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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엄마와 오빠를 잃은 자살 유가족이에요” 털어놓자 일어난 일

입력
2024.06.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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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 시즌3 : 애도] <4>박경임

편집자주

‘자살 사별자(Suicide Bereaved)’. 심리적으로 가까운 이를 자살로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살 사별의 아픔이 비단 가족에게 국한되는 일이 아님을 내포한 말이기도 합니다. 자살은 원인을 단정할 수 없는 죽음이라 남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고인을 쉬이 떠나보내지 못하고 ‘왜’라는 질문에 맴돕니다. 죄책감이나 원망이 들어차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애도’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난한 여정입니다. 한국일보는 올해 자살 사별자들의 그 마음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자살 사별자들이 마음으로 쓰는 부고, 애도’입니다.

심리상담 공부하며 어머니ㆍ오빠의 죽음 직시
“그제야 휴화산 같던 깊은 슬픔이 터져 나왔다”
에세이 ‘슬픔은 발효 중’ 출간 “애도로의 초대장”

박경임 박경임애도상담연구소 소장을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박 소장은 어머니와 오빠를 잃은 자살 생존자다. 지난해 말 애도에 이르는 여정을 에세이로 역은 ‘슬픔은 발효 중’(훈훈)을 출간했다. 정다빈 기자

박경임 박경임애도상담연구소 소장을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박 소장은 어머니와 오빠를 잃은 자살 생존자다. 지난해 말 애도에 이르는 여정을 에세이로 역은 ‘슬픔은 발효 중’(훈훈)을 출간했다. 정다빈 기자

뒤늦은 통곡이었다. 어머니가 생을 마감한 지 37년이 흐른 뒤였다. 그 사이 오빠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경임(49) 박경임애도상담연구소 소장은 어머니와 오빠를 자살로 잃었다. 그는 어머니 죽음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고작 다섯 살 때다. 그로부터 20년 뒤엔 오빠가 눈앞에서 눈을 감았다. 오빠가 남긴 마지막 말은 “너무 살고 싶어요”였다. 그때 알았다. 자살은 ‘선택’이 아니란 걸.

그런데도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 얘기를 편히 털어놔 본 적이 없다. 주위의 냉대와 손가락질이 싫어서였다. ‘너처럼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니’라는 눈길도 그에겐 상처였다. 그러니 그간 그는 제대로 울어 본 적도, 위로받은 적도 없었다.

“나는 자살 유가족”이라고 말하고 나서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2017년 그가 필리핀 라살대학교(De La salle University)에서 심리상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밟을 때다. ‘인생의 첫 상실(죽음)’이 그날 강의의 주제였다. 그가 받은 질문은 이런 것들이었다. “당신이 경험한 첫 죽음은 무엇인가요”, “그때 상황은 어땠나요”, “옆에 누가 있었나요”, “그때 감정은 어땠나요”.

“생각해 보니 그 긴 세월을 지내오면서 그런 질문을 처음 받아보더라고요. ‘상실 이후의 나’를 처음 떠올려본 거죠. 그 경험을 얘기하면서 제가 통곡을 했어요.”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온 자신을 그날 마주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슬픔의 휴화산.’ 그때까지의 자신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그날은 그에게 애도의 시작이다.

지난해 12월 그는 에세이집 ‘슬픔은 발효 중’(훈훈)을 냈다. ‘애도의 터널’을 통과해 온 자신의 시간을 엮은 책이다. “저 같은 자살 유가족을 애도로 초대하고 싶어요. 이 책은 그 초대장이에요.”

출간에 즈음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박경임애도상담연구소’도 열어 자살 사별자들을 만나고 있다.

◇상추쌈 먹고 쓰러진 엄마…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등졌을 때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20년 뒤, 오빠마저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는 아예 주위에 입을 닫은 이유다. 정다빈 기자

어머니가 세상을 등졌을 때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20년 뒤, 오빠마저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는 아예 주위에 입을 닫은 이유다. 정다빈 기자

-어머니와 오빠를 자살로 떠나보낸 경험이 인생의 행로도 바꾸게 한 게 아닌가 싶었어요.

“엄마를 잃고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도움을 너무나 받고 싶었어요. 저는 애도상담을 받아본 적도, 자조모임을 해본 적도 없거든요. 심리상담을 공부하면서 저 같은 사람을 돕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걸 보셨죠.

“그날따라 제가 늦잠을 잤어요. 일어나선 터덜터덜 밥상에 가 앉았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상추에 뭔가를 싸서 드시고는 쓰러졌죠.”

놀란 그는 어머니를 잡고 흔들었지만 어머니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울면서 아버지를 찾았다.

-어떻게 됐나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리어카에 싣고 어디론가 가셨어요. 당연히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시지 않았죠. 유난히 기억력이 좋았던 데다 그날 일은 더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돌아올 줄 알았던 어머니가 안 오셨으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날 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집에 오셨어요. 그런데 어느 누구도 어머니 얘기를 안 하더라고요. 가장 어렸던 저만 계속 물었죠. 그런데 제가 입을 여는 순간 집 안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어요. 그래서 눈치로 알았죠, 엄마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걸.”

-어른들은 뭐라고 얘기하던가요.

“제가 집요하게 ‘엄마 언제 오냐’고 하니까, 할머니가 ‘네 엄마, 바닷속에 빠뜨렸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됐죠. ‘왜 살아있는 엄마를 바다에 빠뜨렸지, 엄마는 얼마나 추울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할머니가 왜 그러셨을까요.

“아마 그렇게 말해야 제가 다시는 물어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고 ‘왜 그랬을까’ 그 답을 찾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때는 사실 답을 찾고 싶은 게 아니라 엄마가 보고 싶었어요. 끊임없이 엄마를 기다렸어요. 나중에 심리상담을 공부하면서 엄마가 우울증이 정말 심한 상태였다는 걸 알게 됐죠. 저 역시 (선교사가 돼서) 필리핀으로 이주했을 때 우울증에 시달렸거든요. 원래 외향적이고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인데도 적응이 쉽지 않더라고요. 밥을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어요.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죠. 그런 경험을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자살은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가 아니라, 마치 질병으로 인한 죽음 같은 거라는 걸요.”

-그때 어머니 생각이 났군요.

“어머니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어머니는 눈앞에 보이는 딸을 버리고 간 것이 아니라 밥상에서 밥을 먹는 딸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픈 상태였다는 걸 이해하게 됐죠.”

◇“너네 엄마가 너 버리고 죽었다며”

그는 무엇보다 세상에 할 말이 많았다. “자살 유가족에게 필요한 건 위로와 돌봄인데도 냉대와 비난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그가 되물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나요?” 정다빈 기자

그는 무엇보다 세상에 할 말이 많았다. “자살 유가족에게 필요한 건 위로와 돌봄인데도 냉대와 비난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그가 되물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나요?” 정다빈 기자

-어머니가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나요.

“어머니가 ‘전쟁고아’였다고 들었어요. 한국전쟁으로 부모님을 잃어버린 거죠. 어느 누구도 의지할 곳이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결혼했는데, 그 집은 며느리라는 존재의 인격을 말살하는 곳이었죠. 예를 들어, 제가 할아버지와 생일이 같아요. 집안에서 할아버지 생신은 엄청 중요한 날이었죠. 생신이 다가오면 몇 날 며칠을 음식 준비에 매달렸어요. 제겐 행복한 생일상이었죠. 그런데 알고 보니 엄마는 허리를 숙이기도 어려운 만삭일 때도 부엌에서 생신상 준비를 하다가 저를 낳으셨던 거예요. 그런 인생을 사신 분이죠.”

그는 그 외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일화를 얘기했다. 그의 어머니가 시가에서 당한 일들은 학대에 가까웠다.

-나중에 누군가가 어머니를 바닷물에 빠뜨린 게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거라는 걸 알게 됐을 때는 어떠셨나요.

“사실, 바로 알긴 알았어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저니까, 제가 경찰에게 증언을 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온 동네에 바로 소문이 난 거죠. ‘다섯 살 애가 그렇게 말을 잘했다더라’부터 온갖 얘기가 돌았어요. 어른들이 저를 볼 때마다 ‘아이고, 너희 엄마가 너 버리고 죽었다며’, ‘몹쓸 사람이야. 네 엄마가 너 버리고 죽은 거야’ 같은 말들을 했어요. 자살이란 단어의 뜻은 잘 몰랐지만, 상황은 짐작했죠.”

-여러 감정이 들었을 것 같아요.

“실연당한 기분 같았어요. 엄마라는 존재는 저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엄마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는데. 게다가 어리니까 엄마가 나를 버리고 간 거라는 사람들의 말을 믿었죠. 그래서 너무 화가 났어요. 그런데 또 한편으론 엄마가 그리웠죠. 그런 양가감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쯤 뒤엔 오빠가 떠났어요.

“돌이켜 보면 오빠의 삶은 절망의 연속이었을 거예요. 오빠는 어릴 때부터 기대를 많이 받고 자랐어요. 공부도 잘했고요. 그런데 새어머니가 집에 들어오면서 아예 공부할 길이 막혀버렸죠. 중학교만 마치고 사회로 나가야 했으니까. 그러다 사랑했던 사람하고 헤어지면서 큰 절망에 빠진 것 같아요. 1년 정도 칩거만 했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어요. 나중엔 너무 말라서 거의 뼈만 남은 상태였죠.”

-오빠의 마지막을 보신 건가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다급히 달려갔어요. 오빠의 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죠. 오빠의 온몸이 새카맣게 변해서 비틀어져 갔어요. 그때 오빠가 외친 말이 이거였어요. ‘저 너무 살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그 말을 하면서 숨이 멎었어요. 오빠는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끝내고 싶었던 거죠.”

-오빠의 마지막 말에 여러 의미가 담겼네요.

“네, 오히려 ‘오빠는 정말 잘 살고 싶었구나, 너무나 잘 살아 보고 싶었구나. 그런데 그럴 환경이 허락되지 않으니 처절하게 아프고 절망했구나. 그 좌절이 얼마나 깊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살고 싶어요”라는 오빠의 마지막 말

그가 “나는 자살 유가족이에요”라고 말한 건 심리상담학으로 박사 과정을 밟을 때였다. ‘상실’에 관한 수업 시간이었다. 그는 “거의 통곡을 했다”고 떠올렸다. 정다빈 기자

그가 “나는 자살 유가족이에요”라고 말한 건 심리상담학으로 박사 과정을 밟을 때였다. ‘상실’에 관한 수업 시간이었다. 그는 “거의 통곡을 했다”고 떠올렸다. 정다빈 기자

-가족 중 두 사람을 하늘로 보낸 충격이 정말 컸을 것 같아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죽음이라는 걸 잘 모를 나이였죠. 그런데 나중에 커서 오빠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오빠가 한 줌 재가 된 걸 봤을 때는 정말 뼈마디가 다 부서지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말들로 큰 상처를 받았잖아요. 오빠의 장례 이후엔 좀 위로를 받을 곳이 있었나요.

“그땐 아예 오빠의 죽음을 주위에 말하지 않았어요. 오빠까지 그렇게 죽었다고 하면 얼마나 더 많은 언어폭력에 시달릴까, 얼마나 더 많은 낙인이 찍힐까 두려웠죠. 제가 원래 잘 웃는 얼굴이어서 아마 주변 사람들도 제 안에 어떤 슬픔이 있는지는 잘 몰랐을 거예요. 말하지 않았으니까, 위로받을 수도 없었죠.”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마음을 남길 곳은 일기장이었다.

-일기는 왜 쓰기 시작하셨나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들어갔더니 선생님이 일기 쓰는 법을 가르쳐주더라고요.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 어른들이 엄마의 죽음을 어디에도 말하지 말라고 하니까 일기장에 썼어요. 선생님한테 제출하지 않는 일기장에. 비밀 일기장은 저의 유일한 친구였죠. 뭐든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불이 나면 가장 먼저 챙기고 나올 1순위 재산 목록이었어요. 지금까지도 일기를 쓰고 있고요.”

-일기에 남다른 의미가 있겠네요.

“일기와 기도가 제게는 정말 큰 위로가 됐죠.”

-에세이집은 왜 쓰기로 마음먹은 건가요.

“심리상담 박사 과정 때 수업 시간에 상실의 경험을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엄마의 죽음 이후 제 마음이 어땠는지 그때 질문을 받아봤죠. 제가 통곡을 했어요. 겉보기엔 씩씩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면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깊은 슬픔이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제가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제가 경험한 이 치유와 회복을 다른 자살 유가족과 나누고 싶었어요. 애도로 초대한다는 의미로 쓰게 됐죠.”

-심리상담을 공부하면서 어머니와 오빠의 죽음을 제대로 바라보게 된 거군요.

“제 삶을 제대로 해석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박사과정 때는 아예 모든 과제를 자살 유가족과 관련한 주제로 잡았죠. 관련 논문들을 읽으면서도 너무 많이 울었어요. 이 논문에 쓰여 있는 얘기나 이론을 나는 삶으로 통과해서 왔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간 묻어두었던 감정을 응시하기 시작하면서 애도의 과정을 지나올 수 있었어요.”

-그때 처음 ‘나는 자살 유가족입니다’라고 얘기하기 시작하신 건가요.

“네, 그러다가 2018년 월간 ‘좋은생각’에서 에세이 공모전을 할 때 저의 경험을 주제로 글을 썼죠. 그로부터 계속 말하고 쓰기 시작했어요.”

-‘나는 자살 생존자다, 나는 자살 유가족이다’라고 말하고 쓰기 시작하면서 어떤 내적·외적 변화가 일어나던가요.

“혼자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를 짓밟으니까 강한 척해야 했어요. 주위 사람들에게 저는 언제나 꿋꿋하고 씩씩하고 리더십 있는 사람이었죠. 달리 말하면, 그래서 위로받을 곳도, 기회도 없었어요. 그런데 저한테 이런 큰 슬픔이 있다는 걸 말하기 시작하니까 주위에서 ‘오랜 친구였는데도 몰랐다. 얼마나 힘들었니’라고 얘기해주더라고요. 위로받아 본 적 없는 인생에 처음으로 위로가 흘러들어왔죠. 저는 너무 여린 사람이었는데 있는 힘을 다해서 마치 여전사처럼 살아왔던 거예요. 더 이상 가면을 쓰지 않고 상처 입은 자로, 연약한 자로, 흔들리는 자로, 보잘것없는 자로, 그래도 되는 자로, 그냥 나로 살아갈 수 있게 되더라고요. 엄청난 자유가 임한 거예요.”

-아직도 우리 사회엔 자살을 ‘쉬쉬해야 하는 죽음’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요. 자살 사별을 경험한 이후 가족끼리도 서로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기도 하고요. 우리가 왜 자살을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자살은 사회적인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사회 구조를 어떻게 바꿔 나가야 될지를 고민해야 하죠. 자살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위로와 돌봄이에요. 그런데 되레 유가족이 수치심과 죄책감에 짓눌려서 자기 일상을 살아가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져야 돼요. 자살 유가족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 상실 이후의 삶에서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시면 좋겠다고요. 겨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봄이 오고 여름도 오고 가을도 오는 인생을 잘 살아가실 수 있다고.”

◇자살하면 지옥 간다고요?

그는 “책 ‘슬픔은 발효 중’을 쓸 때는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이 책을 읽고 슬픔이 씻겨나가는 듯 대성통곡했다는 자살 유가족의 얘기를 듣고 이 책을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다빈 기자

그는 “책 ‘슬픔은 발효 중’을 쓸 때는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이 책을 읽고 슬픔이 씻겨나가는 듯 대성통곡했다는 자살 유가족의 얘기를 듣고 이 책을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다빈 기자

-심리상담을 공부하고 나서 자살 유가족의 애도상담을 하고 계시죠.

“애도상담을 할 때 제가 숨 고르기를 많이 해요. 저의 말 한마디, 단어 하나에 얼마나 쉽게 감정선이 다치고 상처를 받을 수 있는지 알기 때문에. 다행히 제가 통과해 온 삶의 시간 자체에 내담자들이 많이 위로받는 것 같아요. 작년 9월부터는 자살 유가족 글쓰기 모임 ‘글피움터’도 운영하고 있거든요. ‘글쓰기로 슬픔을 꽃피우다’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에요. (상담이나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한 사람이 트라우마에 머물지 않고 외상 후 성장을 이뤘을 때 파생되는 힘이 엄청나다는 걸 느껴요.”

-어머니와 오빠의 죽음을 직시하고 애도의 과정을 거쳐오면서 자신에게 하는 말도 많이 바뀌었나요.

“네, 스스로를 비난하는 말이 아니라 ‘경임아, 살아오느라 애썼다. 너무 수고 많았다’는 말을 많이 하죠. ‘슬픔은 발효 중’을 쓰는 내내 어떻게 해야 자살 유가족의 목소리가 제대로 사회에 전해져서 인식이 개선될까 고민했어요. 쓰는 과정은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스스로 끊임없이 응원하면서 썼죠.”

‘슬픔은 발효 중’에서 그는 기독교 내부의 뿌리 깊은 편견도 거론한다.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교회 안에서 오가는 그런 말들에 그 역시 큰 상처를 받았다.

-개신교 신자이자 선교사로서 그런 시선에는 어떻게 대처했는지도 궁금해요.

“저는 목사이기도 해요. 그런데 목회상담이 아니라 일반 심리상담을 전공으로 택한 이유는 그런 개신교 안의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심리상담을 전공한 전문가로서 목소리를 내야 설득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직도 교회 안에선 ‘우울증은 마귀의 공격이다.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있어요. 질병에 걸렸을 때는 병원에 가고 약을 먹어야 하듯 정신질환도 마찬가지잖아요.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도 그래요. 그것이 인간이 말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일까요.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죠.”

◇슬픔은 흘러야 한다

“애썼다. 살아오느라 정말 수고가 많았다.” 애도의 여정을 지나온 박경임씨가 스스로에게 해주는 말이다. 정다빈 기자

“애썼다. 살아오느라 정말 수고가 많았다.” 애도의 여정을 지나온 박경임씨가 스스로에게 해주는 말이다. 정다빈 기자

-어머니와 오빠의 죽음이 내 인생에 준 의미는 무엇일까요.

“엄마와 오빠를 자살로 잃었다는 저의 정체성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엄마와 오빠를 잃어서 경험한 삶의 숱한 어두움으로 저는 더 깊이 헤아리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됐다고 생각해요. 상처를 겪은 사람도 그 힘든 시절을 통과해 꽃을 피울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경험한 일들로 저는 ‘너처럼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니’란 말도 참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어둠과 고통의 시간을 통과했기에 다른 사람을 더 깊이 헤아릴 수 있는 이해와 긍휼을 가진 사람’이 됐죠. 그래서 ‘슬픔은 발효 중’에 이렇게 썼어요, 그 상실의 경험은 ‘풍성한 어둠’이었다고.”

-‘애도’ 시리즈의 부제가 ‘자살 사별자들이 마음으로 쓰는 부고’예요.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와 오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엄마에게 엄마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훨씬 더 엄마를 많이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어요. 오빠에게는, 인생에는 여러 계절이 있는데 오빠는 혹독하고 추운 겨울만 살다가 가서 어떡하냐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어요. 내가 죽지 않고 살아보니까 봄도 오더라, 꽃도 피더라, 열매도 맺더라. 그런데 오빠의 계절엔 겨울만 있어서, 오빠가 겨울만 살다가 가서 너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는 자살 유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목소리가 세상에 들리길 바라 ‘애도’ 인터뷰에 응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애도를 시작하면서) 슬픔은 흘러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자살 유가족이 말할 곳이 없어 말하지 못하면 슬픔이 흘러가질 못해요. 이 인터뷰로 슬픔이 흘러가면 좋겠어요.”

슬픔의 통로, 그래서 슬픔은 흘려보내고 생명의 시간을 맞이하는 창구가 되는 것. 그건 ‘애도’ 시리즈를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가, 울면서 웃었다.


※오디오로 듣기 : ‘자살 사별자들이 마음으로 쓰는 부고-애도’ 시리즈는 오디오 콘텐츠로도 제작됐습니다. 이곳을 클릭하면 오디오 콘텐츠로 이동합니다. 링크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주소창에 다음 주소(https://grief.hankookilbo.com/)를 복사해 붙이면 됩니다.

※‘애도’팀은 자살 사별을 경험한 분들의 사연을 받습니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 동료의 자살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신다면 luna@hankookilbo.com으로 사연을 보내주세요. 몇 편을 골라 애도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고선규 임상심리학 박사(한국심리학회 자살예방분과 위원장)의 조언을 전할 예정입니다. 고인을 기리며 쓴 ‘나만의 부고’도 좋습니다. 따로 기사로 정리해 싣겠습니다.

김지은 버티컬콘텐츠팀장
사진= 정다빈 기자
오디오·영상= 박고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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