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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째 벌이가 없어…” 코로나發 생계 위협에 시름 깊은 구룡마을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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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째 벌이가 없어…” 코로나發 생계 위협에 시름 깊은 구룡마을 가보니

입력
2020.03.23 01:00
수정
2020.03.23 19:44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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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직 많은 강남 판자촌… “뽑는 데 없어” “남편 병원비 걱정”

4,5가구 공용 화장실 써 위생 취약… 확진자 발생 땐 일파만파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르포. 이승엽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르포. 이승엽 기자

전국에 강풍이 몰아친 지난 19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초입.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외제차가 수없이 드나드는 길 건너 개포동의 고층 아파트 단지와 달리 수백 채의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은 구룡마을은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골목이 어찌나 비좁은지, 허리를 굽히거나 옆으로 몸을 틀어야 할 정도였다. 강풍에도 연탄가스 때문인지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집들이 눈에 띄었다. 문이라고 해야 자물쇠도 없는 조악한 나무 판자에 불과해 강풍에 날아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판잣집 내부는 더욱 열악했다. 20년째 구룡마을에 혼자 살고 있다는 김숙자(80)씨의 5평짜리 판잣집 안으로 들어서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움푹 휘어진 천장 위에선 쥐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신종 코로나 사태가 터진 이후 영세민들을 위한 일자리마저 끊겨 김씨는 한 달째 바깥출입을 못 하고 있다. “신천지가 무서워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교회도 못 가고 있다”는 김씨는 “끼니는 집에 있는 무로 해결하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강남은 강남이지. 근데 강남구청 화장실만도 못한 곳이야”라고 한숨보다 더 깊은 자조를 내뱉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판자촌 구룡마을이 신종 코로나 사태를 맞아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평소에도 열악하던 주거 환경은 코로나 사태 이후 생존을 위협할 수준이 됐다. 비정규직이 대부분인 40, 50대 주민들은 일자리가 끊기는 바람에 단전(斷電) 예고장을 받고 비탄에 잠겼고, 70대 이상 고령의 주민들은 마스크는 고사하고 당장 끼니 걱정을 하는 위기에 내몰렸다. 유난히 따뜻했던 겨울을 보내면서 “드디어 봄이 오나 보다”라며 한숨을 돌렸던 주민들에게 봄은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였다.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 거주하는 보험설계사 김씨의 집에 생활 지침이 붙어 있다. 이승엽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 거주하는 보험설계사 김씨의 집에 생활 지침이 붙어 있다. 이승엽 기자

◇좁은 골목길에 공용화장실…“마스크는 일주일에 1개만”

구룡마을의 열악한 주거 환경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의 위험 요인으로 꼽힌다.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어 4~5가구가 공용화장실을 함께 사용하는 구조라 한 명의 확진자만 발생하더라도 감염증이 쉽게 전파될 수밖에 없다. 골목의 폭이 1m가 채 안 될 정도로 쪽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거주자 간 밀접 접촉 확률도 다른 어떤 곳보다 높다.

취약한 환경을 방어해 줄 마스크 사용도 여의치 않다. 개포1동 동사무소 관계자는 “기초연금대상자, 80세 이상 어르신, 장애인 대상으로 마스크를 10장씩 배포해 드렸다”며 “다음 주는 65세 이상 노인들로 배포 대상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구룡마을. 박구원 기자
구룡마을. 박구원 기자

하지만 주민들은 “언제 상황이 변할지 모른다”면서 일상적으로 마스크를 재사용하고 있었다. 이날 만난 주민 10명의 말을 종합하면, 주민들은 평균 마스크 1장으로 일주일을 버티고 있다. 보험설계사 김모(74)씨는 “재택근무 지침이 내려와서 주 3회만 사무실에 나간다”며 “마스크를 햇볕에 말리거나 물로 잘 빨아서 일주일 정도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구룡마을에 산 지 18년이 됐다는 최모(70)씨는 “우리보다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마스크가 더 필요할 것”이라며 “마스크 사러 약국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의 한 판잣집에 한전의 단전예고 안내문이 전달됐다. 이승엽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의 한 판잣집에 한전의 단전예고 안내문이 전달됐다. 이승엽 기자

주민들은 코로나 정보에도 소외되고 있었다. 주민 대부분 휴대전화 요금이 부담돼 2G폰을 쓰다 보니 긴급재난문자를 제때 받지 못한다. 이날 방문한 5개 쪽방집 가운데 개인용 컴퓨터(PC)를 보유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스마트폰도 절반 정도밖에 보유하지 않아 인터넷 홈페이지와 각종 앱으로 신종 코로나 관련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을에서도 가장 외진 제8지구에서 30년 가까이 거주 중인 임금순(87)씨는 “집 안에서는 전파가 잡히지 않아 휴대폰은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갈 때만 사용한다”면서 “코로나 이야기는 TV로나 접한다”고 했다. 관절염, 고혈압, 당뇨 등 합병증 치료차 보훈병원을 다니는 임씨는 “지하철 두 번에 시내버스 한 번, 근처 통근버스를 시간 맞춰 잡아타고 간다”면서 위급한 상황을 두려워했다.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김숙자씨가 끼니를 해결하는 무. 이승엽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김숙자씨가 끼니를 해결하는 무. 이승엽 기자

◇신종 코로나에 두 달째 수입 ‘0’… 대출이자에 발 동동

코로나 사태로 서민 경제가 사실상 마비되면서 구룡마을은 더욱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주민 대부분은 일정한 수입이 없는 계약직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식당 서빙이나 목욕탕 때밀이 등 아르바이트에 종사하며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 왔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로는 수입이 ‘0’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0년째 노모와 함께 단칸방에 사는 보육교사 최모(47)씨는 다음 달 갚아야 할 대출원금과 이자 100만원 걱정에 최근 밤을 지새우기 일쑤다. 지난 1월 2년간 근무하던 어린이집 계약이 만료돼 20곳이 넘는 어린이집에 이력서를 냈지만 연락이 온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그마저도 “신종 코로나 때문에 등원하는 아이들이 없어 5월부터 일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송씨는 “그나마 월세가 없어 다행”이라며 “몸이 불편한 70세 노모도 식당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지만 사람을 뽑는 데가 없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일용직 노동자 서모(52)씨는 이날 새벽 인력사무소에 갔다가 또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건설 현장도 신종 코로나로 ‘올 스톱’ 이기 때문이다. 서씨는 “두 달째 벌이가 없다”라며 “경기가 안 좋으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고 한탄했다. 이날 서씨의 집 문 앞엔 한국전력의 ‘단전예고 안내문’이 붙었다. 서씨는 “꼬박꼬박 전기세를 냈는데 왜 전기를 끊는다는 건지 모르겠다”며 화를 냈다.

보험설계사 김모(74)씨는 지난달 수입이 30% 가까이 떨어지는 바람에 “점심을 모두 라면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신규 고객이 예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져 8년째 뇌질환으로 입원 중인 남편의 한 달 병원비 50만원을 충당하기도 빠듯하다”고도 했다. 마침 라면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던 판잡집 식탁 옆에는 김씨의 남편이 입원 전 써 놓은 ‘체면ㆍ창피ㆍ자존심, 다 버리고 강하게, 지혜롭게. 우리 현실을 직시해 분수 있게 살자’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 서울시의 재난긴급지원금 소식은 구룡마을 주민들에게 복음과 다르지 않았다. 서울시는 지난 18일 중위 소득 이하 가구당 30만~50만원의 긴급지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주민들은 “안 주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냐”라며 “다음 달 휴대폰 요금과 전기세 등 공과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바라 본 도곡동 고층 아파트 단지. 이승엽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바라 본 도곡동 고층 아파트 단지. 이승엽 기자

◇넉 달 월급 밀렸지만 폐지업체 못 떠나는 태국인 노동자

신종 코로나에도 기초연금과 정부 지원금 등으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들과 기초생활수급자 등 저소득층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입국했던 외국인 노동자들은 생존 위기의 절벽까지 몰리고 있었다.

태국을 떠나 한국에 온 지 2년째인 마흔의 동갑내기 넨과 릭 부부는 마을 초입의 한 재활용업체에서 폐지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부는 지난해 4월부터 12세와 10세 아들, 딸과 함께 구룡마을에서 살기 시작했다. 재활용업체에 취직하면서다. 부부는 “하루 4시간 근무가 전부인 아르바이트지만, 돈을 벌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다”고 했다.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의 재활용업체에서 외국인 노동자 부부가 폐지를 정리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의 재활용업체에서 외국인 노동자 부부가 폐지를 정리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하지만 부부는 최근 4개월 동안 월급을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밀린 액수만 170만원. 신종 코로나로 재택업무가 확산되자 폐지와 캔ㆍ플라스틱 등 재활용 쓰레기 배출량이 급감한 탓에 업체 또한 도산 직전이다. 한 달 새 업체 직원은 10명에서 5명으로 줄었다. 업체 사장은 “물량이 코로나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며 “빚을 내면서라도 버티고 있지만,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직원들 월급을 못 줘 너무 미안하다”는 사장은 “직원들이 알아서 떠나는 상황이 안쓰럽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고 힘든 심경을 토로했다.

구룡마을 길 건너편 고층아파트 앞 친환경 마트에서는 마침 태국산 망고 3개를 1만원에 할인 판매하고 있었다. 최근 한 달 수입으로는 고향에서 난 망고 1개조차 살 수 없는 넨과 릭 부부. 그럼에도 구룡마을을 떠나서는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는 형편이다. 부부는 “아이들은 코로나 때문에 집 밖으로 안 나가. 밥? 밥은 사무실에서 먹어. 식비 안 들어서 좋아”라고 서툰 한국말을 힘없이 건넸다.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한 마트에서 태국산 망고를 팔고 있다. 이승엽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19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한 마트에서 태국산 망고를 팔고 있다. 이승엽 기자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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