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르포]"남편 압류 딱지 붙여 데려가세요"... 당당한 1.8억 체납자

알림

[르포]"남편 압류 딱지 붙여 데려가세요"... 당당한 1.8억 체납자

입력
2023.12.01 04:30
수정
2023.12.01 15:54
6면
0 0

[종전 없는 체납 전쟁]
관세청 '체납 정리' 현장 동행
"세금 낼 돈 없다"만 반복
사치품 없으면 압류·징수 어려워

지난달 22일 관세청 서울세관 체납정리과 직원들이 관세 1억8,000만 원을 체납한 강모씨 집을 수색하고 있다. 조소진 기자

지난달 22일 관세청 서울세관 체납정리과 직원들이 관세 1억8,000만 원을 체납한 강모씨 집을 수색하고 있다. 조소진 기자

"진짜 돈이 없다니까요. 압류 스티커 붙이면 지금 여기서 창문 열고 뛰어내릴 거예요!"

살짝 열린 아파트 현관문 너머로 "돈이 없다"는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시가 10억 원 상당의 서울 강북구 소재 아파트에 사는 강모(54)씨 목소리다. 지금까지 1억8,239만 원을 체납한 그는 당당했다. 큰소리와 배짱, 위협을 앞세웠다. 반박에 나선 공권력은 무기력하고 무안했다. 그렇게 말과 말이 부딪치며 침 튀기는 전장(戰場)으로 휩쓸려 가는 '체납 정리' 현장을 서막부터 숨죽여 지켜봤다.

지난달 22일 오전 8시 20분, 강씨 집에 들어선 ‘관세청 125 체납추적팀’은 압류·수색통지서를 내보인 뒤 안방부터 수색했다. 휴대폰 카메라 조명을 비춰 가며 장롱과 화장대 서랍, 침대 매트리스 밑 등 귀금속이나 명품, 현금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다.

지난달 22일 관세청 서울세관 체납정리과 직원들이 관세 1억8,000만 원을 체납한 강모씨 집을 수색하기 전 정보 등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조소진 기자

지난달 22일 관세청 서울세관 체납정리과 직원들이 관세 1억8,000만 원을 체납한 강모씨 집을 수색하기 전 정보 등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조소진 기자

가택 수색을 하던 김덕보 서울세관 체납정리과 팀장이 강씨에게 말했다. "이 아파트 거래가격이 10억 원이고 학원도 운영하는 데다, 건강보험 역시 밀린 것 없이 잘 내고 있잖아요. 이 정도면 충분히 밀린 세금을 낼 수 있는 여건입니다. 더 이상은 못 기다려요."

강씨가 되받아쳤다. "돈이 진짜 없다니까. 다 아내 것이에요." 온 집을 뒤지는 수색이 한창일 때도 작은방 침대 위에서 여유롭게 책을 보던 그의 아내가 남 일처럼 퉁명스레 내뱉었다. "체납자인 이 사람(남편)만 나가면 되는 거잖아요. 그냥 압류 딱지 붙여서 데려가세요."

강씨는 20년 전 총 1억 원 상당의 골프채를 저가로 수입 신고했다가 적발된 뒤 세관당국의 계속된 납부 요청을 무시하고 있다. 기존 체납액에다 5년간 가산금까지 붙은 탓에 현재 그가 내야 할 돈은 약 1억8,000만 원까지 불었다.

지난달 22일 관세청 서울세관 체납정리과 직원들이 관세 1억8,000만 원을 체납한 강모씨를 설득하고 있다. 강씨는 "돈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조소진 기자

지난달 22일 관세청 서울세관 체납정리과 직원들이 관세 1억8,000만 원을 체납한 강모씨를 설득하고 있다. 강씨는 "돈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조소진 기자

이날 세관 직원들은 결국 '빈손'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귀금속과 고가의 명품 등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80인치 TV, 소파가 있었지만 생활품목은 인권침해 우려가 있고, 매각을 하더라도 제값 받기가 어려워 보통 압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나마 세금 분할납부신청서에 강씨 서명을 받은 게 성과라면 성과였다. "2년간 유예, 이후 매년 1,000만 원씩 상환" 조건을 내건 강씨에게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응수한 게 현장에서 세관 직원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며칠 뒤 후속 조치를 물었더니 관세청은 강씨의 은닉재산을 추적 중이고, 발견 즉시 징수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 팀장은 "체납 정리는 '밀고 당기기'의 연속"이라며 "당장이라도 일부를 압류할 건지,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체납된 세금을 일부라도 내게 유도할 건지 판단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약 7억 원을 체납한 고추 수입업자를 설득, 지난 4년간 세금을 납부하게 해 현재 9,000만 원 남은 사례를 들려줬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그래픽=신동준 기자

실제로는 강씨처럼 세금을 내지 않는 사례가 더 많다. 그 방증이 1조9,562억 원에 달하는 올해 누적 관세 체납액 규모(8월 기준)다. 누적 체납금액은 2019년 1조344억 원에서 2020년 1조1,302억 원→2021년 1조5,780억 원→2022년 1조9,003억 원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체납자가 버티기에 들어갈 경우 별도로 손 쓸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불법으로 채우는 사적 욕심을 조세 정의가 제어하려면 더 강도 높은 제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 팀장은 세관으로 복귀하는 길에도 다른 체납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달은 좀 어떠세요? 세금 조금이라도 내야죠. 밀린 거 매달 내기로 했잖아요." 읍소하는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조소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