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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만에 '계엄법 무죄' 받은 변호사, "이제야 족쇄 벗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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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만에 '계엄법 무죄' 받은 변호사, "이제야 족쇄 벗었습니다"

입력
2024.03.26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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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무죄 확정, 오세범 변호사]
79년 YWCA 위장 결혼식으로 징역형
50대 변호사 돼... 참사 피해자들 도와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에 삶 바칠 것"

1980년 5월 19일 광주 금남로에서 벌어진 시위 도중 한 시위대가 계엄군에 체포되고 있다. 1979년 YWCA 위장 결혼식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을 확인시켜준 계기가 됐고,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 5월 19일 광주 금남로에서 벌어진 시위 도중 한 시위대가 계엄군에 체포되고 있다. 1979년 YWCA 위장 결혼식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을 확인시켜준 계기가 됐고,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9년 11월 24일 서울 명동성당 건너편 YWCA회관. 연세대 복학생 홍성엽과 윤정민의 결혼식이 열렸다. 하객이 500명이나 들어찰 정도로 예식은 성대했다. 하지만 식장에 울려 퍼진 건 결혼행진곡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성명서 낭독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10월 26일)한 지 한 달밖에 안 돼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시절이었다. 간선제로 대통령을 뽑는 '체육관 선거'에 반대하기 위해 시민들이 결혼식으로 위장해 계엄군의 삼엄한 경비를 뚫어낸 것이다. 이른바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다.

스물네 살 대학생 오세범(69)도 그 자리에 있었다.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감옥에 갔다 출소한 지 100일을 조금 넘긴 때였다. "직선제를 위해 원로, 시민, 대학생들이 모였어요. 전 '결혼식' 준비를 도왔죠. 유인물을 인쇄하고 연락을 돌리는 작은 일이었습니다."

"이성과 분별의 시대로 나아가야"

오세범 변호사가 15일 서울 서초구 법부법인 다산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오세범 변호사가 15일 서울 서초구 법부법인 다산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작은 일'의 대가는 컸다. 국가는 계엄법 위반 딱지를 붙여 청년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대학생은 훗날 변호사(법무법인 다산·사법연수원 43기)가 됐다. 그러나 부당한 '유죄'의 주홍글씨는 45년 동안 지워지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김길호 판사가 오 변호사의 재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하고서야 죄를 벗었다. 그는 피고인 최후 진술서에 이렇게 썼다. "무죄가 된다면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무거운 훈장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외부 편견의 족쇄에서 풀려나는 느낌일 겁니다. 이 과정으로 야만에서 이성의 시대로, 광기에서 분별의 시대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무죄는 확정됐다.

15일 한국일보와 만난 오 변호사의 독특한 이력은 재심 무죄에 그치지 않는다. 서울대에서 '잘린' 그는 기술을 배워 한 제약회사 보일러실에 취직했다. '세상물정 몰라 민주화운동한다'는 수군거림이 늘 마음에 걸려 한 선택이었다. 1987년 노동자 투쟁이 폭발했을 때 삶은 다시 한번 변곡점을 맞았다. "민주화가 되니 노동자들 사이에선 생존 욕구가 터져 나왔어요.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어 총무부장을 맡았더니, 바로 해고하더라고요." 민주화를 꿈꾸던 청년은 '해고노동자'가 됐다.

옥살이·해고·변호사... 민주주의 여정

오세범 변호사가 15일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다산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오세범 변호사가 15일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다산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신용주 인턴기자

이때 당시 노동운동 사건을 주로 변호했던 김칠준 변호사를 알게 됐다. 법률사무소 사무장, 내일신문 창립 멤버 등으로 일하다 40줄이 넘어가자 '이대로 살긴 아쉽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 변호사의 말이 떠올랐다. 오 변호사는 "변호사는 오롯이 '개인으로서 사회를 바꾸는 데에 일조할 수 있구나', 그런 걸 배웠다"고 회상했다. 마흔 살에 시작한 공부는 15년이 지나서야 끝났다. "옥살이, 해고, 사법고시까지. 제게 '도전 본능'이 있는 거 아닌가 해요. 하하." '최고령 사시 합격자'도 이력에 추가됐다.

2014년 2월 어렵게 변호사 일을 시작했지만 '돈'을 좇지 않았다. 개업 두 달 만에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뉴스를 보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가족들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2학년 1반 담임 변호사'로 유족들 곁을 지켰다. 지난 10년간 세월호부터 이태원 참사까지 여러 국가재난 피해자들과 함께했다.

세월호 10주기 전국시민행진에 참가한 시민들이 16일 서울시의회 앞에 마련된 세월호 기억관으로 행진 도중 이태원참사 분향소 앞에 멈춰 묵념하고 있다. 뉴스1

세월호 10주기 전국시민행진에 참가한 시민들이 16일 서울시의회 앞에 마련된 세월호 기억관으로 행진 도중 이태원참사 분향소 앞에 멈춰 묵념하고 있다. 뉴스1

내달이면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오 변호사는 "집단 재난이 힘든 지점은 남은 가족들이 참사 피해에 더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회로부터 일종의 박해를 또 받는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형 참사가 피해 회복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정쟁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상황도 안타깝다. 그는 "국가적 재난엔 정부, 관계부처 등 모두의 잘못이 일정 부분 있는데도 정작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은 없다"면서 "피해자 입장에서의 정의는 무엇이고 생명과 안전이 왜 중요한지를 짚는 게 해법의 핵심"이라고 짚었다.

재심 무죄 당사자, 해고 노동자, 최고령 합격생, 인권변호사. 여러 정체성을 지닌 생의 궤적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결국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대의를 위해 헌신한 그의 시선은 이제 풀뿌리 민주주의로 옮겨가고 있다.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낸 지 30년이 지났건만, 선거 때만 국민이 주인일 뿐 삶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 느낌이에요. 주민자치회장 등을 맡으며 마을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여생을 바치겠습니다."

이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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