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 말보다 호소력 짙은 색깔
지지층 규합, 이미지 쇄신 도움
선거마다 '컬러 마케팅' 꽃단장
간판 교체? 필요한 건 '알맹이'
색은 정치다. 특정 색깔이 정치적 피아(彼我)를 가른다. 세력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지지자를 규합한다. 구태를 벗어던지고 쇄신을 선보이는 척, 속이기도 쉽다. 그래서 색은 그 자체로 고도의 정치적 무기다.
정당들은 선거 때마다 간판 색깔을 갈아 끼우며 한 표를 호소한다. 4·10 총선을 앞두고도 각 정당은 알록달록 꽃단장에 여념 없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갯빛을 넘어 핑(핑크)하(하늘)까지. 각양각색으로 한국 정치를 다채롭게 물들였던 '색깔의 정치'를 톺아본다.
빨강 - 보수의 금기를 깨다
빨강은 보수에 위험한 색이었다. 공산주의자, 빨갱이 등 '레드 콤플렉스'를 떠올리게 되니 경계했다. 한나라당 시절까지 보수의 색깔은 파란색이었다. 금기가 깨진 건 2012년 총선을 앞두고였다.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30년간 사용한 파랑을 버리고 빨강으로 교체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껍데기만 바꾼 게 아녔다. 경제민주화를 띄우고, 이준석·손수조 등 청년을 발탁하며 개혁을 선도했다. 빨강은 변화를 향한 보수의 간절한 몸부림으로 포장됐다. 결국 그해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대선에서 박근혜는 대통령이 됐다. 이후 자유한국당을 거쳐 국민의힘까지 이제 보수의 색은 빨강이 됐다.
주황 - 앙숙도 못 막은 신당
주황은 여의도에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유권자들의 눈길을 끄는 선명한 5원색(빨강·노랑·파랑·초록·보라)에 들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주류의 색을 놓쳐 선택지가 없는 후발주자들에겐 인기가 높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추진하는 '개혁신당'도 주황을 당 색깔로 '픽'했다. 젊음, 대담함을 상징한다며 '개혁 오렌지'라고 이름까지 붙였다. 주황의 첫 주인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정당인 민중당이었다. 2020년엔 이 전 대표와 앙숙인 안철수 의원이 만든 국민의당도 사용했다.
노랑 - 컬러 정치 마케팅 신호탄
노랑은 민주와 진보의 색이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가 '황색돌풍'을 일으키며 여소야대의 제1야당으로 부상했던 게 시작이었다. 이후 노랑은 '정치인 노무현'의 색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했던 2002년, 전국은 노란 스카프와 노란 풍선을 든 '노사모'의 노랑물결로 넘실댔다. 한국 정치사에 컬러 마케팅이 시작된 신호탄이었다. 열린우리당을 거쳐 민주통합당까지 명맥을 이어오던 노란색의 주인은 2013년부터는 정의당으로 주인이 바뀌었고, 더 또렷한 '진보'의 색깔로 자리 잡았다.
초록 - 뒷심 아쉬운 '초록은동색'
초록을 전면에 내세워 성공한 건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안철수 대표가 만든 국민의당이다. 거대 양당이 아닌 새 선택지에 국민은 제3당이란 캐스팅보트를 쥐여줬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 탄핵사태로 양당 구도가 굳어지면서, 녹색돌풍은 오래가지 못했다. 보수에서 이탈한 바른정당과 합당하며 불씨를 되살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바른정당의 하늘색과 합친 색깔은 민트색, 우리말로는 청록색이었다. 하지만 두 당 모두 보수당에 편입되면서 초록은 힘을 잃었다.
파랑- 민주, 중도로 외연 넓히다
파랑은 이제 민주당의 색이다. 1987년 평화민주당을 시작으로 녹색과 노란색을 상징색으로 녹여온 민주당은 2012년 총선·대선의 쓰라린 2연패를 겪은 뒤 파란 간판을 처음 전면에 내걸었다. "이종교배(異種交配)를 시도하며 새누리당을 흉내 낸다"는 비판까지 들으며 내린 결단이었다. 파랑은 배신하지 않았다. '안정' '신뢰' 이미지가 강조된 파란색은 민주당이 중도로 외연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됐다. 2016년 총선에서 제1당 고지에 올라서며 효과를 톡톡히 봤다. 바다파랑(새정치민주연합)에서 이니블루(문재인 대표), 겨울쿨톤 블루(이재명 대표)까지. 민주당은 지금까지 파랑을 고수하고 있다.
남·보라 - '다양성·평등' 가치 '고급' 보라
남색과 보라는 단독으로 쓰인 색은 아녔다. 최근 이낙연 전 대표와 민주당 탈당파가 합친 새로운미래가 짙은 파랑을 당색으로 내세우며 부각된 정도다. 보라는 부침이 많았다. 2006년 서울시장에 도전한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실패한 경우다. "붉은색과 푸른색을 한데 아우르는 보라색 정치"를 내세웠지만, 당시만 해도 대중들은 보라색을 고급스럽게 여긴 탓에 거리를 뒀다. 이제는 달라졌다. 성평등과 젠더 다양성의 의미가 더 크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정의당이 상징색인 노랑에 '보라'를 더했는데 '평등보라'였다.
핑크 - 색깔만 바꿔서야 안 속는다
핑크는 파격이었다. 지난 21대 총선을 앞두고 범보수세력이 하나로 뭉친 미래통합당은 당 색깔로 이름도 거창한 '해피 핑크'를 선보였다. 밝은 파스텔톤의 분홍색. 밀레니얼 세대가 선호한다고 '밀레니얼 핑크'란 말까지 갖다 붙였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사태로 반성 없이 궤멸했던 보수 진영의 '꼰대'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한 나름의 승부수였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참패였다. 알맹이를 바꾸려는 노력은 부족했던 눈속임의 대가였다. 그렇게 핑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바꾼다고, 속까지 바뀌는 건 아니란 걸. 요란했던 색깔전쟁의 '색'다르지 않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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