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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의 편지가 보여준 '3김시대'의 품격

입력
2024.03.12 19: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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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88년생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와 93년생 곽민해 뉴웨이즈 매니저가 2030의 시선으로 한국정치, 한국사회를 이야기합니다.

1988년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종필 공화당 총재,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연합뉴스 자료사진

1988년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종필 공화당 총재,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연합뉴스 자료사진

제13대 총선이 끝난 직후인 1988년 5월 2일, 신민주공화당 총재였던 김종필은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에게 편지를 보냈다. 야 3당 지도자들이 모여 정국을 풀어나가자는 내용이었다. 제13대 총선이 어떤 선거였나.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하면서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노태우가 대권을 거머쥔 뒤였다. 국민의 실망은 여소야대 구도로 표출됐다. 국회는 '1노3김'의 출신지를 중심으로 사분할되었다. 여당인 민정당은 125석, 야당은 평화민주당이 70석, 통일민주당이 59석,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가져갔다.

대선 패배 직후라 양김 사이엔 아직 앙금이 남아 있었다. 김종필은 야 3당이 하기에 따라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전화하거나 사람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굳이 붓으로 편지를 써 내려갔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의와 친밀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화는 양방성이 전제돼야 한다. 만일 김종필의 제의를 양김이 거절했다면 회담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의 거인들은 흔쾌히 화답했다. 그들 또한 직접 손으로 쓴 편지로. 그렇게 5월 18일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야 3당 총재들의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3김은 5공 비리 조사,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등을 위한 5개 특별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한국 현대사에 어느 장면이 안 그렇겠느냐만 20세기 말이야말로 '3김 시대'라고 일컬을 수 있는 시기였다. 한국 정치는 오롯이 그 세 명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런 까닭에 3김 정치는 1990년대에 이미 구태로 취급받기도 했다. 김영삼의 신한국당을 계승한 한나라당조차 창당선언문에 "3김시대 청산"을 내걸 정도였다. 보스정치, 권위주의, 지역주의 등으로 상징되던 3김의 정치는 '새 시대의 첫차'를 자임한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하며 사실상 막을 내렸다.

지난 7일 김영삼 전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가 별세함에 따라 3김과 그 배우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3김시대가 완전히 끝난 시점에서, 그 뒤에 이어진 시대는 이전보다 나아졌는가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내에서 총재의 권한은 해체되었고 당원의 참여는 늘었다. 미디어를 통한 소통도 활발해졌다. 하지만 정치의 수준이라든가 품격이 이전보다 더 높아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성 청년'을 자처하는 30대 후보자조차 지역구 현수막에 '윤석열 정권 심판'을 핵심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모습은 그 미래를 어둡게 한다. 의견의 다양성을 보장한다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강성 정치인들의 등용문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이런 게 정치 개혁이라면 차라리 3김시대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정치를 흔히 '사회적 갈등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가르친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갈등 조정은 정치의 핵심 기능이다. 협상은 사라지고 갈등만 남은 상황이라면 지금까지 뭐가 구태고 뭐가 혁신인지 가졌던 고정관념을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종필 전 총리는 훗날 "언론이 3김시대라고 부른 1990년대 정치는 나와 김영삼·김대중의 역정과 신념이 흩어져 부딪히고 새로 조합돼 재구성되던 공간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손잡아야 할 땐 손잡는 정치가 보고 싶다.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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