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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들 밥 먹이는 일이라면”… 신부의 곳간이 비자, 승려가 쌀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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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들 밥 먹이는 일이라면”… 신부의 곳간이 비자, 승려가 쌀을 내밀었다

입력
2024.01.01 04:30
수정
2024.01.01 09:18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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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으로 뭉친 동갑내기 승려·신부의 의기투합]
3000원 한 끼 제공하는 이문수 신부의 식당
고물가로 어려움 겪자 각밀 스님이 쌀 보태
종교 뛰어넘은 우정... "편견 없는 공감 있다면"

흥천사 주지 각밀(왼쪽) 스님과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가 지난달 26일 서울 성북구 대한불교조계종 흥천사에서 본보 인터뷰 전 걸으며 대화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배고픈 청년들 밥 먹이는 일이잖아요.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회색 승복의 스님과 로만 칼라 차림의 신부님. 서로 다른 종교에 몸담은 마흔아홉 동갑내기 성직자 두 사람이 의기투합했다. 신부와 승려가 손을 맞잡고 한데 뭉친 과업은 바로 굶주린 청춘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 ‘밥심’을 에너지 삼아, 종교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는 두 사람은 이문수 가브리엘(49) 신부와 각밀(49) 흥천사 주지다.

3000원에 밥·반찬 무한 리필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가 운영하는 식당인 서울 성북구 '청년밥상 문간'에서 지난달 28일 점심 한 청년이 김치찌개를 먹고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지난달 28일 찾은 서울 성북구 식당 ‘문간’의 모든 테이블에선 이미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손님 대부분은 앳된 얼굴의 청년들. 라면사리를 건져 먹던 김동완(19)군은 “음식도 맛있고 가게 분위기도 밝아서 좋다”며 “한 달에 최소 두세 번은 온다”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김군의 친구도 연신 “맛있다”고 외치며 셀프바를 몇 번이고 오갔다.

김치찌개값은 단돈 3,000원이다. 편의점 도시락 하나 값도 안 되는 가격에 청년들이 더운 음식을 배불리 먹는 그 모습을, 덩치 큰 중년 남자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바로 식당 사장님인 이문수 신부다.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가 지난달 26일 서울 성북구 대한불교조계종 흥천사에서 본보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기도하던 성직자가 밥주걱을 든 계기는 한 사건 때문이다. 2015년 여름 서울 고시원에 살던 한 청년이 굶주림 끝에 세상을 떠났다. 젊은이가 ‘밥을 먹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이 신부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때부터 청년들의 끼니를 챙기는 일에 몸을 던지며, 2017년 겨울 사회적 협동조합인 ‘청년밥상 문간’을 시작했다.

이 식당의 유일한 메뉴인 김치찌개엔 두부와 고기가 넉넉하게 들어갈뿐더러, 뭐니 뭐니 해도 밥과 반찬이 무한 리필이다. 식당 문을 연 지 6년이 지났지만, 고물가 기사가 무색하게 처음 가격 3,000원을 그대로 받는다.

그러다 보니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김치찌개 1인분의 원가는 최소 5,000원. 청년 한 사람이 올 때마다 2,000원 정도 적자를 내야 한다. 후원에 의존하다가 코로나 팬데믹 탓에 사정이 더 나빠졌다. 결국 2022년 4월 문간의 쌀통은 바닥을 드러냈고, 이 신부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 소식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했다.

그때 스님이 손을 내밀었다

흥천사 주지 각밀(왼쪽) 스님과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가 지난달 26일 서울 성북구 대한불교조계종 흥천사에서 본보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바로 그때 손을 내민 이가 각밀 스님이다. 각밀 스님이 주지인 흥천사(돈암동)는 문간 식당(정릉동) 인근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당시 흥천사에서 보낸 10㎏ 쌀 열 포대(공깃밥 약 1,000인분) 덕에, 이 신부의 숨통이 트였단다.

도움을 준 각밀 스님에게도 이 신부는 고마운 은인이라고 한다. “종교가 ‘미래 세대’인 청년을 (이렇게) 도울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이제 막 사회에 나와 다른 세대보다 기회를 얻기 힘든 청년들만의 고충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고 한다.

각밀 스님이 생각하는 종교의 존재 이유는 ‘어려운 이들이 고통을 덜고 행복할 수 있게 돕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부가 운영하는 식당을 돕는 일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식당에 틈틈이 쌀 100~200㎏씩을 보탰다. 지난달 22일에는 동지 팥죽 100인분을 쒀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밥을 매개로 두 성직자는 우정을 나누기 시작했다. 하도 드나들다 보니 이 신부에게도 흥천사는 친숙한 공간이 됐다. 각밀 스님도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메뉴만 먹어 봤지만, 문간의 김치찌개는 최고”라고 자부한다. 1974년생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향후 여행 계획을 함께 논할 정도로 친해졌다. 해외 건축에 관심이 많은 각밀 스님이 스페인 순례길 방문 의사를 밝히자, 이 신부가 “그러시다면 그 가이드는 제가 맡겠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흥천사 주지 각밀(왼쪽) 스님과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가 지난달 26일 서울 성북구 대한불교조계종 흥천사에서 본보 기자와 인터뷰하기 전 걸으며 대화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화합의 비결을 묻자 ‘편견 없이 열린 태도’라는 답이 돌아왔다. 청년들을 돕자는 신조 아래 머리를 맞댄 게 전부라고 했다. 이 신부가 말했다. “청년을 위한 문화행사를 기획하던 중 스님이 사찰에서 진행한 패션쇼 영상을 보여주셨어요. 여기서 착안한 ‘흥천사 청년영화제’ 협업을 조심스레 제안했더니 흔쾌히 환영해 주셨죠. 스님은 그런 분입니다.” 각밀 스님도 “(종교의) 차이에 집중하느라 본질을 망각하면 갈등과 배척 말고 남는 게 있겠느냐”며 화답했다.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가 운영하는 식당인 서울 성북구 '청년밥상 문간'이 지난달 28일 점심식사를 하려는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두 사람의 목표는 ‘문간 같은 식당이 더는 필요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2023년 이 식당은 어느 때보다 더 붐볐다. 하루 평균 손님이 100여 명 정도였지만, 여름부터 그 수가 2배 이상 뛰었다. 흥천사에서 보내준 쌀은 열흘이면 동날 정도다. 이 신부는 “요즘 한 끼 식비가 1만 원이 넘다 보니 물가에 치인 청년들이 더 많이 찾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새해에도 두 사람은 변함없이 청년들을 응원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신부가 “청년들이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도록 문간이 곁을 지키겠다”고 하자, 옆에서 이를 듣던 각밀 스님도 “복을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니, 뭐든 돕겠다”며 힘을 실었다.

젊은이들 밥을 챙기자며 뭉친 두 성직자. 부처님을 모시는 이와 하느님을 따르는 이의 우정은 그렇게 '리필'되고 있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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