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아이 아직 없는데... 엄마 성 따르기, 혼인신고 때 결정하라?

알림

아이 아직 없는데... 엄마 성 따르기, 혼인신고 때 결정하라?

입력
2019.07.06 04:40
5면
0 0

호주제 폐지 10년 넘었건만… 갈길 먼 ‘엄마 성 물려주기’

혼인신고서 4번 항목에는 ‘자녀의 성ㆍ본을 모의 성ㆍ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라는 질문이 쓰여 있다.
혼인신고서 4번 항목에는 ‘자녀의 성ㆍ본을 모의 성ㆍ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라는 질문이 쓰여 있다.

지난달 10일 혼인신고를 하러 구청을 찾았던 박모(28)씨. 혼인신고서 4번 항목에서 멈칫했다. ‘성ㆍ본의 협의’라는 이 항목은 ‘자녀의 성ㆍ본을 모의 성ㆍ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라고 물었다. 나중에 태어날 아이에게 아빠가 아니라 엄마 성을 물려 줄 것인지 미리 상의했느냐는 질문이다.

박씨가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이런 건 우리 부부 혼인신고 때가 아니라 아이의 출생신고 때 결정하면 안되느냐”고 되물었다. “보통 아버지 성을 따르니 그냥 ‘아니오’에 체크하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아니오’라고 할 거면 굳이 이런 문항을 집어넣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좀 더 알아보니 상황은 더 이상했다. 만약 혼인신고 때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나중에 아이에게 엄마 성을 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엄마의 성을 주기로 했다는 ‘예’ 항목에 체크를 하려면, 부부 양측이 동의했다는 내용의 ‘협의서’를 작성, 제출하는 등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버지 성 따르는 것을 ‘기본’으로, 어머니 성 따르는 것을 ‘예외’로 간주하다 보니 일어난 현상이다.

'모의 성본'에 따르기 위해서 혼인신고 단계에서 제출해야 하는 별도의 협의서.
'모의 성본'에 따르기 위해서 혼인신고 단계에서 제출해야 하는 별도의 협의서.

호주제가 폐지된 지 10년이 지났고, 가족 형태가 다양화되고 있는 가운데, 아버지 성을 따라야만 한다는 부성(父性)주의가 여전하다는 불만이 박씨 같은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나온다. 그것도 사전 정보도 없이 혼인신고 단계에서 무조건 결정토록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최근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앞두고 있는 전모(27)씨는 혼인신고 단계에서 아이의 성ㆍ본을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전씨는 “결혼은 했지만 아직 뚜렷한 자녀 계획도 없다”며 “계획도 없고 임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언제 태어날지도 모르는 아이의 성과 본을, 혼인신고 때 공문서로 확정지으라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는 민법의 문제다. 부성주의를 규정한 민법 781조는 “자(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는 규정해뒀다.

전문가들은 그래서 민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낸다. 한국 젠더법학회장인 신옥주 전북대 교수는 “자녀의 성 결정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을 달리 취급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데도 아버지의 성을 기본으로 간주하는 건 엄연한 성차별”이라면서 “민법 781조는 헌법이 규정한 양성 평등한 혼인과 가족생활에 반하는 위헌적 조항이다”고 말했다. 오병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자녀의 성ㆍ본을 혼인신고 때 결정토록 강제하는 건 개인의 선택권 침해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부성주의 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 -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부성주의 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 - 송정근 기자

이런 문제점을 정부도 알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해 8월부터 민법 781조 개정을 추진하고 있으나 국회 논의는 아직 멀었다.

성ㆍ본을 아예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부성주의라면 우리는 흔히 유교문화의 영향을 떠올리지만, 정작 유교의 종주국이랄 수 있는 중국은 ‘형제 동성동본주의’조차 버렸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성을 제 각각 따로 물려줄 수 있다”며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도 ‘가족성(Family name)’을 따르는 건 일종의 관습일 뿐 법적 강제가 없다”고 말했다.

사실혼, 한부모, 국제결혼 등 갈수록 가족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프랑스처럼 재혼, 입양 등으로 재구성된 가족이 많은 나라에서는 성씨를 애써 통일하지 않는다”며 “가족이라는 이유로 구성원 모두가 하나의 성씨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도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말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