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체불' 사태에 분위기 흉흉한 북중 접경지역
중국 공안, 허룽 길목서 차량 수색 후 출입 막아
주선양북한총영사관, 임금 체불 사태 조사 나서
북 노동자 불만 증폭... 현지 "폭동 수준은 아냐"
"여기 왜 왔나? 차를 돌려 돌아가라."
20일 중국 동북 지역 지린성 허룽시의 한 시골길. 허룽 시내에서 왕복 2차선 도로로 15㎞ 정도 달리자 난데없이 공안 검문소가 등장했다. 중국 공안 5, 6명이 기자가 탄 차량을 둘러싸고 트렁크 등을 수색한 뒤 여권을 요구했다.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와 숙소 등을 캐묻더니 "여기서부터는 출입 금지다. 몰랐냐"고 되물었다. 북한 함경북도 무산군과 마주 보고 있는 북중 접경 지역이기는 하나 국경까지는 약 30㎞나 떨어져 있는데도 중국은 국경 수준의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유독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는 이유는 허룽이 북한 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는 특수 지역이기 때문이다. 북한과 중국은 2016년 허룽시 난핑 지역에 '변경경제합작구'를 건설했다. 면적은 최소 4.27㎢에 달한다. 의류·수산물· 의료기기 가공이 이뤄지는 이곳에 북한은 대규모 노동자를 파견, 외화벌이를 하고 있다.
이런 행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위반이다. 안보리는 2017년 9월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북한과의 합작 투자를 금지한 결의 2375호를 통과시킨 데 이어 2019년 12월에는 북한 노동력 사용을 금지하는 결의 2397호를 통과시켰다. 북한 해외 노동자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핵 개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치 자금으로 쓰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각종 결의를 무시하며 북중 합작 경제구역을 운영하고 있고, 이런 상황을 최대한 숨기려 하고 있다. 변경경제합작구는 허룽시 주민조차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다고 한다. 실제 공단이 있는 난핑 지역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오가는 차량은 극히 드물었다. 기자가 탄 차량을 쫓아다니는 공안 감시 탓에 공개적으로 사진을 찍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임금 못 받아 뿔난 북 노동자들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이곳 북한 노동자들의 불만은 폭증하고 있었다. 회사 측에 맡겨둔 임금을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다.
북한 노동자들이 근무 중인 피복 생산업체 관계자 A씨는 한국일보에 "노동자들 사이에서 임금을 제대로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분위기가 매우 흉흉하다"고 전했다. A씨에 따르면 접경 지역 다수 공장들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4년간 막혀 있는 북한 국경이 열리면 본국으로 돌아가 본사로부터 임금을 받으라'며 임금 지급을 미뤄왔다. 하지만 최근 북한으로 돌아간 일부 노동자가 임금을 받지 못했고, 이 사실이 중국 내 북한 노동자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노동자들이 회사 측에 태업과 파업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도 심각성을 인지한 듯했다. 대북 무역업에 종사해 온 B씨는 "최근 주(駐)선양북한총영사관 측이 북한 노동자들이 근무 중인 공장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북한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이 임금 체불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제기했고, 이에 북측 무역회사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유용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품고 당국이 직접 실사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적잖은 공장들이 노동자 임금분을 회계 장부에 채워 넣느라 난리통"이라고 B씨는 전했다.
이와 관련,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최근 북한 국방성 산하 무역회사가 파견한 노동자들이 임금 체불에 화가 나 지난달 허룽시에 위치한 공장에서 시설을 점거, 폭동을 벌였다고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인질로 잡힌 관리직 대표가 노동자들에게 폭행당해 숨졌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에 앞서 고영환 통일부 장관 특별보좌역이 작성한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도 일본 산케이신문을 통해 전해졌다.
하지만 "폭동 수준의 반발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한 소식통은 "북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진 것은 맞는다"면서도 "북에 가족들을 두고 온 노동자들이 중국에서 집단 폭동을 일으키기는 쉽지 않다"라고 했다. 허룽시 변경경제합작구가 워낙 폐쇄적으로 운영되다 보니 소문이 다소 부풀려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공장 바깥 못 나오는 북 노동자
현재 중국에는 최대 10만 명의 북한 노동자가 제조 공장과 식당 등에서 근무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랴오닝성 단둥과 지린성 옌지·훈춘·허룽 등 주로 북중 접경 지역에 몰려 있다. 안보리는 대북 결의를 앞세워 북한 노동자를 철수시킬 것을 중국에 요구해 왔다. 이에 중국은 "국제 사회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겉으로는 밝혔지만, 이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접경 지역 기업인들과 중국 지방 공무원들이 이미 깊게 유착돼 있어 북한 노동자 고용을 묵인했고, 중국 중앙 정부 또한 북중관계를 고려해 지방 정부를 필요 이상으로 압박하지 않은 탓이다.
21일 찾아간 랴오닝성 단둥시 전안구의 한 피복 공장도 그중 하나다. 단둥은 압록강을 두고 북한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는 북중 최접경 지역이다. 북한 노동자 280여 명을 고용 중인 이 공장은 안보리 제재로 한국 의류 브랜드와의 계약은 끊겼지만 여전히 중국 의류 회사에 물건을 납품 중이었다.
이곳에서 안보리 제재 결의는 다른 나라 이야기인 듯했다. 공장 내부에는 수십 개의 형광등이 켜져 있었고, '웅웅' 하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들려왔다. 점심시간이 되자 북한 노동자로 보이는 여성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공장 건물을 나온 뒤 바로 옆에 위치한 식당 건물로 이동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공장 바깥출입은 제한적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공장 부지 안에 있는 식당, 기숙사, 운동장 정도가 이들의 평소 생활 공간이고 공장 바깥으로 나오는 일은 드물다는 게 현지 사람들의 설명이었다. 북한의 정치 기념일이 아니라면 주말 역시 근무하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 현지 소식통은 "사람(노동자) 자체가 '제재 품목'이다 보니 사실상 격리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북 노동자 중국 이어 러시아행 주목
다만 외교가에선 중국 내 북한 노동자 규모가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도 흘러나온다. 현재 중국 내 북한 노동자 대부분은 2020년 코로나19 확산 이후 북한이 국경을 봉쇄하면서 4년 넘게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북한으로선 기존 노동자들을 불러들이고 새 인력을 파견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중국이 이를 반길지는 의문이다. 대규모 신규 인력이 중국에 파견되는 과정에서 "중국이 또 대북 제재를 위반하고 있다"는 국제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북한 노동자의 러시아 파견이 급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현지 전망이었다. 이달 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산 사이 기차역에서 북한 노동자 300~400여 명이 목격됐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줄리 터너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14일 일본 도쿄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는 (북한이) 새로운 노동자 집단을 해외로 파견하려는 움직임을 목격하고 있다"며 사실상 러시아행 북한 노동자들을 지목했다.
북한이 노동자를 러시아에 파견하는 게 새로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해 9월 김정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과 북러정상회담 개최 후 양측의 밀착이 심화하고 있는 흐름을 고려하면 최근 포착된 300~400명은 북한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러시아행의 서막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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