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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없는 국정원"... 탄식을 부르는 다큐 '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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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없는 국정원"... 탄식을 부르는 다큐 '자백'

입력
2016.10.14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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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에서 뉴스타파의 최승호 PD(맨 왼쪽)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만나 간첩조작 사건에 대해 묻고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에서 뉴스타파의 최승호 PD(맨 왼쪽)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만나 간첩조작 사건에 대해 묻고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아이고 웃기고 있네!” “어이가 없다, 없어!”

13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멀티플렉스에서는 냉소 어린 탄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대형 스크린에는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든 우산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클로즈업 됐다.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몰아간 국정원의 수장이었던 원 전 원장은 사과를 요구하는 취재진을 외면했다. 대신 취재진에 의해 우산이 들춰지자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고 있었다. 관객들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은 국정원의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의 개봉일이다. 상영관의 80% 이상 좌석을 차지한 관객들은 상영시간 100여분 내내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만도 했다. 2012년 탈북한 화교 출신의 유우성씨가 간접으로 몰리면서 국정원이 내민 증거는 여동생 유가려씨의 증언뿐이었다. 그는 영화 속에서 “오빠와 잘 살게 해주겠다는 (국정원 직원들의)말에 거짓 증언을 했다”고 울면서 인터뷰를 했다. 위증을 했다고 검사에게 말했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고 말한 게 유가려씨의 자백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 정부에 의해 추방됐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유우성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국정원이 그를 간첩으로 몰아간 행적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유가려씨의 거짓 자백을 공모한 국정원 직원과 검사 등은 가벼운 형량으로 ‘웃으며’ 법정을 빠져 나왔다. ‘정의는 승리한다’는 사회적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이들의 뻔뻔한 퇴장은 그간 어느 언론에서도 보여진 적 없는 모습이었다.

대안언론을 표방하는 독립방송 뉴스타파의 최승호 PD가 지난 3년 동안 국정원이 공모한 서울시공무원간첩조작 사건을 파헤쳤다. 국정원이 조작한 정황을 조목조목 좇았다. 국정원은 유우성씨가 두 차례 북한에 오가며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협조해 간첩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검사는 중국 공안국에서 확인해줬다는 서류를 증거로 내밀었다. 유씨가 북한에 들어갔다는 행적이 기록돼 있었다. 공안국의 직인까지 찍혀 있는 서류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최 PD는 중국으로 직접 건너가 서류의 진위 여부를 추적했다. 결국 중국 당국은 공안국과 중국대사관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서류가 조작된 것이라고 최종 통보했다. 더불어 누가 조작한 것인지 한국의 법원이 밝혀달라는 내용까지 첨부됐다.

그간 의혹만 무성했던 국정원의 간첩 조작 혐의가 사실로 밝혀지면서 한국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정작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은 국정원이나 검사, 더 나아가 정부로부터 그 어떤 사과도 받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을 지냈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최승호 PD가 우연히 만나 인터뷰하는 장면을 담고 있기도 하다. 엣나인필름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을 지냈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최승호 PD가 우연히 만나 인터뷰하는 장면을 담고 있기도 하다. 엣나인필름 제공

‘자백’은 1970년대 박정희 정부시절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을 지내며 간첩 잡기에 나섰던 김기춘 전 청와대비서실장에게도 카메라를 들이댄다.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는 그를 공항에서 포착한 최 PD는 김 전 비서실장의 지휘하에 조작된 혐의가 짙은 간첩사건에 대해 캐묻는다. 그러나 김 전 비서실장은 원 전 원장과 같이 “할 말이 없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며 자리를 피한다. 5분여 동안 이어지는 최 PD와 김 전 비서실장의 실랑이는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권력자들의 민낯을 들춰낸다. “나는 간첩을 조작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문 김 전 실장에게 최 PD는 일갈을 가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한 분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하셔야 한다!”고. 그러나 앞만 응시한 채 묵묵부답만으로 일관하는 김 전 실장의 모습이 스크린을 채운다.

70년대 간첩으로 몰렸던 피해자들의 모습도 먹먹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국정원에서 당한 고문 등으로 여전히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70대 노인이 된 이들에게 국가는 대체 어떤 존재인지 되묻는다. “한국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무섭고 슬프다”를 되뇌는, 백발 노인이 된 피해자의 독백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최승호(맨 왼쪽) PD는 다큐 영화 ‘자백’을 통해 70년대 한국 정부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던 피해자들을 직접 만났다. 엣나인필름 제공
최승호(맨 왼쪽) PD는 다큐 영화 ‘자백’을 통해 70년대 한국 정부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던 피해자들을 직접 만났다. 엣나인필름 제공

친구와 함께 영화관을 찾은 박수희(27)씨는 “추악한 국정원과 검사들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과연 내가 국가를 믿고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고 영화를 본 소감을 말했다. 박찬영(56)씨는 “공포영화보다 무서운, 지독히 포악한 악마들을 엿본 느낌”이라고 밝혔다.

‘자백’은 엔딩크레딧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영화다. 1950년대부터 정부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유죄판결을 받았던 피해자들이 재심에서 무죄로 판결된 100여건의 사례들이 촘촘하게 스크린에 나열되기 때문이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백’을 지원한 3만여 명의 후원자 이름이 10여분 간 올라가는 부분은 압권이다. ‘개인 소장’으로 남기겠다며 극장 관람 매너를 어기면서까지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댄 관객들을 어찌 탓할 수 있을까. 15세 관람가.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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