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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전후 험난했던 미군 해산 작전

입력
2024.03.21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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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매직 카펫 작전- 1

1945년 말 본국 귀환 수송선으로 활용된 미 해군 항공모함 USS 엔터프라이즈호(CV-6) 격납고의 미군들. 미 해군 사진

1945년 말 본국 귀환 수송선으로 활용된 미 해군 항공모함 USS 엔터프라이즈호(CV-6) 격납고의 미군들. 미 해군 사진

2차대전 전시 미군은 최대 1,600만 명에 달했고 나치 독일이 항복하던 무렵에도 1,220만 명이 군복을 입고 있었다. 육군이 587만 명으로 가장 많고, 해군이 338만 명, 육군 공수부대 240만 명, 해병 약 48만 명이었다. 약 3분의 2인 800만 명이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 배치돼 있었다.
1943년 미 육군 참모총장이던 조지 마셜은 종전 후 그들을 신속히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한 이른바 ‘매직 카펫(Magic Carpet) 작전’ 계획을 지시했다. 작전 임무를 맡은 국방부 전쟁수송국(WSA)은 장병 복무 기간과 훈포장 경력, 어린 자녀 유무 등 가족관계를 점수화해 순서에 따라 하루빨리 고향의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계획을 수립했다.

독일 항복 직후인 45년 6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약 15개월간 항공모함을 비롯한 거의 모든 전함과 군 수송기가 투입됐지만, 저 작전은 전후 점령지 치안 등 다양한 군사적 수요로 인해 상당한 차질을 빚었다. 전쟁을 치러 승리한 군인들만큼 통제하기 힘든 무리도 드문 법이다. 45년 12월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필리핀 마닐라 주둔군 4,000여 명은 송환이 불발된 데 분노해 집단 시위를 벌였고, 이듬해 1월 본국에서도 군인 가족 등 2만여 명이 육군 본부로 행진하는 시위를 벌였다. 군 당국은 시위 주동자 등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실제로 처벌은 하지 못했고, 대신 제대 점수제를 완화해 군 해산 속도를 높이는 한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병 기본훈련을 기존의 17주에서 8주로 단축했다. 해외 복무를 2년 연장할 경우 병사 가족 유럽여행 특전을 제공하기도 했다.
전시 징병제도가 47년 3월 31일 종료되면서 자원병에 의존해야 했지만, 미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47년 한 해 동안 자원 입대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저 작전이 마무리된 47년 중반 미군 병력은 약 150만 명으로 2년 만에 거의 90%가 줄었다.(계속)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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