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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을 ‘시’로 저격한 靑 비서관… ‘답시’로 맞받아친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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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을 ‘시’로 저격한 靑 비서관… ‘답시’로 맞받아친 진중권

입력
2020.06.1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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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10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민의당 '온 국민 공부방'에서 '우리 시대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뉴스1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10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민의당 '온 국민 공부방'에서 '우리 시대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책임지는 신동호 청와대 연설비서관이 11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를 ‘시’로 저격했다. 그는 페이스북에 ‘빈 꽃밭(부제: 기형도의 빈집을 기리며)’라는 제목의 시를 올려, 연일 여권을 향해 날을 세우는 진 전 교수를 진보 지식인의 타락에 빗댔다. “어느 날 아이가 꽃을 꺾자/ 일군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아이는 더 많은 꽃을 꺾었고/ 급기야 자기 마음 속 꽃을 꺾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아이는 진 전 교수를 가리키는 듯 하다.

진 전 교수는 즉각 ‘답시’로 응수했다. 제목은 ‘빈 똥 밭’이고, 부제는 ‘신동호의 빈꽃밭을 기리며’다. “같이 똥 쌀 줄 알았던 아이가 똥을 치우니/ 그가 운다, 몹쓸 공부여 잘 가거라며 (…) 청결을 향해 걷는 길에 아이는/ 결국 청소하다가 지쳐 주저 앉았지만/ 똥을 잃고도, 파리들은 울지 않는다. 아직 남은 똥 많다며 울지 않는다.”

신 비서관은 문 대통령 취임 이후 현재까지 문 대통령의 연설문을 맡고 있다. 문 대통령이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을 때부터 호흡을 맞췄다. 강원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4년 ‘오래된 이야기’로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 시인이다.

진 전 교수는 페이스북에 답시를 게재하기 전 “예의상 답시를 써 드려야겠다”며 말했다. “저도 한때 시인이 되려고 했었죠. 직접 쓰기도 했는데, 아니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시의 제목만 듣고 다들 웃는 바람에 시인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두 인사의 ‘시’ 대결은 공교롭게도 진 전 교수가 전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민의당 주최로 열린 세미나의 강연자로 나서 문 대통령의 연설문을 비판한 다음날 이뤄졌다. 진 전 교수는 강연에서 “요즘 노무현 전 대통령 연설문을 보는데 이분은 정말 참 많은 고민을 했다는 걸 느끼는데 문 대통령을 보면 그게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됐던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신 비서관은 지난 2월 SNS에 스위스 화가인 파울 클레가 1920년대에 그린 ‘새로운 천사’(지상으로 추방된 천사)를 소개하며 “작은 승리를 큰 승리로 착각한 자들에 의해 파국이 시작된다. (…) 미학자 진중권은 ‘새로운 천사’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원래 한 몸이었으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둘로 쪼개져야 했던 자신의 반쪽같은 느낌’이라고”라고 썼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이 칼럼 ‘민주당만 빼고’를 쓴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를 검찰에 고발한 것과 같은 여권의 행보를 비판한 글이란 해석이 많았으나, 진 전 교수를 겨냥한 글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다음은 두 시의 전문.

◆빈 꽃밭

- 기형도의 빈집을 기리며

(어느 날 아이가 꽃을 꺾자

일군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아이는 더 많은 꽃을 꺾었고

급기야 자기 마음속 꽃을 꺾어버리고 말았다)

꽃을 잃고, 나는 운다

문자향이여 안녕,

그림은 그림일 뿐, 너를 위해 비워둔 여백들아

도자기 하나를 위해 가마로 기어들어 간

예술혼이여 맘껏 슬퍼해라

꽃을 피워야할 당신이 꽃을 꺾고

나는 운다, 헛된 공부여 잘 가거라

즐거움(樂)에 풀(艸)을 붙여 약(藥)을 만든

가엾은 내 사랑 꽃밭 서성이고

울고 웃다가, 웃다가 울고 마는 우리들아

통념을 깨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부조화도, 때론 추한 것도 우리들의 것이었다

숭고를 향해 걷는 길에 당신은

결국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지만

꽃을 잃고, 우리는 울지 않는다.

-신동호

◆빈 똥밭

-신동호의 빈꽃밭을 기리며

어느날 아이가 똥을 치우자

일군의 파리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이는 더 많은 똥을 치웠고

급기야 그들 마음 속의 똥을 치워버리고 말았다.

똥을 잃은 그가 운다

똥냄새여 안녕,

그림은 그림일 뿐, 너를 위해 비워둔 여백들이여

출세 하나를 위해 기와집으로 기어들어 간

예술혼이여 맘껏 슬퍼해라

같이 쌀 줄 알았던 아이가 똥을 치우니

그가 운다, 몹쓸 공부는 잘 가라며

쌀(米)을 바꿔(異) 똥(糞)을 만든

가엾은 네 사랑 똥밭 서성이고

울고 웃다가, 웃다가 울고 마는 파리들아

똥냄새 나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추한 똥도, 때론 설사 똥도 그들의 것이었다

청결을 향해 걷는 길에 아이는

결국 청소하다가 지쳐 주저앉았지만

똥을 잃고도, 파리들은 울지 않는다.

똥 쌀 놈은 많다며 울지 않는다.

아이는 문득 기형도가 불쌍해졌다.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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