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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방치로 얼룩진 어린 시절...아직도 악몽에 시달려요

입력
2023.12.11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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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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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저는 폭력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에서는 친형의 폭력과 부모님의 방관, 학교에서는 친구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며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저에게 폭력을 가했던 사람들이 떠오르고 악몽에 시달립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제 몸은 멍투성이였습니다. 신발을 빼앗겨 한겨울에 맨발로 집에 들어온 적도 있었고, 교복과 신발이 피범벅인 적도 많았습니다. 그걸 보고도 부모님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부모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합니다. 부모도 한때는 아이였고 성숙하지 못한 상태로 자식을 낳고 키우셨으니까요. 절 괴롭혔던 친구들과 형도 그랬을 겁니다. 이성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직도 그때 꿈을 꾸고 있어요. 꿈에서는 당시 교실에서 당하던 괴롭힘을 재경험합니다. 식은땀에 젖어 잠에서 깨면 마음이 괴로워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부모님과 단절된 채 살아왔습니다. 가족이지만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형식적 관계일 뿐 관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가정에서의 방치와 폭력 그리고 학교 폭력 속에 살았던 기억밖에 없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때 유학을 갔는데 하숙집 주인이었던 외국인 할머니를 만나 따뜻한 관계를 경험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그분을 엄마라고 생각합니다. 유학을 가게 된 이유도 부모님 때문이었어요. 어머니가 당시 "(성적 하위권 학생들이 가는) 그런 학교에 다니면 엄마가 창피하니 차라리 유학을 가라"고 했어요. 당시 저는 또래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학교에 가지 않고 놀이터나 다리 밑, 아파트 지하실 등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습니다. 학업은 거의 꼴찌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일주일에 한 번꼴로 악몽을 꿉니다. 악몽은 주로 중학교 교실이 배경이고, 저는 아이들 혹은 형에게 괴롭힘을 당합니다. 어젯밤 악몽에선 제가 생모에게 이렇게 원망을 쏟아냈어요. "나는 부모의 방치로 아기의 정신 연령을 가진 채 학교에 입학했고 괴롭힘을 당했어요. 그 괴롭힘으로 인해 정신은 피폐해졌고 사회성이 결여됐어요. 난 뭘 해도 안 될, 사회에 필요 없는 존재입니다." 반복되는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어떻게 떨쳐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삶의 목적을 모르겠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행복, 돈 혹은 가정을 목표로 살아가지만 저는 그런 것들이 제 삶의 목적으로 느껴지지 않아요. 길어야 백 년 남짓의 삶에서 어떤 것을 누린다 한들 천년만년, 억만년 후에 아무 의미 없을 것이라는 생각만 들어요.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한 채로 과거의 기억에 지배당하고 있어 너무 괴롭습니다.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이진우(가명·36·프리랜서)

진우씨, 당신이 겪는 증상은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입니다. 어린 시절 경험한 폭력으로부터 남은 깊은 상처가 아직까지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겁니다. 지속적으로 겪은 폭력은 한 사람의 존엄성과 정체성을 훼손합니다. 그런 사건을 겪을 때 서로 보호하고 도와줘야 할 가족에게 외면당한다면 더욱 헤어 나오기 힘든 상처로 남게 되겠지요. 트라우마는 사건보다 이후 치유 과정이 중요한데 진우씨는 큰 사건들을 반복적으로 겪고 제대로 된 보호와 지지를 받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치유받지 못한 당신의 마음을 따라가 보려고 해요.

아주 어린 나이부터 감당하기 힘든 폭력을 일상적으로 겪으면서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까요. 당장 벗어나고 싶었겠지만 어린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테지요. 학교 폭력도 심각한 문제였지만 가정에서 겪어온 폭력과 방관이 진우씨에겐 더 큰 상처로 남았을 겁니다. 형의 폭력과 이후 부모님의 반응을 통해 진우씨는 가족에게 당신이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거예요. 폭력적인 형을 벌하지 않았다면 따뜻하게 감싸 주어야 했지만 누구도 당신의 아픔을 알아봐 주지 않고 넘어갔죠. 그런 모습이 당신을 무력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별일 아닌 일이라서, 넘어갈 만한 사안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당신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머리로는 폭력을 행사한 친구와 형, 방관한 부모님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고 했었지요. 그 감정을 부정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감정이 남아 있다는 방증이죠.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에도, 청소년기에도 삶은 당신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의 연속이었어요. 집에서 괴롭힘을 겪고, 학교 폭력을 당했을 때도, 유학을 떠났을 때에도 당신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었을 겁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용히 감정을 삭이는 것뿐이었을 거예요. 당신이 느꼈을 가족에 대한 원망, 폭력을 행했던 이들에 대한 분노를 의식적으로 떠올리면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숨겨 놓았던 것이죠. 그동안 당신이 누르고 있었던 트라우마의 일부가 꿈으로 드러난 것이고요.

저는 그런 당신의 괴로움과 혼란을 깊이 이해하고 지지합니다. 특히 평생 감당하기 어려웠던 괴로움을 끄집어낸 사실이 훌륭합니다. 이제 정말 수면 깊이 눌렀던 그 감정을 마주할 때가 온 거예요. 먼저 당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 당신을 힘들게 했던 이들을 미워해도 괜찮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요. 부모와 형제에 대한 원망, 친구들에 대한 미움을 자책하지 마세요. 그 마음을 오히려 날것으로 대면하고 잘 파악하고 있어야 그 감정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알아 가고, 이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수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삶의 목표를 찾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도,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든 태어난 순간부터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자긍심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단단히 자리 잡지 못했어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보통은 어린 시절에는 부모로부터, 사춘기 시절엔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긍정적인 자아상이 정립됩니다. 진우씨가 현재 겪는 어려움은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거치며 형성된 모습들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경험을 토대로 대인 관계를 맺고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게 되지요. 현재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결되지 않은 과거 경험과 그로부터 파생된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해요. 그 말은 희망적으로,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내가 만들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학창기에 어떤 친구들과 관계를 맺느냐는 어느 정도 정해진 수순이었지만 성인이 된 지금의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어린 시절 타인들이 나에게 안겨준 부정적인 경험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차리고, 적절히 대응하는 걸 포기하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진우씨, 이제 형도 또래 친구들도 당신을 때리지 못합니다. 방관하면서 절망감을 안겨 줬던 부모님도 이제 당신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죠. 진우씨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은 새로운 인생을 위한 '성인기 초기'를 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3차 개별화'의 시기라고 하는데, 가정으로부터 떨어져 자신을 탐구하고, 독립적인 자아상을 만들어가는 시기이죠.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감정을 살피고 사적인 관계를 만들어 새로운 지지 체제를 구축해 가면서요.

과거를 떨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과거를 완전히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요. 지금 진우씨가 지나고 있는 이 시기는 특히나 자신이 삶의 주인이 돼 인생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시기입니다. 진우씨뿐 아니라 청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인생의 당면 과제이자 일생일대의 기회죠. 불안과 모호함을 견디며 자신을 받아들이는, 그렇게 한 걸음씩 발을 디뎌 어느 순간 원하는 삶의 모습을 그리는 날이 곧 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사이트(https://www.hankookilbo.com/counseling) 또는 아래 바로가기를 통해 양식을 내려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정리=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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