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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에 부역한 동료들을 고발한 심리학자

입력
2024.05.13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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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마리아 어리고(Jean Maria Arrigo, 1944.4.30~2024.2.24)

진 어리고는 '테러와의 전쟁' 중 자행된 미 국방부와 CIA의 테러용의자 등에 대한 '고강도 심문' 즉 고문을 심리학자들이 돕고 미국심리학회(APA)가 그 사실을 조직적으로 은폐·정당화한 사실을 폭로, 10년 간 온갖 음해와 협박, 따돌림을 당했다. 2015년에야 진실이 드러났고 APA 전현직 간부 다수가 사퇴-은퇴했다.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 사진.

진 어리고는 '테러와의 전쟁' 중 자행된 미 국방부와 CIA의 테러용의자 등에 대한 '고강도 심문' 즉 고문을 심리학자들이 돕고 미국심리학회(APA)가 그 사실을 조직적으로 은폐·정당화한 사실을 폭로, 10년 간 온갖 음해와 협박, 따돌림을 당했다. 2015년에야 진실이 드러났고 APA 전현직 간부 다수가 사퇴-은퇴했다.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 사진.

2004년 11월 뉴욕타임스가 적십자사의 쿠바 관타나모수용소 시찰 보고서를 단독 입수, 심리학자들이 ‘고문과 다를 바 없는’ 심문에 가담해온 사실을 보도했다. ‘테러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고, CBS 시사 프로그램 ’60 Minutes’가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군교도소 육군 헌병들의 수감자 가혹행위를 사진과 함께 폭로한 직후였다.

막강한 규모와 권위를 자랑해온 미국심리학회(APA)가 2005년 적십자 보고서의 진상을 규명하고 관련자 윤리 기준을 마련하고자 특별팀을 꾸렸다. 공식 명칭 ‘심리학적 윤리와 국가 안보에 관한 태스크포스’, 줄여서 ‘펜스(Pens, Psychological Ethics and National Security)’는 APA가 위촉한 저명 학자 및 임상 전문가 위원 9명과 옵저버 1명으로 구성됐다. 무명 여성 심리학자 진 마리아 어리고(Jean Maria Arrigo)도 위원 중 한 명이었다.

회의는 단 사흘 열렸고, 6월 최종 보고서가 발표됐다. 결론은 단순명료했다. 심리학자들은 “심문이 안전하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윤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진행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는 것. APA 당시 회장 제럴드 쿠처(Gerald Koocher, 1947~)는 “독립적 태스크포스”의 저 결론을 공개했고 미 국방부도 보도자료를 냈다.

어리고의 생각은 달랐다. ‘독립적’이었다는 전제부터 부정했다. 의결권을 지닌 위원 9명 중 6명이 군-정보기관과 이해관계로 얽혀 있었다. 회의장에는 회의 자료는커녕 메모지조차 없었고, APA 규정과 달리 회의록도 작성되지 않았다. 그는 2016년 인터뷰에서 “의장석에만 문건 하나가 달랑 있었다.(…) 우리는 주로 잡담(wordsmith-ing)만 하다가 딱 한 번 표결했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앞서 그들은 펜스 활동에 대한 엄격한 비밀준수 서약을 해야 했다.

심리학자이자 구술심리사학자였던 어리고는 이듬해 일반인 열람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기록보관소에 자신이 모은 펜스 회의 관련 자료를 기탁했다. 2006년 4월 미 상원군사위원회에도 자료 일체를 전달했고, 200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PA 총회장에서 아예 펜스 회의 전모를 폭로했다. 그의 발표는 현장에 있던 인터넷 뉴스 매체 ‘Democracy Now!’ 의 저널리스트 에이미 굿맨(Amy Goodman, 현 총괄프로듀서)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요지는 펜스 회의가 군 정보기관과 심리학계의 미심쩍은 결탁을 정당화하는 쇼의 들러리였다는 거였다.

펜스 보고서가 나온 지 10년 뒤인 2015년 7월, 연방 검사 출신인 법률가 데이비드 호프먼(David H. Hoffman)의 펜스 회의 실태조사 보고서가 발표됐다. 보고서에는 심리학자들이 피심문자의 정신적 육체적 항상성과 안정성을 취약하게 만드는 일련의 기법을 ‘고강도 심문(향상된 심문, enhanced interrogation)'이란 명목으로 개발-자문하고 현장에서 지휘-감독까지 한 사실, APA 전 회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그걸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정당화한 사실, 그럼으로써 관련자 다수가 국방부 등으로부터 유무형의 직간접적 보상을 받은 사실 등이 낱낱이 담겼다. 보고서는 어리고의 이름을 150번 넘게 언급했다. 그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10년 동안 어리고는 온갖 음해와 인신공격, 협박, 학계의 수군거림과 따돌림을 견뎌야 했다.
‘대테러-국가 안보’란 낱말이 무소불위의 위력을 발휘하던 9·11 사태 직후의 반테러 전쟁터에서 국방부와 CIA, APA에 맞서 양심과 인권, 학문 윤리를 지키고자 고군분투한 진 마리아 어리고가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국가는 학문(학자)의 최대 후원자인 동시에 학문적 중립성을 가로막는 위협-유혹의 주체다. 위 사진은 2015년 워싱턴D.C에서 열린 국가안보 컨퍼런스 무대의 CIA 깃발(로이터 연합뉴스). 아래는 박사급 이상 회원만 15만 7,000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심리학 단체인 미국심리학회 로고(apa.org)

국가는 학문(학자)의 최대 후원자인 동시에 학문적 중립성을 가로막는 위협-유혹의 주체다. 위 사진은 2015년 워싱턴D.C에서 열린 국가안보 컨퍼런스 무대의 CIA 깃발(로이터 연합뉴스). 아래는 박사급 이상 회원만 15만 7,000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심리학 단체인 미국심리학회 로고(apa.org)

어느 나라든 정부는 학자들의 최대 고용주다. 그래서 학문 윤리 즉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강조된다. 심리학과 군사·정보 분야의 인연도 기원전 중국 전국시대 ‘손자병법’서부터 지금까지, 신병 모집서부터 전술·전략 수립, 정보 수집과 포로 심문 과정 등에 긴밀히 얽혀 있다. 9·11 당시에도 미 국방부는 최소 100여 명의 임상심리학자를 고용하고 있었고, 매년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발주해왔다. ‘테러와의 전쟁’은 야심 있는 심리학자들에게 새로운 '시장'이었고 APA는 관급 프로젝트와 인력 공급의 독점적 창구였다.

APA에도 당연히 회원 윤리 강령이 있(었)다. 선의와 인권, 인간 존엄, 진실성 등등. 의학 등 모든 학문들처럼 심리학 윤리의 핵심도,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Do No Harm)’는 것이다. 9·11의 참담한 피해와 국민적 분노가 등등하던 대테러 전쟁 국면은 저 두 가치, 즉 인권-존엄과 안보-애국이 상충하는 여러 상황을 조성했다. 그건 학문 윤리와 돈-출세의 충돌이기도 했다.
가혹행위, 특히 심리적 고문에 대해 정보기관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었지만 대부분 묵살됐다. CIA 자문위원이던 임상심리학자 멜 그래비츠(Mel Gravitz)가 “심리학자도 국가 등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진다.(...) 윤리 강령도 주어진 조건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돼야 한다”는 요지의 의견서를 CIA 반테러센터에 제출한 건 2003년 초였다.

그래비츠가 언급한 ‘심리학자’란, 훗날 관타나모 청문회에 소환되고 인권단체에 의해 전쟁범죄 혐의로 고발당한 ‘고강도 심문’ 전문가 제임스 미첼(James Elmer Mitchell, 1952~) 등이었다. 미첼은 미 공군 현역이던 86년 사우스플로리다대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공군 특수작전사령부 등에서 파일럿 생존-회피-저항-탈출(SERE) 훈련 교관과 인질 협상 및 테러 용의자 프로파일링 전문가로 복무하다 2001년 중령으로 예편, 정보-심리 자문회사(Mitchell Jessen & Associates)를 설립한 인물. SERE 훈련 즉 포로가 된 파일럿이 적의 심문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기술을 역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고강도 심문’ 기법에는 물고문, 기형적 자세로 결박해두기, 장시간 과도한 소음 노출, 수면 박탈, 성적 굴욕감, 극한 온도 노출, 관처럼 생긴 상자에 가두기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심문 과정을 지휘 감독하기도 했다. 그(의 회사)는 CIA와의 계약으로 2005~09년 사이 최소 7,100만 달러를 벌었다.

하지만 ‘외부인’인 미첼과 CIA 반테러 심문팀은 적잖이 불화했고, 고문으로 얻은 정보를 불신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비츠의 의견서도 사후를 대비한 CIA의 면피 및 내부 잡음 종식용이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어리고의 폭로가 터진 거였다.

미국 전문심리학위원회의 5개 전문학위를 최초로 받았다는 거물 심리학자로 2006년 APA 회장에 취임한 쿠처는 ‘Democracy Now!’ 폭로 직후 공개 서한을 통해 어리고의 주장을 “불우한 성장 과정의 부적절한 영향”에서 비롯된 음해라고 반박했다. 쿠처는 어리고의 아버지가 2차대전 군 정보장교로 일하며 여러 비밀작전에 가담했다가 훗날 자살했고, 그런 아버지 탓에 어리고가 군 정보활동에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어리고의 아버지는 멀쩡히 생존해 있었다. 어리고는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역시 공개서한 형식으로 쿠처에게 보냈다.

쿠바 관타나모의 미군 기지 캠프 델타 입구. 미국심리학회는 고문과 다를 바 없는 '고강도 심문' 기술을 개발해 지원했고, 그 사실을 은폐-정당화했다. AP 연합뉴스

쿠바 관타나모의 미군 기지 캠프 델타 입구. 미국심리학회는 고문과 다를 바 없는 '고강도 심문' 기술을 개발해 지원했고, 그 사실을 은폐-정당화했다. AP 연합뉴스

어리고는 2차대전 종전 직전인 1944년 4월 미 육군 헌병대 정보장교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의 3녀 중 장녀로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시와 전후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실제로 여러 비밀작전을 수행했다. 어리고는 UC캘리포니아와 US샌디에이고에서 수학을 전공해 각각 학사와 석사(1969) 학위를 딴 뒤 약 11년 간 샌디에이고칼리지 등에서 수학 겸임교수로 일했다. 그는 90년대에야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 대학원(CGU)에 진학, 심리 연구의 편향과 윤리를 주제로 각각 석사(95)-박사 학위(99)를 땄다. 어리고가 한 이력서에 “비밀 정보장교의 딸로서 물려받은 주제인 군사 및 정치 정보 윤리에 대해 연구했다”고 쓴 적이 있지만, 그는 냉전 시대 중남미 인권 사태를 보며 국가와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85~86년 겨울 니카라과 콘트라반군 관련 ‘중앙아메리카 국제평화 행진’에 가담했고 86년 8월 과테말라 원주민 인권을 위한 ‘국제 평화여단’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2016년 인터뷰에서 그는 “내 조국이 간접적으로 사람들을 고문하고, (중남미 다수 국가가 60,70년대 운용한 초법적 살인 집단인) ‘처형 부대(death squads)’를 지원한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2000년 모교에서 정치 및 군사 정보 윤리에 관한 파일럿 워크숍을 개최하고 정보 전문가 및 무기 개발자들을 인터뷰해 그들이 겪는 윤리적 고민 등을 데이터화하는 등 학자로서의 경력을 쌓아갔다. 90년대 말 결혼한 작곡가 남편 존 크리글러(John Crigler)와 함께 자신의 구술사를 바탕으로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부부에겐 자녀가 없었다.
어리고는 대학 정식 교수였던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잔잔한 이력 때문에 APA 이사진이 그를 펜스 위원으로 발탁했는지 모른다. 그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를 인터뷰해 ‘가해(Doing Harm):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심리학회는 어쩌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길을 잃었는가(2023)’라는 책을 쓴 인권 심리학자 로이 아이델슨(Roy Eidelson)은 “어리고가 자신의 직업세계에서 국가적 리더십과 맞서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이른바 해외 ‘적 전투원(enemy combatants)’ 수용시설에서 가혹행위가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인권단체 등의 고발은 2014년 미 상원 정보위 보고서를 통해 대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궁지에 몰린 APA도 적십자사 2004년 보고서와 펜스 회의 등에 대한 독립적인 실태조사를 호프먼에게 의뢰했다. 7개월여 조사 끝에 2015년 7월 공개된 542쪽 분량의 호프먼 보고서는 “(모든 증거들이) APA가 국방부 지원과 홍보 관리, 직업적 성취의 극대화라는 목표에 따라 그들의 윤리 원칙을 선택했다는 결론을 뒷받침한다"고 밝혔다.

APA 전 회장 두 명이 CIA 자문위원이었다. 그 중 한 명으로 “피심문자를 못 자게 하는 것은 고문이 아니다”란 공식 의견서를 낸 적이 있는 조지프 마타라조(Joseph Matarazzo)는 미첼의 회사 지분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옵저버로 펜스에 가담한 APA 간부는 관타나모 심문 지원 행동과학팀 수석심리학자의 배우자였다.

진 마리아 어리고는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APA 회장 등의 음해보다 "그런 인신공격에 이의조차 제기하지 않던 선의의 APA 회원들"이었다고 말했다. the guardian, 가족사진.

진 마리아 어리고는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APA 회장 등의 음해보다 "그런 인신공격에 이의조차 제기하지 않던 선의의 APA 회원들"이었다고 말했다. the guardian, 가족사진.


“(내) 용기를 칭찬하는 말들은 그냥 무시하세요.
그냥 고되고 지겨운 일일 뿐입니다.”

2016년 12월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 교지 인터뷰에서

만 15년 간 APA 윤리국장을 맡고 있던 스티븐 벤케(Stephen Behnke)와 보고서에 언급된 전 회장과 부회장, PR책임자 등이 잇달아 사임하거나 은퇴했다. APA는 이해상충 관련 윤리 기준을 강화하고 국가 안보-심문 관련 협력을 일절 금지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APA 전 회장 네이딘 코슬로(Nadine Koslow)는 사과 성명서를 발표하며 "(특히 어리고를) 부당하게 대한 데 대해 개인적으로 사죄하고 싶다”고 밝혔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어리고의 드문 동지였던 심리학자 스티븐 솔즈(Stephen Soldz)의 말을 인용 “보고서로 밝혀진 공모에 많은 이들이 속고 있을 때, 어리고는 혼자 어둠을 뚫고 일어나 진실을 말한(…) 국민적 영웅”이라고 썼다.

2006년 9월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 이후 세계 주요거점 지역에서 테러 용의자들을 구금-심문하기 위한 이른바 '블랙 사이트(black sites, 비밀 수감시설)'를 공식 해외 군교도소와 별도로 운용해온 사실을 인정했다. 블랙 사이트는 2009년 1월 오바마 신임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따라 그해 4월 공식적으론 모두 폐쇄됐고, CIA도 대인 정보 수집시 육군 야전교범(Field Manual)에 명시된 19가지 방법만 사용하도록 했다.

솔즈의 말과 달리 어리고도 혼자는 아니었다. “국가 및 기타 권력과 이해로부터 심리학의 독립성과 윤리를 지키자”는 취지로 솔즈 등 소수의 심리학자들이 2006년 설립한 ‘윤리적 심리학을 위한 연대(CEP)')가 그를 도왔다. 기록학자 브루스 몽고메리는 ‘미국의 심리학과 국가안보 관계에 대한 역사적 진실과 제도적 투명성’ 기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어리고와 함께 콜로라도 볼더대에 ‘APA 펜스 토론 컬렉션’을 만들었다.
어리고의 멘토이자 박사논문 지도교수 중 한 명인 CGU 윤리철학자 찰스 영(Charles Young)도 있었다. 영은 펜스 회의 직후 비밀준수 서약서의 살벌한 문구들과 학자로서의 양심 사이에서 번민하던 어리고에게 “그들은 당신을 어떤 약속으로 이끌었지만, 거짓말로 당신을 거기 있게 했으므로 그 약속은 구속력이 없다”며 용기를 북돋웠다.

호프먼 보고서가 나온 뒤 어리고에게는 경의와 사과의 뜻을 담은 동료들의 편지가 쇄도했다고 한다. 2015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어리고는 “마치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기록이 공개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앞서 그는 “개인적으로 동료들이 뒤에서 나를 두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는 게 무척 힘들었다”고 말했다. 쿠처 같은 이들의 “멍청한(idiotic)” 공격보다 그를 더 괴롭힌 것도 “그런 (인신)공격에 이의조차 제기하지 않던 선의의 APA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이용당하도록 내버려뒀다.”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2005년 보고서에 내 서명도 포함됐기 때문에 나 역시 유죄였다. 그걸 견딜 수 없어 버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내) 용기에 대한 말들은 그냥 무시하세요. 그냥 고되고 지겨운(grunt) 일일 뿐입니다.”

2015년 미국과학진흥협회(AAAS)는 어리고에게 ‘과학의 자유와 책임상’을 수여했다. APA 이사회도 그해 “심리학자라는 직업 최고의 롤모델”이 되어준 그에게 특별상을 수여했다. 어리고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자신이 약해질까 봐 두렵다고, 상을 수락한 게 후회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펜스 사태와 유사한 권력-학계의 윤리적 스캔들이 재발하지 않으리라 믿지 않았다. “그건 60년대 러시아가 게리 파워스의 스파이 비행기를 격추한 뒤부터 미국이 스파이활동을 포기했다고 믿는 것과 같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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