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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도 꼼짝 못한 ‘박정희 정부 실세’ 故 김정렴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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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도 꼼짝 못한 ‘박정희 정부 실세’ 故 김정렴은 누구

입력
2020.04.26 17:22
수정
2020.04.2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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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서울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ㆍ도서관 개관식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현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참석해 김정렴 기념사업회장과 대화 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inliner@hk.co.kr
2012년 2월 서울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ㆍ도서관 개관식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현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참석해 김정렴 기념사업회장과 대화 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inliner@hk.co.kr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96세. 고인은 역대 정부를 통틀어 최장수 대통령 비서실장 재임 기록을 갖고 있다.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역대 최장수인 9년 3개월 간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아 고도성장의 기틀을 닦은 한국경제의 산파로 평가된다.

1969년 3선 개헌안이 통과되고 정일권 내각이 새 체제를 위해 일괄사표를 제출한 직후, 박 대통령이 상공부 장관이던 그를 청와대로 불렀다. 김 회장은 자신의 회고록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서 청와대로 불려가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모릅니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박 대통령이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고 경제가 잘돼야 정치·국방도 튼튼하게 할 수 있다”면서 설득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또 정치회고록 ‘아, 박정희’에서 “청와대 비서실을 구성하는 수석비서관ㆍ비서관ㆍ행정관은 대통령의 그림자처럼 행동해야 하고, 대통령이란 큰 나무의 그늘에서 존재가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일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그늘을 벗어나 양지로 나와 존재를 과시하면 안 된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고인은 청와대 비서실이 외부에 권력기관으로 비치는 것도 경계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비서실 사람들은 기자회견이나 강연 같은 것에 임해선 안 된다”며 “명함 만드는 일도, 청와대 마크가 새겨진 봉투를 바깥에 갖고 나가는 것도 삼가야 한다”고 했다. 청와대가 새겨진 명함을 받은 사람이 이를 엉뚱한 곳에 이용할 우려가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고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김 회장을 두고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차지철과 김재규가 비서실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원로들은 지금도 “김 회장이 청와대에 계속 있었다면 10ㆍ26 사태는 없었을 수도 있었다”고 안타까워 한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이 숨진 10ㆍ26 사태는 김 회장이 비서실장에서 물러나고 10개월 후에 일어났다.

1924년생인 고인은 19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했다. 이후 강제징집돼 일본군에 배속됐다가 히로시마에서 일제 패망을 맞았다. 당시 미군이 투하한 원자폭탄의 영향으로 후유증을 앓았다. 6ㆍ25 전쟁에 참전한 뒤 1952년 예편한 고인은 한국은행으로 돌아와 1차 화폐개혁에 참여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59년 재무부로 옮긴 뒤 정통 경제관료의 길을 걸었다. 재무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지낸 뒤 1969년부터 1978년까지 9년 3개월 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서희 기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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