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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죽은 내 아들… 엄마는 22년 만에 국가에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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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군에서 죽은 내 아들… 엄마는 22년 만에 국가에 이겼다

입력
2024.03.06 04:3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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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의문사 '살해 후 자살' 결론
선임 가혹행위·부실수사 추가 확인
법원 "국가가 정신적 손해 배상해야"


전방 지역의 해안 초소. 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없음.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방 지역의 해안 초소. 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없음. 한국일보 자료사진


"탕! 탕!"

2002년 7월 3일. 제2연평해전 발발 나흘 뒤. 이날 낮 강원 강릉시 인적 드문 바닷가의 해안 초소에서 별안간 수 발의 총성이 울렸다. 입대 6개월 차 박모 일병이 선임인 최모 상병과 2인 1조로 경계근무를 서던 곳이었다.

다음 근무조가 초소로 들어서자 참상이 드러났다. 최 상병은 왼쪽 손목, 왼쪽 옆구리, 오른쪽 겨드랑이에 총을 맞았고, 박 일병은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둘 다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조사를 맡은 헌병대는 5개월 뒤 '선임병 살해 후 자살'이라고 간단히 결론 내렸다. 사고 전날 질책을 당한 박 일병이 근무 중 최 상병과 다투다가 K2소총으로 공포탄 3발, 실탄 3발을 쏘았고, 처벌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육군 전공사망심사위원회 판단도 같았다.

부실수사 정황 수두룩

한순간에 자식을 잃은 박 일병 가족은 조사 결과를 납득하지 못했다.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사고 현장의 시신과 총기 위치에 대한 기록은 △소방관 △대대장 △군 수사당국의 것이 제각각이었다. 최소 7발을 쐈다는 조사 결과와 달리 발견된 탄피는 3개뿐이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 보고서 캡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 보고서 캡처

천장과 의자 등에서 채취된 혈흔은 사건 발생 3개월이 지나고서야 감정이 이뤄졌는데, 이미 부패한 상태였다. 사고 발생 한 달 만에 초소가 철거되는 바람에 최 상병의 혈흔은 남아있지 않았다. 여름이라 장갑을 끼지 않은 상태였지만, 총기 어디에서도 지문이 검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육군본부는 2005년 3월 다시 '살해 후 자해사망'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3년간 검토한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2009년 10월 '진정 기각' 결정을 하고 3개월 뒤 재차 '자료 부족에 따른 진상규명 불능'이라고 통보했다. 그동안 가해자로 지목된 박 일병은 국군병원 냉동고에 잠들어 있었다.

16년 만에 순직 인정

유족들은 박 일병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사고'를 쳤다는 결론을 수긍하지 않았다. 실체가 드러난 건 2018년부터.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 재심사에서 사고 이면에 △최 상병의 가혹행위 △부대∙신상관리 소홀 등이 있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박 일병의 사망 원인은 '자살'에서 '순직'으로 변경됐다.

유족은 마침 출범한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진상위)에 군 수사절차의 문제를 지적하는 한편, "아들(박 일병)은 최 상병을 죽이지 않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라고 진정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진상위는 3년을 조사했다. 함께 사망한 최 상병은 이전 부대에서 후임병 8명을 상습 폭행해 2002년 3월 전출된 것으로 드러났다. 영창 15일 징계가 확정됐지만 부대 인원 부족을 이유로 7월 말 해안초소 철수 이후로 집행이 미뤄졌다.

이런 상황에서 최 상병은 박 일병을 포함한 11명의 후임병을 또다시 폭행하고 얼차려를 시키며 "자살하게 해주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사고 전날엔 박 일병에게 세 차례에 걸쳐 욕설하며 발길질한 것으로 조사됐다. "두고 보자"던 최 상병은 이튿날 오전 사고 발생 초소 근무를 자원하며 야간 근무를 마치고 자던 박 일병을 부사수로 지목했다. 동료 병사들은 "근무에 투입된 박 일병이 안절부절못하며 떨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정부 항소로 싸움은 다시 시작

진상위는 박 일병의 자살 원인으로 선임병의 가혹행위와 병력 관리 소홀을 지목했다. 허위문서 작성 등 군 수사당국의 사망원인 은폐∙조작도 지적했다.

그렇게 이어진 국가배상 소송. 서울중앙지법 민사29단독 김병휘 판사는 지난달 7일 소송을 낸 박일병 모친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헌병대는 병역의무 이행을 위해 자녀를 군대에 보낸 보호자에게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야 할 의무가 일반 수사기관보다 더 높음에도, 수사상 필요한 조치를 충분히 다하지 못했다"며 "원고가 입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질타했다.

살아 있었다면 40대 든든한 가장이 되어있었을 아들. 엄마는 그 아들 전역날이 20년이나 더 지난 시점에서 '국가의 책임이 있다'는 한마디를 겨우 받아냈다.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정부는 판결에 불복해, 지난달 22일 항소했다.

최다원 기자
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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