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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수사의 배신

입력
2024.02.23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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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 자리 잡은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 모습. 고영권 기자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 자리 잡은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 모습. 고영권 기자


‘침대는 과학’이라는 광고가 관심을 끈 적이 있다. 카피에 과학이란 말을 넣었을 뿐인데 눈에 띄는 판매 증가로 이어졌다. 마법 같은 효과 때문에 과학은 지금도 여러 분야에서 신뢰도를 높이는 만능열쇠처럼 활용된다.

특히 '과학 수사'는 그 자체로 정확하고 빈틈이 없다는 인식을 주기 때문에, 최고의 수사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디지털포렌식이나 DNA 분석 등을 통해 미궁에 빠진 사건을 척척 해결하는 모습이 수시로 나온다.

하지만 과학 수사를 ‘지니의 요술 램프’ 같은 해결사로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2016년 공개된 ‘오하이오 이노센스 프로젝트’(잘못된 수사와 재판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을 석방하기 위한 활동) 조사 결과는 과학 수사의 배신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충격적이다. 미국에서 DNA 검사 결과를 토대로 수감됐다가 풀려난 325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54명이 잘못된 포렌식 증거 때문에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과학 수사는 오류가 없을 것이란 통념이 깨져 버렸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과학 수사를 통해 도출한 데이터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보다는 다른 자료와 비교하고 해석하는 주관적인 분석 작업을 거친다. 검사가 결론을 예단한 상태에서 감정 기관에 원하는 포렌식 결과를 넌지시 알려주면 직원들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똑같은 데이터를 두고도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건’을 ‘그럴 가능성도 있는 사건’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검사 출신인 마크 갓시 미국 신시내티대학 법학교수는 검찰 같은 관료주의 조직에선 감정을 맡은 직원이 수사기관 요구를 따라야 한다는 압박을 은연중에 갖게 된다고 분석했다.

심각성을 인식한 미국과학한림원에서는 ‘과학 수사 강화를 위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과학 수사에 오류가 만연한 이유는 감정을 맡은 직원들과 검찰 간의 종속적이고 친밀한 관계 때문이라고 봤다. 과녁에 화살을 쏴서 명중시키지 않고, 화살부터 쏜 뒤 주변에 과녁을 그려 넣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사기관의 관리감독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감정 기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독립성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대표적 감정 기관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과 대검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는 확연히 비교된다. 국과수는 주로 경찰에서 요청한 감정 업무를 담당하는데, 행정안전부 산하기관일 뿐 경찰에 종속된 곳은 아니다. 수사기관과 떨어진 곳에 위치해 물리적으로도 독립돼 있다.

하지만 검찰에서 키우고 있는 포렌식센터는 전혀 다르다. 대검 간부가 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부장검사 4명이 조직을 장악하고 있다. 실무를 담당하는 120명 안팎의 직원은 대검에서 검사와 함께 일하며 인사와 예산도 검찰 통제를 받는다. 감정 업무는 수사기관과 분리된 공간에서 독립된 기관이 맡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고발 사주’ 사건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포렌식 결과에 대한 해석을 두고 조작 논란이 일었던 것도 구조적 문제와 무관치 않다. 검찰이 이런 문제점을 몰랐던 건 아니다. 포렌식센터를 검찰에서 분리해 법무부 산하에 두고, 법무연수원에 별도 공간을 확보해 사실상 독립기관으로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유야무야됐다. 검찰은 포렌식센터를 확대할 게 아니라 분리해야 한다. 귀찮더라도 신뢰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한 지름길이다.

강철원 엑설런스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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