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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헤시라스호’ 이름은 왜 김정숙 여사가 불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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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헤시라스호’ 이름은 왜 김정숙 여사가 불렀을까

입력
2020.04.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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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여사가 23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열린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알헤시라스'호(2만4천TEU급) 명명식에 참석해 명명줄을 자르고 있다. 거제=연합뉴스
김정숙 여사가 23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열린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알헤시라스'호(2만4천TEU급) 명명식에 참석해 명명줄을 자르고 있다. 거제=연합뉴스

“이 배를 알헤시라스호로 명명(命名)합니다. 이 배와 항해하는 승무원 모두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합니다.”

23일 오후 경남 거제의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첫 출항을 하루 앞둔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알헤시라스’호 명명식이 열렸다. ‘알헤라시스’라는 이름을 부르고, 안전 항해의 바람을 담은 송사를 한 건 김정숙 여사였다. ‘알헤라시스’는 유럽대륙 최남단인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 이름이다.

김 여사는 송사를 마친 뒤 선체와 선대를 연결하는 ‘명명줄’을 잘랐고, 액운을 쫓는다는 의미의 ‘샴페인 브레이킹’(샴페인 병을 선체에 터뜨리는 의식)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축사는 이후 진행됐다.

대통령 참석 행사의 ‘주인공’이 통상 대통령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명명식’의 핵심인 ‘명명’을 김 여사가 한 것에 고개를 갸우뚱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청와대는 “명명식 행사는 조선소에서 건조한 선박을 선주에게 인도하기 전 선박의 이름을 붙여주는 행사”라며 “거친 바다와 싸우는 선박과 선원들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여성이 선박에 연결된 줄을 끊고 샴페인을 깨뜨리는 역할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금지하는 일부 국가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선박 명명의 주체를 여성으로 한다. 김 여사가 나선 것이 특별하거나 이례적인 장면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성평등의 관점에선 재고할 여지가 있는 관례다.

23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명명식 축사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뒤로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알헤시라스'호가 보이고 있다. 거제=연합뉴스
23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명명식 축사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뒤로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알헤시라스'호가 보이고 있다. 거제=연합뉴스

 

 ◇선박 명명은 왜 여자가? 

배에 이름을 붙이는 여성은 ‘대모(代母ㆍGodmother)’ 또는 ‘스폰서’라 부른다. 기록상으론 19세기 영국 왕 조지3세가 1811년 건조한 해군함정의 이름을 짓는 기회를 딸에게 준 것이 관례의 시작이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 바이킹 의식이 있다는 게 다수설이다. 중세 바이킹족은 새로 만든 배를 바다에 띄우기 전 선박과 선원의 안전을 기원하며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러한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게 통설이다.

일각에서는 선박에 묶인 밧줄을 자르는 행위가 어머니와 뱃속 아기를 연결하는 탯줄을 끊는 행위와 비슷하기 때문에, 명명식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내세우는 게 아니냐고 보기도 한다. 영어권 국가에서 배를 ‘She’(여자)로 표현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배를 여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천주교의 세례의식처럼 여자를 대모로 세운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여성이 선박 이름을 지어주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남성이 서는 것은 이따금 화제가 됐다. 2008년 1월 14일에 보도된 기사들을 보면, 현대중공업은 6,900TEU급 컨테이너선 명명식에서 쿠웨이트 선주사인 UASC사의 부회장 오스만 이브라힘 알 이사에게 선박 명명을 맡겼는데, 언론들은 이 사람이 남성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남성이 ‘대모’로 나선 것 장면이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제한하는 국가여서 남성이 전면에 선 것으로 해석됐다.

2001년 9월 이희호 여사가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열린 일본 NYK선박 명명식에서 선박 이름을 명명한 후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1년 9월 이희호 여사가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열린 일본 NYK선박 명명식에서 선박 이름을 명명한 후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역대 대통령 부인들도 참석했지만… 

선박 명명식 행사엔 역대 영부인들도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2005년 11월엔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가 유조선인 ‘유니버셜퀸’호의 대모가 됐다. 해당 선박은 ‘선박투자회사제도’를 활용해 건조된 첫 번째 선박이라 의미가 컸다. 선박투자회사제도는 일반 국민과 기관투자가로부터 모은 자금으로 선박을 건조해 선박운항회사에 빌려 주고, 그 대가를 투자자들에게 배당하는 제도다. 당시 권 여사는 축사에서 “노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 재임 시 도입을 추진한 것이어서 더욱 각별한 감회를 느낀다”고 말했다.

고(故) 이희호 여사도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1년 9월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에서 열린 일본 NYK선박 명명식에 참석했다. 이 여사는 이 자리에서 “이번 명명식이 한일 양국의 우호협력 관계증진에 이바지하게 되기를 바란다”며 “조선산업이 국가경제를 선도하고 국가발전의 굳건한 초석이 되기 위해 앞으로도 참석자들이 연구와 개발을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외국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는 2015년 미군의 공격형 핵잠수함에 ‘일리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리노이 주 시카고 출신인 미셸 여사는 연설에서 잠수함의 기능을 설명하며 “(전자제품판매점인) 베스트바이를 파산시킬 정도로 많은 고해상도 모니터가 장착돼있다”고 말해 청중들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선박 이름을 여성이 호명한다는 것이 아주 특별하거나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래 해오던 것이므로,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가 행하는 의식이라는 이유로 어떠한 문제제기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녀를 바다에 바치는 의식’이 뿌리라면 더더욱 그렇다.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바다는 남성, 배는 여성’ 등 남녀를 메타포로 하는 관행이 오랫동안 이어져온 측면이 있다”며 “기존의 젠더 규칙, 시스템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이 많아진 만큼, (정치권 등에서도) 당연하게 생각해온 것들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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