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서울 대학로의 소극장 ‘학전’은 배울 학(學), 밭 전(田)을 쓴다. 문화예술계 인재들의 ‘못자리’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다. 설립자인 김민기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못자리 농사로 사람을 촘촘히 키우지만,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도록 한다. 33년간 이 역할을 차고 넘치도록 해온 학전이 15일 문을 닫는다.
□ 학전은 1991년 개관해 배우 황정민, 설경구, 김윤석, 조승우, 이정은, 방은진, 장현성 등을 배출했다. 또 고 김광석, 박학기, 이소라, 노영심, 윤도현, 안치환 등이 꿈을 펼쳤다. 김광석은 이곳에서 1,000회 공연을 하며 ‘전설’이 됐다. 김 대표가 연출한 ‘지하철 1호선’은 73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독일 원작이지만 한국적 각색과 번안으로 한국 뮤지컬의 대명사가 됐다. 김 대표는 ‘아침이슬’ ‘상록수’의 작사·작곡가로 대중에게 유명하지만, 뛰어난 극작가·연출가이기도 하다.
□ 김 대표는 ‘못자리’라는 정체성에 충실했다. ‘지하철 1호선’이 15년간 4,000회 공연을 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지만, 2008년 돌연 중단했다. 이후론 간헐적으로만 공연을 했다. ‘성공’에 가려 해야 할 것을 놓칠 수 없어서다. 김 대표는 어린이극·청소년극을 중시했고, 그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 학전이 주최한 마지막 공연도 아동극 ‘고추장 떡볶이’였다.
□ 폐관 예정이 알려지자 배우·가수들이 나서 학전을 살리고자 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학전 소극장을 재정비해 정체성을 계승하는 공간으로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뜻을 잇되 학전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암 투병 중이다. 장현성씨는 유퀴즈에 출연해 “김민기 선생님은 관객이 없어도 배우들에게 최소 개런티를 책정해 지급했고, 큰 공연이 망하자 집을 팔아 개런티를 주려고 해서 ‘못 받겠다’는 배우들과 싸웠다”고 했다. 학전의 폐관을 마주하며 어떤 이름은 계속 사용하기보다, 그 이름을 아름답게 만든 이의 소유로 온전히 남겨야 할 때도 있다는 걸 배운다.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