. 곗돈을 제일 먼저 타서 언니에게 주어 혼수를 장만하게 했다. 곗돈은 열두 달 동안 내가 메꾸었다. 그 때 어머니는 “고생한다”면서 나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부모가 할 일을 우리 막내가 대신해서 하는구나…….”

비산초등학교에서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2년째 되던 해에 교감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유난히 나에게 친절하셨다. 가끔 교사들을 당신의 집에 초대하셨는데, 선생님들이 새까만 신규선생인 나에게 “너도 꼭 가봐야 한다”면서 손을 잡아 끌었다.

그 이유는 얼마 안 가서 알게 되었다. 교감선생님이 나를 며느리 감으로 점 찍은 것이었다.

그 덕분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이를테면, 남편보다 시아버지를 먼저 알게 된 것이었다. 남편도 효자였던 지라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시는 아가씨를 거절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보다 본인 마음에 쏙 들어서 나를 만난 것이겠지만. 그렇게 4년 정도 만나다가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어머니를 대구로 모셔왔다. 아버지는 그 사이 유명을 달리하셨고, 어머니 혼자 안동에서 집을 지키고 계셨다. 연로하기도 하셨지만, 자식도 많은데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으면 얼마나 적적할까 싶었던 거였다.

사실은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맞벌이 부부였던 까닭에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한 일이지만, 어머니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건강이 약하셨다면 대구로 오시라는 말을 못했을 것이다. 칠십을 넘기셨는데도 오십 대 못잖게 정정하셨다.

이해심도 넓으셨다. 평소 말이 많거나 싹싹하지 않으셨지만, 늘 다른 사람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공감을 하셨다.

간혹 부부끼리 주말 나들이를 나갈 때가 있었다. 맞벌이로 바빴던 까닭에 평소 같이 보내는 시간이 적었다. 주말에라도 보충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였다. 주중 내내 아이들을 돌보다가 주말까지 쉬지 못하게 하는 게 죄송스러워 말을 못 꺼내고 주뼛거리고 있으면 어머니는 금세 눈치를 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젊었을 때 재밌게 놀아야지. 그게 인생에 대한 예의다. 얼른 가거라. 애들은 내가 볼게.”

시골 할머니였지만 사위와도 허물없이 지냈다. 남편의 성격이 서글서글한 것도 한몫을 했겠지만 어머니가 마음을 열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으리라. 남편은 살짝 취한 날이면 어머니와 함께 노들강변 노랫가락을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어머니는 맨 정신으로도 사위와 함께 어깨춤을 추면서 장단을 잘 맞추었다. 화사하게 웃으며 즐거운 표정으로 목청 높여 노래하시던 모습은 장모 생각하는 사위의 마음에 대한 감사이자 배려이셨다.

나중에 고향 어르신들에게 들어서 안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늘 다른 사람의 사정을 헤아렸다. 언뜻 무덤덤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누군가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면 아버지가 “너무 퍼준다”고 걱정하실 정도로 잘 베푸셨다. 그 모든 것이 타인의 마음에 민감한 공감 능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교직경력 42여년 중 교사 25년 경력을 제외하고 교육전문직으로 교육정책을 입안하는 장학진에서 근무했다. 어머니가 나에게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열정’으로, 자리를 옮길 때 마다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를 반문하며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고 애썼다.

그동안 내가 기획, 추진한 다양한 교육시책 중 국민운동으로 확대하고 싶은 아이템은 시교육청 기획과장으로 재직한 2012년부터 시작한 ‘마미눈 행복공감교육’이다. 나는 행복이 트랜드이고 가치인 시대에 발맞춰 행복과 교육을 접목하여 연구하는 가운데 행복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긍정적 인간관계 형성을 위한 공감교육이란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 인식을 바탕으로 ‘마미눈’을 만든 것이었다. 마미눈은 ‘공감형 인간됨의 교육’을 비전으로 삼아, 공감 3행동 즉, 마음, 미소, 눈맞춤(마미눈)을 통해 공감형 인재로 성장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마미눈은 특허청에서 특허를 얻기도 했으며, 남부교육청 초, 중학교, 교사, 학부모를 대상으로 공감을 통한 인성 교육의 장을 열었다. 이후 경동초 교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마미눈 UCC 확산, 마미눈 인사, 마미눈 콘서트, 마미눈 2분 명상, 마미눈 1분 스피치 등 공감행동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아이들과 학부모 사이에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힘차게 확산되는 분위기다.

나는 이 ‘마미눈 행복공감교육’의 원류가 바로 어머니의 공감의 정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음을 열고 미소 지으면서 상대의 눈을 맞추며 상대의 마음을 읽자는 것은 결국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 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자는 뜻이다. 어머니가 평생 삶으로 실천하신 공감의 감성을 형식이라는 옷을 입혀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마미눈’을 제일 먼저 창안하고 실천하신 분은 내 어머니인 것이다.

- 비행기 보시며 “우리 아들 좀 데리고 오소!”

사위와 그렇게 사이 좋게 지내셨지만 어머니는 늘 마음 한 구석에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살았다. 오빠는 사업에 실패한 후 처자 식구들과 함께 호주로 이민을 갔다.

“보소, 비행사 양반, 우리 아들 좀 데리고 오소.”

어머니는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베란다에 나와서 늘 혼자서 저렇게 중얼거리셨다. 때로 오빠를 원망하는 말을 하기도 하셨다.

“아이고 이놈아, 이 늙은 엄마를 두고 어떻게 너 혼자 그렇게 타국만리 먼 곳으로 훌쩍 떠나노!” 언뜻 불평처럼 들리지만 불평이라기보다 원망처럼 깊어진 그리움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어머니는 비행기만 보면 호주로 떠난 아들이 그리워 탄식을 하셨다.
어머니는 비행기만 보면 호주로 떠난 아들이 그리워 탄식을 하셨다.

오빠와 통화를 하면 가끔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한국 멸치나 김, 명란젓 따위가 그렇게 당긴다고 했다. 어머니는 사위가 주는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멸치나 젓갈을 사서는 호주로 부쳤다. 그것도 배편으로 부치면 상할까봐 꼭 항공편으로 부쳤다. 나는 간혹 어머니를 타박했다.

“엄마, 아들만 자식이야? 같이 사는 딸 생각도 좀 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면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조금이라도 삭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을 거였다. 어머니의 아들 사랑은 그저 안동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내게 오빠가 하나 더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훌쩍 떠난 오빠였다.

6.25전에 안동까지 빨치산이 내려왔다. 그때 국군이 시내 초등학교 운동장에 주둔하면서 빨치산 토벌을 했다. 군인들은 주둔하는 학교운동장에서 산(학가산)으로 포탄을 쏘곤 했는데, 한번은 오발탄이 우리 집 앞 전봇대 앞에 떨어지고 말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가족 대부분이 포탄의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솜옷을 입고 있어서 그저 가슴 피부가 긁히는 데서 그쳤고, 언니는 허벅지에 파편이 꽂히는 바람에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가장 큰 부상을 당한 사람은 그 오빠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병원에 데려갔을 땐 과다 출혈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때 오빠의 나이가 7살이었다.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 난 뒤 어머니의 아들 사랑은 유별스러워졌다. 어머니의 아들 사랑이란 움푹 팬 상처까지 품고 있는 것이어서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처절한 것이었다. 그러니 나의 ‘얕은’ 타박이 어머니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1996년, 어머니는 몸져누우셨다. 아버지처럼 고혈압 때문에 팔과 다리에 약한 마비가 오셨다. 그때 호주에 있는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몸의 병보다 원망 같은 그리움이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빠 엄마가 많이 안 좋아. 마지막 몇 계절을 남기신 것 같아. 아들하고 손자 실컷 볼 기회를 드려야 할 것 같아. 엄마가 혼자 있을 땐 늘 오빠 사진하고 손자들 사진만 쳐다봐. 손으로 쓰다듬으시면서 말야…….”

이듬해 오빠는 어머니를 호주로 모시고 갔다. 호주에서 2년을 보내시다가 거기에서 운명하셨다. 한국에 시신이 도착했을 때 언니들과 함께 관을 열어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토록 연민했던 아들과 며느리, 손자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호흡을 내쉬었을 어머니, 더 이상 원이 없으셨을 것이다. 살아 있는 아들은 실컷 봤으니, 이제는 먼저 간 아들을 보러 가야지, 그렇게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지 않으셨을까.

- 어머니가 보여준 공감의 삶,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강산이 한번 바뀌고, 다시 한번 더 바뀐다는 즈음을 몇 해 앞두고 있다. 어머니가 떠난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내 마음 속엔 아직도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만큼이나 생생하다.

대구에 발령이 난 몇 해를 제외하면 늘 함께하셨던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 어머니가 보여준 공감의 삶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도 그랬지만,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나는 어떤 일을 하든, 무슨 일을 겪든, 밤샘을 하는 딸 옆에서 같이 밤을 새우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늘 그렇게 말없이 딸을 응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보다 더 훌륭한 교육이 있을까. 한 마디 말도 없이 내 마음에 평생 기댈 가장 든든한 언덕을 쌓은 셈이니까.

교육자로서의 내 모습을 돌이켜보면, 공부는 내가 훨씬 많이 했지만 어머니보다 낫다는 말은 감히 못하겠다. 오히려, 교육학을 전혀 배우지 않으셨던 분이 어떻게 한 인간에게, 혹은 한 인격에게 그토록 훌륭한 교육을 베푸셨을까. 어머니의 위대함에 조금이라도 근접하기 위하여 몸부림 친 것이 그것이 내 교단 이력의 전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내 어머니는 그 어떤 어머니보다 위대하다. 그것이 내가 어머니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다. 소망이 있다면 그 위대한 인격의 면모가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전해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길 소망한다. 간절히, 진정으로 간절히…….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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