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시 한편에 3만원? 그런 청탁 거부합니다” 젋은 시인들의 반란

알림

“시 한편에 3만원? 그런 청탁 거부합니다” 젋은 시인들의 반란

입력
2020.01.16 04:40
수정
2020.01.16 09:57
1면
0 0

 원고료 미게재 ‘깜깜이 청탁’ 거부, 신춘문예 당선시집 게재 보이콧 

 불공정 계약 등 문단 악습 문제제기… 미투 등 문단 권위 실추도 영향 

2020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인 차도하(왼쪽)씨가 부당한 청탁 요구서를 공개한 내용. 차도하 제공
2020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인 차도하(왼쪽)씨가 부당한 청탁 요구서를 공개한 내용. 차도하 제공

“그렇게 하셔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고 청탁은 엄연한 작업의뢰 입니다. 원고료는 깜짝선물이나 랜덤박스가 아닙니다.”

한국일보 2020년 신춘문예 당선자인 차도하씨는 최근 원고료를 밝히지 않은 청탁 의뢰를 거절했다. ‘편당 3만원’이라는 답을 받고서도 거절키로 했다. “문예지들 사정이 좋지 않아 많이 드리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는 청탁서 내용조차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다 공개했다. 차씨는 “말하려고 작가가 됐다”며 “문예가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기를 바라며 관련 내용을 SNS에 남겨둔다”고 해뒀다.

문예지들이 말하는 ‘문단의 오래된 관행’을 참지 않는 작가들이 늘고 있다. 오래된 관행은, 원고분량이 두툼한 소설보다 양이 훨씬 적은 시를 주로 겨냥했다. 원고료를 밝히지 않는 ‘깜깜이 청탁’은 물론, 터무니 없이 낮은 원고료를 제시하거나, ‘실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라’는 식으로 태도를 보이고, 문예지 1년 정기구독권으로 원고료를 갈음하는 사례가 제법 있었다.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 자체가 귀했던 젊은 작가들은 군말 없이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등단한 신인 작가와 활발히 활동 중인 젊은 작가들이 앞장서서 이 같은 관행에 균열을 내고 있다.

원고료 문제만은 아니다. 차씨를 비롯, 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인 이원석씨, 2019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당선자인 조용우씨도 매년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시를 모아 펴내는 ‘신춘문예 당선시집’에 작품을 주지 않기로 했다. 시집을 내는 문학세계사가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와 관련된 출판사라는 이유에서다. 최근 김금희, 최은영 작가 등도 이상문학상을 주관하는 문학사상 측의 불합리한 계약 관행에 문제제기를 하며 수상거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김금희(왼쪽부터), 최은영, 이기호 작가는 최근 이상문학상을 주관하는 문학사상의 불합리한 계약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며 수상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김금희(왼쪽부터), 최은영, 이기호 작가는 최근 이상문학상을 주관하는 문학사상의 불합리한 계약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며 수상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문예지에 대한 반란이 처음은 아니다. 2013년에는 현대문학 사태가 있었다. 월간 현대문학에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쓴 수필이 실린 데다, 유신을 비판한 작품이 게재를 거부당하자 70여명의 작가들이 현대문학 기고 거부를 선언했다. 그 해 연말 현대문학상 수상자들도 상을 반납했다.

하지만 최근의 반란은 그 양상이 다르다. 예전에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다양한 억압에 대한 반란이다. 김명인 문학평론가는 “과거에는 국가 권력 등 문단 바깥과 문단간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원고료나 성폭력, 불공정 계약처럼 문단 내부의 문제점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반란의 양상이 달라진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원인이 꼽힌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문단의 권위 실추다. 2015년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 이후 문단에 대한 실망감이 널리 퍼졌다는 얘기다. ‘미투 사태’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김 평론가는 “그간 쉬쉬 해왔던 성 권력 같은 일상 속 미시권력 문제가 전면에 드러나면서 이제 참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SNS의 발달도 한 몫 했다. SNS를 통해 공론화와 연대가 가능해진 시대라 더 이상 혼자 ‘왕따’ 당할까봐 끙끙 앓지 않아도 된다. 옛 방식에 함몰되지 않겠다는 젊은 작가들의 의식변화 또한 주요한 이유로 꼽힌다.

일부에서는 그래도 거절을 넘어 공개적으로 망신까지 주는 건 너무 야박한 것 아니냐는 볼멘 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됐고,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노태훈 문학평론가는 “기성세대의 무감각함을 목격한 젊은 세대들이 이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문제제기 하겠다는 상징적 선언을 했다”며 “이제 바뀌어야 할 것은 문학계”라고 말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