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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법, 강의 못 딴 이에겐 기회 박탈… 강사는 여전히 대학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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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법, 강의 못 딴 이에겐 기회 박탈… 강사는 여전히 대학의 유령”

입력
2019.10.07 04: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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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학문공동체의 위기] <1> ‘유령’같은 강사들 

 1학기 해고 강사 절반이 2학기 강의 배정 못 받아 

 강사 대량해고, 학문 다양성 저해ㆍ학생 수업권 침해 

[저작권 한국일보] 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강준구 기자

“그 잘난 강사 자리 하나 얻으려고…” 20여년간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가르친 박정균(55ㆍ가명)씨는 이번 학기 비전임교원(강사) 공개채용을 준비하던 지난 여름 동료들과 상의하다 이렇게 내뱉었다. ‘그 잘난 강사’란 말에는 그가 청춘을 바친 학문에 대한 회한이 담겼다.

여름 내내 박씨는 3시간짜리 강의 하나를 얻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교육계획서와 경력증명서를 비롯해 가능한 많은 자료를 모아서 대학 세 곳에 원서를 냈다. 강의 동영상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강사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후배 교수들 앞에서 면접도 치렀다. 강사의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위해 지난 8월 1일 ‘고등교육법 개정안’(일명 강사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하지 않았던 일이다.

동료들과 모의 면접까지 하며 쏟아 부은 박씨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어떤 대학에서도 강의를 따내지 못했다. 강사법 시행으로 최장 3년간 강의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열렸건만 강의를 얻지 못한 그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차라리 방학에 논문이나 한 편 썼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후회만 밀려왔다. 대신 박씨는 또 한번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리저리 치이는 강사란 불안정한 신분이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이었다.

 

 ◇20여 년간 ‘유령’이었던 50대 강사의 한탄 

지역 국립대에서 박사 수료 뒤 강사를 시작한 1996년에는 박씨에게도 꿈이란 게 있었다. ‘열심히 강의를 하면 때가 오겠지’란 생각에 시간당 1만, 2만원을 받고 전국의 대학들을 누볐다. 어떤 학기엔 야간 강의까지 주 40시간도 불사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해 찜질방에서 자며 강의를 했다.

몸이 버티질 못했다. ‘학위를 먼저 받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강의시간을 12시간 정도로 줄이고 밀어둔 박사학위 논문에 시간을 투자했다. 논문 심사를 받자니 심사료 말고도 접대 등 각종 비용이 필요했다. 줄인 강의 시수를 아쉬워하면서 현금을 긁어 모았다.

2006년 박사학위를 따니 BK21(지식기반사회에 대비해 1999년부터 7년간 시행한 고등인력 양성 정책) 박사 후 연구원 기회가 생겼다. 사업 주제에 맞춰 논문을 찍어내야 했지만 과다한 강의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였다. 강의 시간을 쪼개 1년에 2,400만원 정도를 받으며 논문 한 편 이상을 써냈다. 그렇게 쓴 논문에는 ‘지도교수“ 명목으로 논문 한 번 들여다보지 않은 교수의 이름이 공동저자로 올라갔다. 막상 교수들은 각종 연구사업 따내기에 내몰려 연구도, 교육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강사로 10년을 지내며 박씨는 교수의 꿈을 접었다. 유학파나 소위 서울 명문대 출신이 아닌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애초에 없었다. 대신 학문을 이어갈 환경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대학은 작은 공간마저 허락하지 않는 곳이었다.

영문학 강사들을 관리 감독하는 담당 교수가 바뀔 때마다 강사 조건은 주먹구구식으로 변경됐다. “토익 점수를 제출하라”는 굴욕적인 요구를 하기도 했다. 항의하는 강사들이 잘려 나간 뒤 신규채용에 실패한 대학의 급한 연락을 받고 다시 강의실로 불려가는 촌극도 벌어졌다.

강사법이 시행됐어도 박씨는 여전히 기대가 없다. 오히려 최대 3년의 고용보장은 강의를 못 얻은 이들에겐 3년간 기회 박탈이 될 수도 있다. 3년 뒤엔 강의 경력이 없어 또 뒷전으로 밀려날지 모른다. “강의를 잃은 강사들을 위해 추가경정예산을 투입한 ‘시간강사연구지원사업’이 얼마나 갈까.” 대학의 유령으로 20년을 넘게 살아온 박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강사 감소폭 큰 대학. 그래픽=송정근 기자
강사 감소폭 큰 대학. 그래픽=송정근 기자

 ◇‘강사가 누구인가’ 묻기도 전 시작된 구조조정 

9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시행된 강사법은 알음알음 채용하고 통보도 없이 해고하던 강사들의 교원 지위를 인정하고, 임용도 공개채용 과정을 거치도록 했다. 1년 이상 계약해 3년간 재임용 절차도 보장했다. 부당한 징계나 해고에 소청심사권을 활용하도록 했고 건강보험을 뺀 3대 보험 가입도 의무화됐다.

하지만 강사법 시행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강사 문제가 대학사회의 오랜 모순을 담고 있는 탓이다. 교수의 10%도 되지 않는 평균 임금, 전임교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연구지원 등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산더미다.

대학들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는 일단 대량 해고에 나섰다. 이미 올해 1학기부터 대학들은 강사를 내치며 강사법 대비에 들어갔다. 이번 학기에는 대학별로 편차가 있지만 많게는 30% 이상 강사 수를 줄인 대학까지 나오고 있다. 1학기 해고 강사들이 모인 ‘대량해고에 분노하는 대학강사들의 네트워크’(분노의 강사들) 소속 강사들도 이번 학기엔 약 절반이 강의를 배정받지 못했다. 경제사와 미술사 같은 강의가 갑자기 사라져 지원서 조차 내지 못했거나 강사채용 공고를 뒤늦게 교수로 변경해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어진 분노의 강사들 공동대표는 “21개 대학에 지원해 겨우 한 군데 된 분도 있다”며 “대부분 10년 전후의 경력을 가진 강사들인데 왜 떨어진 것인지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구조조정에서 살아 남아 교원으로 인정받아도 의무만 늘어날 뿐 권리를 갖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부산대에서 8년째 철학과 강사로 근무하는 양창아(38)씨도 그렇다. 양씨는 2000년 학부생으로 입학한 뒤 박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 한 순간도 부산대를 떠난 적이 없었지만 이번 학기가 시작되고서야 정식 교원으로 인정받았다. 행정관리시스템 ‘코러스’(KORUSㆍ국립대자원관리시스템) 접속 아이디를 받은 것이다. 양씨는 “정식 교원이 된 건 기뻐도 덩달아 외부 강의를 학교에 신고하고 나갈 의무 등이 생긴 반면, 학과회의에는 아직도 참석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나마 한국비정규교수노조(한교조) 분회가 있는 부산대라 상황이 나은 편이다. 한교조에 따르면 강사법 이후 학교 평의회에 강사 대표 참여 권한이 생긴 대학은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세 곳 정도다. 그 외 대학에서 강사들은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강의만 하고 떠나는 존재에 그친다.

대학 강사들이 지난 5월11일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집회를 열어 강사법의 온전한 시행과 강사 복직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학 강사들이 지난 5월11일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집회를 열어 강사법의 온전한 시행과 강사 복직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사법, 강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강사법 시행으로 학문공동체 구성원들 간 갈수록 미묘해지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구조조정을 바라봐야 하는 교수들과 교원 지위를 인정 받은 강사들, 혹은 잘려 나간 이들은 만나면 서로 미안해하고 변명하기 급급하다. 얼굴을 마주하면 부담스러우니 만나는 일 자체를 아예 만들지 않으려 한다. 성균관대에서 예술사 강의를 하다 ‘초빙교원 임용’ 제안을 거절한 조이한 분노의 강사들 공동대표는 “개인적으로 아는 교수들을 만날 때마다 ‘교수라고 무한권력이 있는 게 아니다’, ‘교수들 월급 동결된 지가 몇 년이고 심지어 내 월급도 까려 한다’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고 전했다.

2017년 기준 강사는 대학의 전체 교원 중 약 34%를 차지한다. 강사법 회피를 위해 대학들이 ‘꼼수‘ 채용한 겸ㆍ초빙, 기타 교원 등을 포함하면 그 비중은 더 늘어난다.

강사법은 최소 34% 이상의 지위를 바꾸는 법인데, 학문공동체의 한 축인 교수들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당장 이번 학기 강사 수가 줄었어도 강의 수는 그대로거나 늘어나는 대학들이 생겼다. 전임교원의 강의 부담이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다. 더욱이 강사는 학문 핵심 분야를 연구하는 교수들이 손 대기 어려운 다양한 주변부 연구에 뛰어들 수 있는 학문미래세대다. 김진균 강사제도 개선과 대학연구교육 공공성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강사공대위) 대변인은 “강사들의 연구ㆍ교육 환경이 보호받지 못하고, 이에 더해 대량 해고까지 이어질수록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학문의 다양성과 학문생태계의 안정성이 깨지는 셈“이라며 “철학을 예로 들면 들뢰즈 같은 프랑스 철학을 강의하는 사람도, 연구하는 사람도 사라진다”고 꼬집었다.

대학들의 구조조정 국면에서 학생들이 수업권 침해를 지적하며 나서는 것도 강사법이 강사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어진 대표는 “올 한 해 가장 큰 힘이 됐던 건 연세대와 고려대 등에서 학생들이 직접 나서 학교의 강좌 수 축소 현황 등을 조사하고 이를 비판한 것”이라며 “당장 답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지 않지만 학생들이 던진 작은 돌멩이가 대학사회 전체를 바꾸는 기폭제가 되길 바라면서 대학 구성원들과 연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편집자 주]

강사의 지위를 보장하고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강사법이 올해 8월 시행됐지만 구조조정에 내몰린 강사들의 한숨은 여전하다. 학문생태계의 한 축이 흔들리며 대학의 연구와 교육,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걱정도 커지고 있다. 한국일보는 인문학협동조합과 공동으로 4회에 걸쳐 대학 학문공동체가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조명한다.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정준기 기자 j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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