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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지평 넓혀야 할 한국 노동조합

입력
2023.11.01 00: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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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 반전된 글로벌 노동운동
폭넓은 의제로 선회한 영미권 노조
한국도 변화 보이지만, 여전한 아쉬움

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 배우들이 9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파라마운트 스튜디오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AP 뉴시스

올 들어 영미권에서 들리는 쟁의 소식이 유난히 잦아졌다. 교사 등 전문직부터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 세계 최대 커피숍 체인의 서비스 노동자, 자동차 생산직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직종을 불문하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을 벌였다. 팬데믹 이후 일하려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노사 간 힘 균형에 변화가 생긴 것, 그리고 폭주하는 물가를 감당하기 위해 임금을 올려야만 하는 노동자들의 절박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다만 노동운동 지형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경제 전체에서 노동소득 비중의 감소, 불평등과 불안정성의 심화, 그리고 이런 문제들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는 노사관계 불균형이 누적되어 저변에 깔려 있다. 양극화와 노조 하락세가 두드러졌던 영미권에서 최근 파업이 더 자주 발생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현상은 2011년 월가 점령 시위처럼 한때로 그칠까, 아니면 지난 30여 년간의 노동운동 하락세를 반전시킬까? 연구자들의 무게 추는 조심스레 후자로 기운다. 얼마간 희망이 섞인 예측이긴 하지만 근거가 없지는 않다. 노조에 대한 인식 변화가 그중 하나다. 2022년 8월 미국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1%가 '노조를 지지한다'고 답했다. 이는 1965년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젊은 세대의 인식 변화도 눈에 띈다. 이는 발언권 격차(voice gap), 즉 노동자로서 일터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한계를 강하게 느낀 영향으로 보인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변화하는 운동의 양상이다. 미국 시카고, LA 등 지역 교사노조의 '공익을 위한 교섭(Bargaining for the common good)'이 대표적인 사례다. 양질의 공교육을 목표로 지역사회 이해관계자 연합을 구축해 대변하며, 임금 등 좋은 일자리 의제를 '교육의 질' 목표와 연결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금융화, 긴축재정과 같은 거시 이슈를 제기하기도 하는데, 지역 사회의 구체적 요구를 경제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풀어내려는 시도다. 임금, 근로조건뿐 아니라 기업가치, 인종 정의, 직장 안전 등 의제의 다양화를 시도하는 지역사회 기반의 연대적, 교차적 노조 운동은 최근 영미권, 특히 미국 노동운동의 축을 전환시켜 온 커다란 흐름이다. 기존 '노동자' 틀에 부합하지 않는 취업자가 늘고, 노동의 공간적 경계가 흐려지고, 제도의 사각지대가 넓어지는 상황에서 노조의 존재 의의를 적극적으로 찾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20세기 산업화 시대를 풍미한 백인 남성 중심 노조운동이 소임을 다했음을 알려준다.

한국에서도 노조 운동의 변화 기류는 감지된다. 노조 조직률이 지난 5년간 4%포인트 가까이 증가한 것은 국제적으로도 이례적이다. 노조 만들기를 예사롭게 보지 않는 한국에서 더욱 그렇다. 대체로 공공부문이 주도했지만, 민간부문도 합세했다. 영미권처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노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나,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이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온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조직률 증가가 임금 지불 능력이 높은 기업들에서 주로 발견되고, 교섭의제가 여전히 협소하다는 점이다. 기존 노조는 새로운 노조 운동의 요구와 기대를 포용할 만한 기민함과 너른 품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 요구와 함께 자라난 한국 노조의 사회 운동적 명맥은 여전히 '조합원 요구에 복무한다'는 슬로건에 박제돼 있다. 그러는 사이에 조직률 상승 기류는 주춤하는 모양새다. 이 흐름이 단기간에 끝날지 지속될지는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거시와 미시를 잇는 의제를 발굴하고 교섭할 노조의 역량에도 달려 있다.

권현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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