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영문 번역한
안선재 가톨릭 수사·서강대 명예교수
“여전히 어려운 삶, 저마다 새벽 기다려”
"We, too, want to become heaven./Not a dark clouded heaven/that presses down, /but a clear blue heaven/over a world where we lift one another."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서로를 받쳐주는/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그런 세상이고 싶다.")
박노해 시인의 시집 ‘노동의 새벽’을 영어로 번역한 안선재(82) 서강대 명예교수는 이 구절로 끝을 맺는 박노해의 시 ‘하늘’을 가장 인상 깊은 시로 꼽았다. 시 자체의 아름다움에 더해 “그래도 인간답게 살아야겠다”라는 올곧은 다짐이 담겨서다. 영국 출신의 가톨릭 수사(修士)로 1994년 한국에 귀화, 번역을 통해 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려온 1세대 번역가인 그가 최근 출간 40년을 맞은 박노해의 시집을 미국 하와이대 출판부에서 영문판으로 펴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두가 저마다 새로운 새벽을 기다리기에..."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안 전 교수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문학책은커녕 모두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눈앞의 사람조차 보지 않는 시대”라면서도 ‘시의 힘’을 생생하게 드러낸 박 시인의 작품을 번역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2017년에야 ‘노동의 새벽’을 처음 마주했지만, 그 순간 자신이 한국에 왔던 1980년 5월 “최루탄으로 뒤덮인 시대의 분위기”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안 전 교수는 “이제 노동계급이나 마르크시즘은 없어졌지만, 젊은이들의 삶은 한국이나 다른 나라나 여전히 어렵다”면서 “제각기 집값이니 취직, 결혼, 출산 등 다른 고민을 하는 모두가 저마다 새로운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고 이 시집이 오늘날에도 의미를 갖는 까닭을 설명했다.
안 전 교수는 ‘노동의 새벽’에서 ‘새벽’에 무게를 둔다. 그는 “새벽은 사실 새로운 날의 시작이다. 마냥 고생이나 고통만 있는 게 아니라 앞으로 희망이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희망이 있다면 새벽, 새날을 기다릴 수 있다. 우리는 희망 없이는 못 산다. 희망 하나를 보고 고생에 고생, 또 그 너머의 고생을 한다지만 그래도···.”
정확한 번역보다 “재미있는 번역을”
1984년 문단을 넘어 한국 사회에 충격을 준 시집 ‘노동의 새벽’을 번역하면서 안 전 교수는 “(시집 속의) 살아 있는 목소리”가 분명히 들리도록 하는 데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 그는 “그저 아름다운 시로 읽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한국 노동자와 전 세계 사람들의 고민을 (시집을) 읽는 이들이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과연 이런 번역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냥 했다”고 말하며 팔순을 넘은 번역가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한국이 이전보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한국 문학도 마찬가지”라면서도 “K팝을 듣는 사람보다는 소설을 읽는 숫자가 적고, 시는 더더욱 적다”라는 것이 안 전 교수의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번역가로서 “독자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번역”에 주안점을 둔다. 구상 시인의 작품을 시작으로 그가 지금까지 번역·출간한 단행본만 시집 68권과 소설 11권, 논픽션 4권에 달한다. 아직 책으로 나오지 않은 번역본들도 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2008), 대영제국훈장(2015) 등을 수훈한 그는 “요새 번역가도 작가라는 말이 있지만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안 전 교수에게 번역은 일종의 ‘봉사’다. “번역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한)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라는 이야기다.
1980년 5월 7일 지금으로부터 44년 하고도 약 일주일 전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은 안 전 교수는 이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 그는 “이제 다른 데 안 가. 영국 안 가요”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종파를 가리지 않는 프랑스의 테제공동체에서 성직자의 삶을 얻고, 필리핀을 거쳐 한국에 정착했다. 안 전 교수는 오늘도 한국의 시와 소설, 그리고 문화에 대한 글을 읽고 읽으며 번역한다. 그가 기다리는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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