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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ㆍ임종헌, 그들이 사는 법 ‘재판 지연’… 반년 허송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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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ㆍ임종헌, 그들이 사는 법 ‘재판 지연’… 반년 허송세월

입력
2019.08.02 04:40
수정
2019.08.02 07:4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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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재판 6개월… 증거 의혹 제기·재판부 기피·위헌법률심판 등 법지식 이용해 재판 늦춰

지난달 22일 보석으로 석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왼쪽)과 지난 3월 19일 공판기일에 출석하고 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달 22일 보석으로 석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왼쪽)과 지난 3월 19일 공판기일에 출석하고 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법부 최고 수장이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의 정점으로 지목돼 구속된 1월24일은 사법부 치욕의 날로 기록되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약 2주 뒤인 2월11일 자신과 손발을 맞췄던 박병대ㆍ고영한 전 대법관과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이보다 앞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지난해 11월14일 구속 기소됐다. 이밖에 불구속 상태로 기소된 전ㆍ현직 판사 10명을 포함해 모두 14명의 고위급 법관들이 사법농단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 기소일 기점으로 사법농단 재판은 어느덧 반년이 다 돼가고 있다. 하지만 재판은 한없이 늘어지고 있다. 사법농단 재판이 속절없이 늘어지는 것은 ‘트럭기소(트럭에 운반할 정도로 많은 수사기록)’라 할 정도로 공소사실이 복잡한 이유를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법리에 밝은 피고인들이 의도적으로 재판을 지연시킨 대목도 무시할 수 없다. 증인을 200~300명씩 신청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사법농단 재판의 6개월은 ‘법잘알(법을 잘 아는 사람들)’들의 딴죽대잔치였던 셈이다.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이 대표적이다. 양 전 대법원장과 두 전직 대법관 측이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해온 만큼 본격재판이 시작되면 검찰과 피고인 측이 치열한 법리 공방을 벌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피고인들은 혐의를 입증할 핵심증거인 임 전 차장의 이동식저장장치(USB) 원본파일과 이를 출력해 재판부에 제출한 사본이 다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검증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USB에 담긴 파일은 총 1,142개. 검찰은 “재판을 지연시키려는 의도가 명백하다”고 반발했지만 재판부는 피고인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매주 두 번씩 오전 10시부터 늦으면 오후 9시 너머까지 지난한 검증작업이 반복됐다. 한 달 넘는 작업으로 증인신문은 지난달 10일에야 겨우 시작됐다. 결국 핵심증인에 대한 본격적인 증인신문을 마치기도 전에 양 전 대법원장의 1심 구속만료일(이달 11일)이 다가왔고 재판부는 고심 끝에 직권으로 보석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저작권 한국일보]사법농단 주요 피고인들 재판 진행 상황-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사법농단 주요 피고인들 재판 진행 상황-박구원 기자

임 전 차장 재판은 아예 ‘개점휴업’ 상태다. 임 전 차장은 재판 초반부터 진행방식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며 이를 빌미로 지연전략을 펼쳤다. 재판부가 6개월인 1심 구속기간을 고려해 주4회 재판을 예고하자 첫 공판을 앞두고 변호인 11명이 일제히 사임했고, 이로 인해 첫 공판은 3월11일에야 가까스로 열렸다. 하지만 3개월 정도 지나 임 전 차장은 “재판부가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있다”며 법원에 기피신청서를 제출했다. 법원이 한 달여의 심사숙고 끝에 기피신청을 기각했지만, 임 전 차장은 즉시 항고했다. 그러면서 5월30일 이후 재판은 올스톱 상태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다른 피고인들에 앞서 재판이 끝나면 ‘독박’을 쓸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어떻게든 양 전 대법원장 재판보다 뒤로 미루려는 포석인 듯하다”고 분석했다.

법원행정처 사건 기록을 불법 유출한 혐의를 받는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재판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가 꺼낸 카드는 위헌법률심판. 본격심리를 시작하기에 앞서 검찰 수사나 재판 과정의 절차부터 근본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며 검찰의 피의자신문조서에 증거능력을 부여하는 형사소송법 312조의 위헌 여부 판단을 헌재에 넘긴 것이다. 재판부가 이를 기각하자 유 전 연구관은 직접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까지 제기했다.

피고인들의 전략이 모두 제각각이긴 하지만 목적은 재판 지연 하나로 수렴한다는 게 법조계 시각이다. 그렇다고 피고인들이 주장하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재판부 입장에서는 난감할 따름이다.

애초 검찰의 방대한 증거자료가 문제였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검찰이 사사로운 증거들까지 모조리 묶어서 제출하다 보니 피고인 측은 재판을 충실히 준비하기 어렵고, 이 때문에 불만을 표출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양 전 대법원장의 경우, 공소장만 296쪽에 달한다. 이명박(259쪽)ㆍ박근혜(154쪽) 전 대통령의 공소장과 비교해도 상당한 분량이다. 수사기록은 A4용지 17만5,000쪽으로 500쪽짜리 책으로 치면 350권 분량이다.

이런 속도라면 사법농단 재판은 앞으로도 최소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넘게 걸릴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의 경우 신청된 증인 212명 중 이제 겨우 6명이 신문을 마쳤다. 임 전 차장 재판도 검찰 측 진술조서 동의 여부에 따라 300여명까지 늘어날 수 있지만 아직 10%도 신문하지 못했다. 증인이 138명(중복포함)이었던 박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1심이 주 3~4회 재판으로 354일이 소요됐던 것을 감안하면, 사법농단 재판은 2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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